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53088.html


냉전 속 고립 벗어나 인류 자산 되살린 천재 고고학자

등록 :2020-07-10 06:02 수정 :2020-07-10 10:35


[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 (마지막회) 마야문자 해독한 크노로조프


스탈린 치하 대학원 입학 거부되고 홀로 골방서 마야문자 연구

미지의 땅과 인간에 대한 열정과 열린 마음으로 문자해독 성공


애완고양이 아샤를 안고 있는 크노로조프. 제니스케비치 촬영. 출처 위키피디아


고대 문명의 신비를 발견하는 이야기라면 당연히 현장을 누비며 새로운 유물을 발견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하지만, 모든 고고학자가 그런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다. 시대의 한계로 연구실에서 평생 과거의 유물을 연구하여 세계적인 발견을 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중남미의 마야문자를 해독한 유리 크노로조프(1922~1999)를 두고 하는 얘기다. 그는 외국을 나가거나 실물 자료는 보지 못한 채 오로지 몇 권의 자료만으로 엄청난 작업을 일구어냈다. 냉전의 시대에 고립을 뛰어넘어 세계적 연구를 한 그의 생애는 다시 고립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스페인의 정벌로 잊힌 마야문명


마야는 원래 현재 중남미에 사는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마야문명이라고 하면 보통 기원전 1500년부터 스페인의 정복 이전인 약 3천년간 멕시코 동남부와 과테말라 등 유카탄반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대표적인 신대륙의 문화를 지칭한다. 고대 마야의 문명은 70개 이상의 대형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다. 특히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고전기(서기 250~900년)가 전성기였다. 티칼, 코판, 팔렝케 등 우리가 흔히 보는 대부분의 마야 유적은 이때에 만들어졌으며, 대형 도시는 인구가 10만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후에 멕시코 지역의 아스테카(아즈텍)문명이 성장하면서 그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종교와 정치를 결합한 독특한 문명을 지켜왔다. 하지만 16세기 초반 스페인의 침략으로 마야문명은 초토화되었다. 이교도라는 이유로 마야인들은 학살당했고, 그들이 남긴 수많은 유적들은 잿더미가 되었다. 1649년 마지막 마야의 도시가 멸망되면서 수천년을 이끌어온 마야의 문명은 완전히 망각되었다. 약 200년이 지난 뒤에 고고학자들은 다시 마야의 유적을 발견했지만, 정작 그들이 남긴 글자를 해독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마야와 관련된 유적과 책들을 철저하게 파괴했기 때문이다. 마야문명 당시에는 수천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야의 달력과 책들은 지금은 고작 3권(또는 4권)이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나마 마야의 문자를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16세기에 이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했던 디에고 데 란다(1524~1579) 신부가 쓴 ‘유카탄 보고서’였다. 란다 신부는 이 책에서 다양한 마야인들의 풍습과 함께 몇 개의 문자를 소개하고 그 뜻도 적어놓았다. 역설적으로 란다 신부는 가장 악랄한 마야문명의 파괴자였다. 그는 마야인들이 집에 감추어둔 가보와 같은 책인 마야의 달력을 불태웠다. 마야인들에게 달력은 1년의 농사를 짓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는 이름으로 불태웠으니 삶의 터전을 졸지에 잃은 마야의 사람들은 울부짖었다. 그리고 란다 신부는 그 마야인들을 개종을 거부하는 자들이라고 하여 산 채로 불태워 죽였다. 얼마나 잔인했던지 다른 신부가 그를 고발해서 교황의 재판에 세울 정도였다. ‘유카탄 보고서’는 재판에 선 란다 신부가 마야인들의 심각한 우상숭배 현실을 보여주고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썼던 보고서였다.


그나마 이후엔 란다의 보고서도 원본은 사라졌고 18세기에 요약한 사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뒤 마야문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의 문자는 해독할 수 없는 언어로 남아 있었다.


박사논문 작성 후의 크노로조프.


냉전과 편견을 뛰어넘은 발견


세기의 미스터리인 마야문자는 뜻밖에도 1952년 소련 학자 유리 크노로조프가 해독해냈다. 그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출신인데 그 삶의 궤적은 마치 영화의 주인공처럼 극적이었다. 크노로조프는 어려서부터 그림과 예술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화가의 꿈을 키웠지만 10살이 되던 해에 300만명 가까이 기아로 사망한 유명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겪으며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 입학한 직후에는 2차 대전이 발발하였고, 그가 살던 하리코프는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는 독일군의 징집을 피해서 몇 년을 숨어 살았고, 정작 독일이 패망한 이후에는 점령지 출신이라며 독일의 부역자로 의심받았다. 그 결과 전쟁 직후 스탈린 치하에서 대학원 입학마저 거부되었고 언제 수용소로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게 되었다. 그가 좁은 연구실에서 아무도 모르는 마야문자의 연구에 매달린 것은 어쩌면 시대의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크노로조프는 원래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원 입학이 불허되면서 그는 간신히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민속학박물관에 취직을 했다. 그는 박물관의 골방에서 숙식을 하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마야문자 연구를 시작했다. 2차 대전 당시에 소련 병사가 독일에서 가져온 책 2권과 란다 신부의 보고서가 자료의 전부였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만에 그 결과를 발표했다.


실제 크노로조프는 양손잡이였으며 그림에 소질이 있어서 마야문자를 보는 눈도 남달랐고, 수학적인 머리가 비상했다고 한다. 그는 기묘한 그림처럼 생긴 마야문자들의 위치와 특징을 머릿속에서 수학과 통계적으로 재조합해냈다. 2년간의 연구 끝에 그는 마야문자는 뜻을 전하는 표의문자와 음을 전하는 표음문자가 섞여 있다고 보았다. 한국어로 비유하면 한자의 음을 빌려서 쓰는 이두나 향찰과 유사할 것이다. 당시 중남미에서는 미국과 서방의 학자들이 돌에 새겨진 다양한 마야문자를 새롭게 발굴한 상태였다. 하지만 크노로조프는 그 새로운 발견을 알 턱이 없었다. 오로지 란다 신부의 자료와 남아 있는 마야의 책 3권으로만 글자를 풀어냈으니 그의 연구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크노로조프는 1952년에 자신의 해독을 발표하면서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었고, 3년 뒤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에게 박사논문조차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소련 점령지 출신인데다 그의 연구는 당시 소련을 적대시하는 신대륙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연구는 마야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마야인들에겐 문자가 없었다고 선언한 엥겔스의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는 반동으로 몰려 수용소로 갈 것을 각오하고 박사논문 심사장에 나갔다. 다행히도 그의 연구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마 소련의 정부와 학계는 냉전 시절 신대륙을 연구한 그의 업적이 사회주의의 우수함을 선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크노로조프의 해독에 대하여 미국 학계는 극도의 거부반응을 보였다. 당시 마야 연구를 주도하던 에릭 톰슨(1898~1975)은 마야문자가 실제 문법을 지닌 글자가 아니라 그때그때 남긴 기호라고 생각했다. 톰슨은 평생 크노로조프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았고, 대신에 자신의 연구 결과를 또 다른 저명한 마야 전문가인 예일대 교수 마이클 코에게 편지를 보내어 서기 2000년에 이 편지를 공개하며 누가 맞는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코 교수는 2000년 새해에 그의 편지를 공개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다. “에릭, 아쉽지만 당신이 틀렸소, 우리 모두 크노로조프의 해석을 따라서 마야를 연구하고 있다오.”


실제로 1970년대 이후에 모든 마야문자의 해석은 크노로조프의 방법에 기반한다. 그 결과 지금 마야 전문가들은 전체 마야글자의 80% 가까이 해석한다고 자부한다.


일흔 가까운 나이에 마야의 티칼 유적을 처음 본 크노로조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화면 갈무리. 그가 쓰고 있는 모자는 50년 전에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가 선물한 것이다.


70살에 처음 본 마야


크노로조프에게 이러한 세계적인 명성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수많은 나라에서 그를 초청했지만 소련 시절 내내 그는 여전히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다. 결국 1990년이 되어서야 그는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크노로조프를 국민적 영웅으로 모시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직접 그를 초청했던 것이다. 그가 마야문자를 해독한 지 거의 40년이 다 되었고, 건강도 극도로 쇠약해진 일흔이 다 된 나이였다. 이때 그는 비틀대면서 기어이 티칼 피라미드를 올라가서 평생 책으로만 보았던 고대 마야인들의 흔적을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이후 1995년에는 멕시코를 방문하여 팔렝케, 야슈칠란 등 주요한 유적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연로했고 당시는 소련이 패망한 직후여서 노학자의 삶은 그렇게 편하지 못했다. 결국 1999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에 시달리다 홀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멕시코대사관의 도움으로 장례도 간신히 치를 정도였다. 멕시코에서는 이후 3m에 달하는 유리 크노로조프의 동상을 세우고 국민적 영웅으로 모시고 있다.


수많은 핸디캡을 딛고 그가 마야문자 해독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차별 없이 보고 인류의 보편성에 눈길을 주었기 때문이다. 크노로조프는 마야의 문자도 세상의 다른 글자와 마찬가지로 수백년 동안 발달해왔다는 단순한 진리에 착안했다. 미지의 땅과 그 속의 사람을 알아 간다는 것은 그들을 정복하여 전리품을 박물관에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편견을 배제하고 인간문화의 보편적인 이해와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점을 몸소 증명한 것이다.


지난 반년 사이 전염병으로 인해 세계 각국은 다시 고립되고 있다. 이러한 고립의 시대에 냉전이라는 물리적인 장벽을 넘어서 세계적인 업적을 이룬 크노로조프의 연구는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온다. 코로나의 장벽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열정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지의 땅과 문화에 대한 열정은 바로 새로운 땅의 정복이 아니라 우리 인류 공동의 자산에 대한 관심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끝>


경희대 사학과 교수


1955년에 발간된 크노로조프의 저서.


마야의 문자를 담은 드레스덴 코덱스(고문서).


마야의 글자가 새겨진 비석. 서기 300~500년께 제작. 비의 신 차크를 표현했다. 프린스턴대학 박물관. 강인욱 촬영


마야 치첸이차(치첸이트사)의 피라미드. 출처 pxhere.com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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