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0840001


왕검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고조선 및 위만조선의 수도 이름



일반정보


고조선 및 위만조선의 수도 이름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국내사서에서는 왕검성(王儉城)이라 표현하였고, 『사기(史記)』 등 중국사서에서는 왕험성(王險城)이라 표현하였다.



전문정보


고조선 및 위만조선의 수도 이름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등 국내사서에서는 왕검성(王儉城)이라 표현하였고, 『사기(史記)』 등 중국사서에서는 왕험성(王險城)이라 표현하였다.


중국사서의 왕험성(王險城)에 대한 주석을 정리해보면, 험독(險瀆)에 존재한다는 인식과 평양에 존재한다는 인식으로 대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먼저 험독(險瀆)에 위치하고 있다는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유송(劉宋) 때의 배인(裵駰)이 찬술한 『사기집해(史記集解)』에서는 후한(後漢) 때 사람인 서광(徐廣)의 견해를 인용하여 “창려(昌黎)에 험독현(險瀆縣)이 있다.(徐廣曰 昌黎有險瀆縣也)”고 하였다. 한편 당대 사마정(司馬貞)이 찬술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서광(徐廣)의 말과 함께, 후한(後漢) 응소(應劭)의 『한서(漢書)』 지리지 주석을 인용하여 “요동(遼東)의 험독현(險瀆縣)은 조선왕(朝鮮王)의 구도읍(舊都邑)이다.(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해는 왕험성이 험독현 지역에 있으며 이곳이 조선왕의 구도읍이라는 인식으로 요약된다.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인 검독으로 이해하고 이를 왕험성에 비정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 요동의 개평(盖平) 지방에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다.(리지린, 1963)


한편,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險瀆)은 요하 서쪽의 오늘날 태안현(台安縣) 부근(중국학계에서는 손성자(孫城子)로 바뀜)에 있었던 것이나, 후한대에는 요동속국 관할인 광녕(廣寧, 北鎭)으로, 진대(晉代)에는 조양(朝陽) 부근의 대릉하 유역으로 옮겨진 창려(昌黎)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 지역은 원래 한대의 요서군 교려현(交黎縣)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이는 고구려의 팽창에 따라 요동군이 서쪽으로 이동되는 과정에서 속현인 험독현도 점차 요서 서쪽으로 옮겨진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서영수, 1988)


반면, 왕험성을 낙랑군과 연결시키면서 그 위치를 고구려 수도인 평양(平壤)과 연결짓는 인식도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5세기말, 6세기초에 활동한 북위인(北魏人) 역도원(酈道元, 469-527)의『수경주(水經注)』를 통해 평양(平壤)=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왕험성(王險城) 인식이 부각되었다. 또한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인용된 신찬(臣瓚)도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 동쪽에 있었다.(臣瓚云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也)”고 하여 왕험성과 낙랑군을 연결시켰다. 이후 당대(唐代)에 편찬된 『괄지지(括地志)』 등에서 이와 같은 이해를 고착하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서 정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에 의하면 험독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 고조선의 도읍은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요하 이동 천산 이서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사기』의 왕험성은 진고공지(秦故空地) 이남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고조선이 요동의 험독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조법종, 2006)


위만조선의 수도였던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현재의 평양 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최근 그 위치를 지금의 환인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곧, 위만조선의 영역을 혼하(渾河) 유역에서 청천강 사이에 분포하였던 연화보-세죽리 문화권으로 보면서, 위만조선 전 지역 가운데 가장 선진적인 문물이 유지되었던 홀본(忽本) 지역(지금의 환인)이 고조선 후기부터 위만조선 시기까지 왕검성, 곧 험독(險瀆)이 위치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위만조선 멸망 이후 현도군(玄菟郡)이 서쪽으로 이동되면서, 왕검성(王儉城)이 위치하였던 험독현(險瀆縣) 역시 무순(撫順)지역을 거쳐 요서(遼西) 지역으로 이동된 것이라고 한다.(김남중, 2001)


한편, 낙랑군(樂浪郡)은 왕험성(王險城)이 함락되기 1년 전인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왕험성(王險城) 지역에 설치된 것이 아니며,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에 왕험성(王險城)이 함락되면서 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되었으므로, 왕험성(王險城)은 현도군(玄菟郡) 지역에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조법종, 2006)



참고문헌


리지린, 1963, 『고조선 연구』, 과학원출판사.

서영수, 1988, 「古朝鮮의 위치와 강역」『韓國史市民講座』2, 일조각.

김남중, 2001, 「衛滿朝鮮의 領域과 王儉城」『韓國古代史硏究』 22.

조법종, 2006, 「위만조선과 한의 전쟁」『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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