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0800001



평양성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고조선의 도성



일반정보


고조선의 도성으로 지금의 평양시, 또는 요녕성 해성(海城)․개평(蓋平) 인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평양성의 위치가 요동에서 한반도 서북부로 이동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조에는 “요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이 되는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 조(247) 세주에는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곳으로 다른 기록에는 그가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있는 평양성에 대해서는 고조선의 중심지 문제와 관련지어 논의가 있어왔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해서는 대동강중심설(大同江中心說), 요동중심설(遼東中心說), 중심지이동설(中心地移動說) 등이 있다. 대동강중심설은 고조선의 중심지를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설이며, 요동중심설은 고조선의 중심지를 지금의 요녕성 해성(海城)․개평(蓋平) 인근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중심지이동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 지방에서 한반도 서북부로 옮겨졌다고 보는 설이다.


대동강중심설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듯이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비정하였다.『동사강목(東史綱目)』,『해동역사(海東繹史)』등 조선 후기의 사서에서도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 또는 평양으로 보았다.


요동중심설 중에는 지금의 개평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대릉하(大凌河)를 고조선의 국경선인 패수(浿水)로 보고 어니하(於尼河)를 왕검성의 패수(沛水)라고 비정하여 왕검성을 지금의 개평으로 비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기원전 7세기 이전에는 개국(蓋國), 청구국(靑邱國), 숙신국(肅愼國) 등의 국명이 있었으나 기원전 7세기 이후에는 조선만이 보이는데 이는 여러 국을 통일한 후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리지린, 1963)


중심지 이동설 중에서는 먼저 기자족(箕子族)의 이동에 주목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기자의 실재를 인정하며 기자는 동이(東夷)라고 하였는데,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같은 기자족의 일파는 난하 하류의 고죽국 근처에 한동안 정착하였는데, 기자가 머문 지역이 조선이며 조선왕의 구도(舊都)를 뜻하는 왕검, 험독(險瀆)도 요서와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기자족은 고죽국을 떠나 요서, 요동으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조선으로 불렸다고 하였다. 기자족은 기자의 별세 후에도 기자족단(箕子族團)이라는 혈연 의식을 가지고 은말(殷末)․주초(周初)로부터 여러 세기가 지난 뒤에 평양 지역에 도달하였고 그 직후 또는 여러 세기가 지난 후에 단군조선과 대체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평양이란 지명도 기자족단이 이동함에 따라 옮겨져서 지금의 평양에 도달했다고 하였다.(천관우, 1989)


그리고 요녕지방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를 조선족(朝鮮族)으로 보고 그들이 전국시대 연(燕)의 동방진출에 의하여 동쪽으로 밀려났다고 보기도 한다. 요녕지방에서는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여러 읍락국가들이 고조선을 맹주국으로 하는 연맹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나, 연의 침략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기원전 4-3세기경에는 고조선의 영역이 요동에서 한반도의 서북부에 걸쳐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김정학, 1990) 이 외에 고조선이 요동지방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아사달은 최초 조선의 위치와 같고, 초기 고조선은 아사달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국가였기 때문에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위치는 요동의 험독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험독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요하 이동 천산의 이서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하였다.(서영수, 1999)


또한 기원전 11세기경 주(周)의 제후국인 연의 세력이 대릉하 중, 상류 유역에까지 진출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연의 세력은 기원전 8세기경에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가 발달하며 남쪽으로 밀려났고,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요서지방에는 산융(山戎)의 제 집단이 활동하였다고 하면서 이들을 비파형동검문화와 연결시켰다. 또한 기원전 3세기 요서지방은 동호(東胡)의 지역이었고 요하 이동이 고조선의 중심지역이었는데, 영역국가단계가 아니었던 당시에 연의 공격을 받아 고조선은 그 중심지를 이동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번한이 고조선의 중심지였거나 중심지의 동쪽 외곽이었다고 하며 전기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녕성 해성현(海城縣)의 서남쪽과 개평현을 포괄하는 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노태돈, 1990)


북한학계에서는 해방 이래 문헌사가들이 중심이 된 요녕성 중심설과 고고학자들이 중심이 된 평양지역중심설이 논쟁을 벌여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들어와 요녕성 중심설이 정설화 되었다. 이후 평양지역 중심설에서 주장한 평양 지역의 고고 유적들은 고조선의 후국(侯國)이 남긴 것으로 보는 입장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이후 1993년 단군릉 발견을 발표한 이후 북한학계는 고조선의 중심지를 평양지역으로 확정하기에 이르렀는데 여기에는 1960년대 후반 이후 강화되어 온 주체사상의 영향도 있었다. 그 후 평양중심설이 고조선 중심지에 대한 북한학계의 정설이 되었다.(노태돈, 2000)


『삼국유사』에서 지금의 평양을 서경으로 부른 것처럼 평양의 고려시대 명칭은 서경(西京)이었는데 고려 3경(京) 중의 하나였다. 고려 성종 때 3경 제도가 이루어지면서 왕도인 개경(開京) 외에 동경(東京-경주), 서경을 두었는데 유수지사(留守知事)로 하여금 관장하게 했다. 문종 16년(1062) 경기 4도(京畿四道)를 그 관하에 속하게 하였으며, 태조 5년(922)이래 개경의 관아를 모방하여 서경에 분사제도(分司制度)를 두었다. 이러한 조치는 서경세력의 비대화를 불러와 인종 13년(1135)에 서경 천도와 관련된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났으며, 원종 10년(1269)에는 최탄(崔坦) 등이 서경 및 그 주변의 여러 성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원은 원종 12년(1270)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였다가 고려의 반환요청에 따라 충렬왕 16년(1290)에 반환되어 다시 서경을 두었다. 그 후 공민왕 11년(1362) 평양부(平壤府)로 개칭하여 서경이라는 이름은 없어졌다.『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이 도읍한 평양성을 고려시대의 서경으로 비정하였다.



참고문헌


리지린, 1963, 『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천관우, 1989,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김정학, 1990, 『韓國上古史硏究』, 범우사.

노태돈, 1990, 「古朝鮮 중심지의 변천에 대한 연구」『韓國史論』23,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서영수, 1999, 「古朝鮮의 對外關係와 疆域의 變動」『東洋學』29.

노태돈, 2000, 「북한 학계의 고조선사 연구 동향」『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 [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北帶方] 通典亦同此說[漢書則眞臨樂玄四郡 今云三郡 名又不同 何耶]


고조선 [왕검조선]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경에는 무엽산이라고 했고 또 백악이라고도 한다.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하였다.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란 자가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태백 땅을 내려다 보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그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바로 태백은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 내려와 이를 일러 신시라고 하였으니 그를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신령스러운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다. 곰은 신령스러운 쑥 한 타래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은 이것을 얻어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였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못하여 사람의 몸으로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임신하여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당나라 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그곳을 궁[방이라고도 한다]홀산 또는 금미달 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라고 하였다.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으며, 통전에도 이 설과 같다.[한서에서는 진번・임둔・낙랑・현도의 4군으로 되어 있고 지금은 3군이라 하고 이름도 같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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