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1530001


한산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백제(百濟)의 도읍지


풍납토성


몽촌토성



일반정보


백제(百濟)의 도읍지로, 『삼국유사』 왕력에 따르면 백제 온조왕(溫祚王) 14년(기원전 5)에 위례성(慰禮城)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13년(기원전 6) 온조가 도읍을 옮기기 위해 한수(漢水)의 남쪽땅을 돌아본 후 한산(漢山)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으며 온조왕 14년 춘정월에 천도했다고 하였다. 한산은 또한 『삼국사기』 근초고왕조에 근초고왕 26년(371) 도읍을 옮긴 곳으로 나오고 있기도 하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한산(漢山)에 대해 “병진년(온조왕 14, 기원전 5)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이다(丙辰 移都漢山 今廣州)”라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 권2 기이2 남부여전백제조(南扶餘前百濟)에 인용된 『고전기(古典記)』에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와서 도읍을 세우고 왕을 칭하더니,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으로 옮기고 389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 때인 함안(咸安) 원년에는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취하여 도읍을 북한성(北漢城)[지금의 양주(楊州)]으로 옮기고 105년을 지냈다(按古典記云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佳三年癸酉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今廣州]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北漢城[今楊州] 歷一百五年)”라고 전하고 있다. 두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온조왕 14년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천도한 것이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에 인용된 『고전기(古典記)』에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癸卯)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와서 도읍을 세우고 왕을 칭해 389년을 지냈다.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고 되어 있어 그 내용이 조금 다르다. 즉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전기(古典記)』에는 온조왕 14년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전기(古典記)』에는 온조가 처음부터 위례에 도읍하여 389년을 지냈다고 하여 온조왕의 천도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14년(기원전 5)조에는 이 해에 온조왕이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이때 천도한 곳이 어딘지는 명확히 전하지 않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한산(漢山) 아래로 옮겼다고만 하였는데, 이때 옮긴 곳은 대체로 “하남위례성(河男慰禮城)”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 하남위례성이 곧 『삼국유사』에 나타난 천도지인 한산과 동일한 곳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하남위례성을 한산이 아닌 “한성(漢城)”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이병도, 1976) 하남위례성과 한성은 별개의 곳이고 한성은 한산과 같은 곳이라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최몽룡․권오영, 1985) 이때 천도한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북한산성설, 춘궁리설, 몽촌토성-이성산성 중간설 등이 나온바 있지만 현재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합하여 불렀던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대세이다.(이도학, 1992,; 김기섭, 1995)


한편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한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온조의 남하세력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았다는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조의 기사로, 이후 한산은 『삼국사기』에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온조왕 27년(9)에는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이 항복하자 그 성의 백성들을 한산의 북쪽으로 옮겼고, 43년(25)에는 남옥저(南沃沮)의 백성 20여가(家)들이 투항해 오자 그들을 한산의 서쪽에 안치하였다. 또한 기루왕 27년(103)과 개루왕 4년(131), 비유왕 29년(455)에는 왕이 이곳에서 전렵(田獵)을 하였고, 침류왕 2년(385)에는 한산에 불사(佛寺)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한산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2 근초고왕 26년(371)조의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移都漢山)”라는 기사이다. 근초고왕 26년조에 따르면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精兵)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고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켰으며, 이후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고전기(古典記)』에는 근초고왕이 이도(移都)한 곳이 한산이 아니라 한성 또는 북한성이라 기록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근초고왕이 도읍을 옮긴 한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남한산성설(津田左右吉, 1964), 북한산성설(이도학, 1992), 광주설(김영수, 1957), 이성산성설(성주탁, 2002) 등이 있다. 또는 근초고왕대에 일시적으로 한산 즉 이성산성에 거주하였다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후에 춘궁리 일대로 비정되는 한성으로 내려왔다고 보기도 한다.(최몽룡․권오영, 1985)


이외 성수동, 자양동, 구의동 일대 ‘뚝섬지구’의 지리적 환경과 토성지를 한산의 위치로 주목하기도 하며(강인구, 1993) 근초고왕대의 한산과 개로왕대의 한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이를 몽촌토성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여호규, 2002) 한편 한산은 왕도 즉 지역적으로 도성이나 왕성을 포괄하는 행정구역이고, 한성은 왕도인 한산 내에 존재하는 왕성 및 도성이라고 이해하면서, 한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 한산은 이들 성을 포함한 현재의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일대로 이해하기도 한다.(전우식, 2005)



참고문헌


김영수, 1957, 「百濟國都의 變遷에 대하여」 『論文集』1, 전북대학교.

津田左右吉, 1964, 『滿鮮歷史地理硏究』1(津田左右吉全集 11), 岩波書店.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최몽룡․권오영, 1985, 「考古學的 資料를 通해 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정음문화사.

이도학, 1992, 「백제한성시기의 도성제에 관한 검토」 『韓國上古史學報』9.

강인구, 1993, 「百濟 初期 都城 問題 新考」 『韓國史硏究』81.

김기섭, 1995, 「百濟 前期의 漢城에 대한 再檢討」 『鄕土서울』55.

성주탁, 2002, 『百濟城址硏究』, 서경문화사.

여호규, 2002, 「한성시기 백제의 도성제와 방어체계」 『百濟硏究』36.

전우식, 2005, 「백제 근초고왕대 ‘移都漢山’ 기사의 해석과 그 의미」 『韓國古代史硏究』40.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一 溫祚王 [東明第三子 <一云> 第二 <癸>卯(立) 在位四十五 都(慰)禮城 一云 虵川 今<稷>山 丙辰 移都漢山 今廣州]


제1 온조왕 [동명의 셋째아들이다. 혹은 둘째 아들이라고도 한다. 계묘년에 즉위하여 45년간 재위하였다. 위례성에 도읍하였는데 또는 사천이라고 하며 지금의 직산이다. 병진년에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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