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22100001

한국사DB 자료로 보아 옥저 내용 앞에 숙신 내용을 올린 듯... 옥저와 분리했습니다.
* 옥저 내용 밑부분도 내용이 반복되는 오류가 있음.



옥저 (沃沮)


함남의 함흥부근부터 함북 해안지역 및 그 이북의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남주지역에 걸쳐서 존재한 남옥저(혹은 동옥저)‧북옥저의 총칭


현재 함경남도 함흥부근부터 함경북도의 해안지역 및 그 이북의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남주지역에 걸쳐서 존재한 남옥저(혹은 동옥저)・북옥저를 합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발해말갈조에서는 동명제 즉위 10년(기원전 28)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24)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 하고 또 혁거세 52년(기원전 6)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하니 또 동옥저도 있었다고 하여 북옥저・남옥저・동옥저가 각각 존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의 북옥저‧동옥저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유사하다. 그러나 발해말갈조의 온조왕 42년의 기록은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1 시조 온조왕 43년(25)조에 “겨울 10월에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등 20여 가가 부양(斧壤)에 귀순하니 왕이 이들을 받아들여 한산(漢山) 서쪽에 안치하였다.(冬十月 南沃沮仇頗解等二十餘家 至斧壤納款 王納之 安置漢山之西)”는 기록의 착오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온조왕 42년을 43년으로 오기했을 뿐 아니라 백제도 신라의 착오로 보이기 때문이다.(新羅史硏究會, 1997)


옥저(沃沮)는 함남의 함흥부근부터 함북 해안지역 및 그 이북의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남주지역에 걸쳐서 존재한 남옥저(혹은 동옥저)‧북옥저를 합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남옥저(혹은 동옥저)의 입지는 함경북도 남부 및 함경남도 해안지방, 특히 함흥평야 지방에 비정하고, 북옥저의 입지는 두만강 연안 및 연변지방 그리고 연해주 남부지역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박경철, 1994)


남옥저의 중심지였던 함흥지역의 정치집단은 임둔(臨屯)의 주요세력 중 하나였다. 임둔지역의 정치집단들은 기원전 2세기경 위만조선에 복속되었다가 기원전 108년 한의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이때 함흥지역에는 부조현(夫租縣)이 두어졌으며 옥저의 이름은 부조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부조현은 기원전 82년 임둔군의 폐지로 현도군에 소속되었다가 기원전 75년 현도군이 만주 흥경(興京) 노성(老城)방면으로 이동한 뒤 낙랑군 동부도위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된 이후 일시 한(漢)의 후국(侯國)으로 봉해졌으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기원후 56년 고구려 태조왕의 동해안 진출로 옥저성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이현혜, 1997)


『삼국지』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30 동옥저조를 살펴보면 토질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있어 오곡에 알맞다고 하여 당시 옥저인들이 전작 중심의 농업을 생산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옥저의 장례 풍습은 길이가 10여 장에 달하는 큰 나무곽을 만들어 한쪽에 문을 만들어 두었다가 사람이 죽으면 가매장을 하고 후에 뼈만 추려내어 장사를 지내는 것이다. 혼인 풍속은 신랑의 집에서 혼인을 약속한 여자를 데려다가 기른 후 며느리로 삼는 민며느리제(預婦制/예부제)였다.


한편 「부조예군(夫租穢君)」명문이 세겨진 인장이 발견되었는데, 부조(夫租, 즉 沃沮/옥저)가 일찍이 예인으로 불렸음을 알려주는 것이다.(岡崎敬/오카자키 케이, 1967) 따라서 옥저는 본래 예족의 한 지파였다가 춘추전국의 교체기에 비로소 예족에서 분화하여 옥저로 불린 것으로 추정한 견해도 나왔다.(孫進己/쑨진지, 1987) 그리고 중국에서는 고고학 자료를 근거로 단결문화(團結文化)가 바로 옥저문화의 기원임을 주장하기도 한다. 단결문화, 즉 크로우노프카문화(克羅烏諾夫卡文化)는 상한선이 춘추전국의 교체기에 이르고 하한선은 최소한 동한시기까지 진입되는 고고문화로, 그 분포지역은 두만강(圖門江)유역을 포함한 수분하(綏芬河)유역, 목릉하(穆稜河) 상류 및 이 일대 해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林澐/린윈, 1985)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권1 기이1 말갈발해)



靺鞨[一作勿吉]渤海


通典云 渤海本<粟><末>靺鞨 至其酋<祚>榮立國 自號震旦 先天中[玄宗<壬>子] 始去靺鞨號 專稱渤海 開元七年[己未] <祚>榮死 諡爲高王 世子襲<位> 明皇賜典冊襲王 私改年號 遂爲海東盛國 地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後唐天成初 契丹攻破之 其後爲丹所制 [三國史云 儀鳳三年 高宗戊寅 高麗殘孽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渤海 開元二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甲戌 渤海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討之 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祚>榮姓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按上諸文 渤海乃靺鞨之別種 但開合不同而已 按指掌圖 渤海在長城東北角外] 賈耽郡國志云 渤海國之鴨淥南海扶餘橻城四府 並是高麗舊地也 自新羅泉井郡[地理志 朔州領縣 有泉井郡 今湧州] 至橻城府 三十九驛 又三國史云 百濟末年 渤海靺鞨新羅分百濟地 [據此 則鞨海又分爲二國也]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又東明記云 卒本城地連靺鞨[或云 今東眞] 羅第六祗麻王十四年[乙丑] 靺鞨兵大入北境 襲大嶺柵 過泥河 後魏書 靺鞨作勿吉 指掌圖云 挹屢與勿吉 皆肅愼也 黑水沃沮 按東坡指掌圖 辰韓之北 有南北黑水 按東明帝立十年 滅北沃沮 溫<祚>王四十二年 南沃沮二十餘家 來投新羅 又赫居世五十二年 東沃沮來獻良馬 則又有東沃沮矣 指掌圖 黑水在長城北 沃沮在長城南



말갈[또는 물길], 발해


『통전』에 이르길,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추장 조영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단으로 불렀고, 선천(先天) 연간[현종 임자(壬子)]에 비로소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직 발해로만 불렀다. 개원(開元) 7년[기미(己未)]에 조영이 죽으니 시호를 고왕이라고 하였고, 세자가 왕위를 이어 받자 명황은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였는데 사사로이 연호를 고치고 마침내 해동성국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 후당의 천성(天成)초에 거란이 이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그 후에는 거란에 의해 지배되었다.[『삼국사』에 이르길, 의봉(儀鳳) 3년 고종 무인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 아래에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고, 개원 20년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甲戌)에 발해와 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략하니 현종이 이를 토벌하였다. 또 『신라고기』에 이르길, 고구려의 구장(舊將) 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남은 병사를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워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다. 위의 여러 글을 살펴보면, 발해는 말갈의 별종으로 다만 시작과 끝이 다를 뿐이다. 『지장도』를 살펴보면, 발해는 장성의 동북쪽 모서리 밖에 있다] 가탐의 『군국지』에는 발해국의 압록․남해․부여․추성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땅이며 신라의 천정군[「지리지」에는 삭주의 영현으로 천정군이 있었으니 지금의 용주다] 으로부터 추성부에 이르기까지 39개 역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에는 백제 말년에 발해․말갈․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었다고 하였다.[이에 의하면 말갈과 발해가 또 나뉘어 두 나라가 된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이르길,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의 해다. 또 말갈 땅은 아슬라주에 접해있다고 하였다. 또 「동명기」에는 졸본성의 지계가 말갈[혹은 지금의 동진이라 함]에 접하였다하고, 신라 제6대 지마왕 14년[을축]에 말갈병이 크게 북경에 들어와 대령책을 엄습하고 니하를 지나갔다고 하였다. 『후위서』에는 말갈을 물길이라 하였고, 「지장도」에는 읍루․물길은 모두 숙신이라고 하였다. 흑수․옥저는 동파의 「지장도」를 보면 진한 북쪽에 남북의 흑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에 북옥저를 멸하고, 온조왕 42년에 남옥저의 20여가가 신라로 투항하였다고 하였고 또 혁거세 52년에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니, 또한 동옥저도 있었던 것이다. 「지장도」에서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고 옥저는 장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林澐, 1985, 「論團結文化」『北方文物』1985-1.

孫進己, 1987, 『東北民族源流』, 黑龍江人民出版社.

박경철, 1994, 「부여사의 전개와 지배구조」『한국사』2-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2, 한길사.

新羅史硏究會, 1997, 「『三國遺事』譯註(四)」『朝鮮文化硏究』4.

이현혜, 1997, 「옥저의 사회와 문화」『한국사』4-초기국가 고조선․부여․삼한,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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