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 - 네이버

백제/왕 2013. 1. 24. 15:03

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4122


성왕(聖王, 재위 523~554)은 무녕왕의 아들로 태어나, 3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왕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고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 백제의 부여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일본에 불교를 전하는 등, 대일관계에서도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망한 나라에 간 사신

백제 제26대 성왕은 공산성(공주)에서 사비성(부여)으로 도읍을 옮긴 왕이다. 이 천도는 538년의 일이었다. 나라 이름도 남부여로 고쳐졌다.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떨어진 해가 660년, 그러므로 122년간 사비성 도읍의 역사를 연 이는 성왕이다. 이 122년간은 중요하다. 백제의 진정한 백제다운 문화가 이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1년 뒤였다. 549년 정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어떤 징조일지 모르지만 왕은 왠지 찜찜했다.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로 하였다. 양은 불세출의 명군이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무제(武帝)가 다스리는 나라였다. 성왕은 그로부터 책봉을 받았었다.
 
백제의 사신은 10월 양나라 수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것이 웬일인가. 수도 건강성(建康城)은 반란의 화염 속에 휩싸여 있었다. 후경(侯景, 503~552)이라는 자의 소행이었다. 후경은 본디 북위 출신이었으나 동위에 가서 벼슬을 하다 무제에게 투신했는데, 동위와 양의 관계가 좋아지자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선택은 한 가지, 양 무제를 치고 건강성을 탈취했던 것이다. 무제는 울분 속에 하릴없이 죽어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양나라에 왔던 백제의 사신으로서는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양은 백제가 가장 기대는 나라였다. 양나라로부터 받아들인 문화적 영향은 오늘날 우리가 확인하는 몇 남지 않은 백제의 유산으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사신은 낭패를 넘어 좌절감까지 맛보았던 것 같다. 성과 궁궐이 황폐하게 무너진 모습을 보고 모두들 대궐문 밖에서 소리 내 울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보고는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는데, 나라의 멸망을 새삼스레 이웃나라의 사신에게서 확인하는 기분이었겠다. 백제와 양나라의 관계를 알게 하는 일화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백제 사신의 행동을 보고받은 후경은 크게 노하였다. 당연히 그들을 모두 잡아 가두었다. 망한 남의 나라 도성에서 뿌리는 눈물,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해프닝이 아닐 수 없지만, 백제의 사신으로서는 그만큼 절박하기도 했다. 후경의 반란은 3년 뒤 평정되었다. 그제야 백제의 사신은 귀국할 수 있었다.
 
 
성왕의 빛과 그림자

망한 나라에 간 사신―. 이 사행(使行)은 묘하게도 머잖아 닥칠 백제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찬란한 문화의 꽃을 마지막으로 불태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백제의 미래를 보여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양나라의 멸망은 한반도 내에서 백제의 역학구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만약 양나라가 좀 더 지속되고 힘을 잃지 않았다면 한반도 내 통일 왕조의 주인공은 달라졌을 수 있다.
 
운명의 첫 발을 내디딘 왕이 성왕이다. 그는 무녕왕(武寧王)의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명농(明穠)이었다. 무녕왕이 523년 5월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기]는 그를 평하여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하였다”고 적었다. 
 
즉위한 다음 해, 양나라로부터 ‘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수동장군 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으로 책봉 받았다. 양나라와의 관계는 양이 멸망하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같은 해, 신라와도 수교하였다. 신라・일본과 연대를 꾀해 고구려에 대항하려 하는 백제의 전통적인 외교태세를 다시 굳게 했다. 그러나 뜻한 대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529년, 고구려의 안장왕이 군사를 이끌고 직접 쳐들어 왔을 때는 2,000명의 군사를 잃었다. 
 
성왕은 538년에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도읍을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고친 것이다. 사실 백제만큼 도읍을 자주 옮긴 나라도 없다. 처음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한 이래, B.C. 5년 한산(경기도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고, 제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371년에 북한성(경기도 양주)으로 도읍을 옮겨 105년을 지냈다.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한 475년에 공주로 옮겨 63년을 지냈었다. 
 
처음의 위례성에서 마지막의 부여까지 모두 다섯 군데이다. 물론 이들은 한강 주변의 도읍과 백마강 주변의 도읍으로 크게 나눠진다. 한강 시대에서 백마강 시대로의 전환이라는, 백제 역사의 큰 틀이 여기서 드러난다. 백제는 왜 한강을 버리고 백마강을 택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의 남진정책과 맞물리는 듯싶다. 한강 유역을 포함해 한반도의 남쪽에 눈 돌린 고구려의 예봉을 꺾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 패퇴(敗退)하는 의미의 천도였다고만 말할 수 없다. 백제 나름 새로운 분위기와 문화의 창조를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였다.
 
기실 백제의 백제다움은 공주로 옮긴 다음인 475년부터 만들어진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백제는 중국 남부 지역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다. 고구려의 큰 그림자 아래 놓였던 한강 시대의 백제는,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고구려의 짝퉁이었다. 왕조의 출신 자체가 그렇고, 고구려를 통한 북방 문화가 거의 직수입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백마강 시대의 백제는 달랐다. 이런 변화의 핵심에 성왕이 있다.  
 
성왕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554년, 신라와 관산성(충북 옥천군)에서 벌어진 싸움 도중 왕자 창(昌)이 고립되었다. 창은 성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위덕왕이다. 성왕은 직접 왕자를 구하러 달려갔다. 그러나 도중의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기습을 당했다. 왕은 현장에서 전사했다. 재위 32년째 되는 해였다.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일본의 고대 왕실이 백제계라는 말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나왔다. 심지어 흠명왕(欽明王)이 성왕이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이다. 지나친 추정을 접어두고라도 815년 일본 왕실에서 만들어진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백제의 동성왕 이후 백제와 일본의 가까운 관계를 짐작할만한 자료가 들어있다. 동성왕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아버지를 이어 왕에 올라 무녕왕이 되고, 작은 아들은 일본의 계체왕(繼體王)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1914년 와카야마 현의 한 신사에서 발견되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인물화상경에 새겨진 글자, ‘사마(斯麻)가 남동생인 왕을 위해 보낸다’는 문장이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사마는 다름 아닌 무녕왕의 이름이다. 
 
동성왕은 아버지 곤지왕자를 따라 일본에서 성장하였고, 큰아버지인 문주왕과 사촌형인 조카 삼근왕이 각각 자리를 1~2년도 못 채우고 일찍 죽자, 급거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의 두 아들이 백제와 일본에서 각각 왕이 된 상황은 앞서 말했다. 이토록 양국의 왕실은 백제 왕실의 주도 아래 이어져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성왕 때는 백제가 다시 신라와 연합하여(나제동맹) 고구려에 맞서려 하였고, 551년에 한산성(漢山城) 부근을 탈환하였지만, 553년에 같은 지역은 신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성왕이 죽기 1년 전, 이런 일로 신라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나아가 관산성 싸움에서 왕은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왕이 흠명왕이라는 말은 어떻게 된 것인가. 정설로 받아들일 수 없으나, 관산성 싸움에서 패한 성왕이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일본으로 가서 왕위에 올랐다는 주장이다. 그러니까 성왕은 관산성에서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좀 더 두고 연구해 보아야 한다.

동성왕 이후 백제와 일본 왕실의 왕위 계승도(홍윤기 교수 주장).
 
 
일본 쪽에서 전해지는 기록

성왕이 일본 왕실과 가깝다 보니 일본 쪽에서도 그에 관한 기록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신라와의 연유에 대해서도 그들 나름의 해석이 있다. 백제가 가야 여러 나라의 점령을 신라와 다투어 불안정하게 되자, 성왕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연합을 도모했다.
 
게다가 541년에는 임나부흥(任那復興)을 명목으로 하는 신라 정벌을 기도하고, 일본 정부의 개입을 요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른 바 임나부흥회의. 임나는 일본이 가야를 다스리기 위해 설치한 식민정부였다는 것이 일본 보수우파 학계의 일관된 주장이다. 백제의 일본 정부에 대한 요청은, 백제 주도의 가야 여러 나라의 연합 정권을 승인하는 것과, 신라에 대항하기 위한 원군(援軍)의 파견이었지만, 흠명왕에게서 무기나 원군이 왔던 것은 547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 또한 일본 쪽의 기록이지 사실 여부와는 별개이다.  
 
양나라에 조공하여 모시박사(毛詩博士), 열반경(涅槃經) 같은 경전, 공장(工匠), 화가 등을 하사 받는 등, 중국 문물의 수용에 부지런하고, 국내에서는 불교를 보호하여 대통사(大通寺)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양나라와 교역으로 손에 넣은 부남국(扶南國 : 캄보디아)의 문물을 일본에 보냈다. 이 또한 일본 쪽의 기록이다. 
 
일본에 불교를 전한 일은 성왕 때의 일로 여러 기록에 보인다. 사신을 보내 금동 불상과 경전 등을 보낸 것이 538년이다. 그런데 552년에는 석가불 금동상 등을 보내며 상표문(上表文)을 보냈다는 기록은 일본에서만 전해진다. 글의 내용을 간추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불교는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것입니다. 그 가르침은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진정한 깨달음을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이제 불교는 멀리 인도로부터 중국, 삼한까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 훌륭한 부처의 가르침을 꼭 일본에도 널리 퍼지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후세에 지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703년 당나라 의정(義淨)에 의해 번역된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이 있는데, 718년 일본이 당나라에 보낸 사신 곧 견당사(遣唐使) 가운데 승려인 도자(道慈)가 이 경전을 가져오면서 쓴 글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여러모로 성왕은 삼국시대 후반기, 특히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낸 데 이어 최근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을 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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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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