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goodfriends.or.kr/history/history2.html?sm=v&p_no=14&b_no=3169&page=1


고구려 연구사

고구려사에 대한 사서(史書)로는 고구려 당시에는 《유기》 《신집》 5권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구삼국사 舊三國史》가 편찬되었으나 이것 역시 망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역사에 대한 사서로 가장 오래된 것은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인 도덕사관과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편찬되었다. 한편, 고려 무신집권기에 활약하였던 이규보(李奎報)는 《동명왕편》에 《구삼국사》의 기사를 바탕으로 하여, 동명의 건국 과정을 노래하면서, 당시까지 기층 사회에 침전되어 이어져오던 고구려적 전통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고려 충렬왕 때 인물인 일연(一然)은 《삼국유사》를 저술하여, 《삼국사기》가 간과해 버린 고구려의 일부 불교관련자료를 수집·정리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조선 전기에는 권근(權近)의 《삼국사절요 三國史節要》와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국통감》 등이 고구려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서는 새로운 자료의 첨가 없이 편년체 사서로 편찬되었고, 《삼국사기》의 역사인식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으며, 주자학적인 가치기준에 의한 표현이 보다 강조되었다.

조선 후기에 와서 실학의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면서,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에도 새로운 면을 나타내게 되었다. 실학자들에 의한 고구려사 연구의 성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문헌고증학적인 검토에 의해 역사지리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나아가 고구려사에 관한 문헌자료의 수집과 정리를 시도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한치윤의 《해동역사 海東繹史》·정약용의 《강역고 疆域考》 등이 그 대표적 성과이다. 다른 일면은 종래의 일방적인 중국 중심의 천하관(天下觀)과 화이관(華夷觀)에서 벗어나, 당시의 확충된 역사지리에 대한 지식과 결부하여, 우리민족의 역사적인 생활권에 대한 관심을 깊이 하였다. 이는 자연 고구려사와 발해사에 관한 이해를 촉진시켰는데 이종휘의 《동사 東史》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합리적인 실증적 연구방법과 자기 민족 중심의 역사 인식이라는 두 가지 조류가 한데 어우러지는 데서 한국근대사학의 방향성이 주어졌지만 이러한 면이 충분히 성숙되기도 전에 개항과 함께 밀려드는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국권의 상실을 당하였다. 그에 따라 민족독립의 쟁취가 시대적 과제가 됨에 따라, 역사연구 또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 이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특히 고구려사의 영광과 그 애국명장들이 강조되었다. 순환론적인 정신사관에 입각한 이들의 논리에선 영광된 과거의 민족사는 곧 내일의 독립과 번영에 대한 정신적 담보이었다. 신채호·정인보·문일평 등이 고구려사에 관한 서술 역시 교설적으로 기록하였던 대표적인 학자였다. 

한편, 일제강점하에서의 고구려사 연구에 주도권을 쥔 것은 일본인 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연구는 초기는 역사지리와 그에 결부된 고구려의 피침략사에 치중되었다가, 점차 정치제도사 분야로 확대되었다. 1930년대 이후 백남운·김광진 등에 의해 사회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고구려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논고들이 나왔고, 광복 후 우리 학자들에 의하여 새로운 민족사의 모습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이 열정적으로 제기되었지만, 사상적 대립과 분단·내전으로 이어지는 혼란과 갈등의 와중에서 충실한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소수학자들의 몇몇 연구논문들은 이 시기 고구려사 연구의 학문적 공백을 메워주는 귀중한 성과였다. 

1960년 이후 재차 식민지사학의 잔재에 대한 비판이 가해지고, 한국사에 관한 연구가 질적·양적으로 크게 활발해졌다. 그러나 고구려사의 경우, 전공학자의 절대적 부족과 현지 방문의 불가능, 고고학적 자료 입수의 어려움 등에 의해 일정한 제약성을 나타내었다. 1970년대 들어오게 되면서 고고학·인류학·민속학 등 인접학문분야의 연구성과와 방법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연구자의 관심분야도 정치사 중심에서 사회사·사상사에로 확대되고, 또 인식의 폭도 넓어지게 되고 연구 인원의 증가로 보다 많은 연구 성과들이 나오게 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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