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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산성
 
 
1)학술조사

1980~1982년 무순지역 문물조사대(撫順地域 文物調査隊)가 신빈현(新賓縣) 관내의 소자하(蘇子河)와 부이강(富爾江) 유역의 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였으며, 1988년과 1993년에 조사하였다.


新賓 五龍山城 위치도
 
 
2)위치와 환경
 
오룡산성(五龍山城)은 신빈현(新賓縣) 서북쪽 상협하진(上夾河鎭) 득승보(得勝堡)댐의 동쪽 산간지대에 위치하였다. 서쪽 1.3km 거리에 남잡목~신빈현성(南雜木~新賓縣城) 도로가 서북~동남 방향으로 지나가고 있으며, 이 도로를 따라 서북으로 가면 2.5km 거리에 득승보촌(得勝堡村), 3.3km에 상협하진(上夾河鎭), 15km에 남잡목(南雜木)이 각각 나온다. 동남쪽으로 12km 정도 가면 목기진(木奇鎭)이 있다. 산성의 남쪽 5km 거리에는 소자하(蘇子河)가 동남~서북(東南~西北)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소자하(蘇子河)는 본래 영반(營盤)에서 혼하(渾河)에 유입되어 서남쪽으로 류향(流向)을 바꾸었는데, 1950년대 대화방(大伙房)댐의 건설로 소자하․혼하(蘇子河․渾河) 합류처는 수몰되었다. 하류 쪽인 영반~하협하진(營盤~河夾河鎭) 구간은 하천연안을 따라 도로를 개설할 수 있지만, 하협하진~목기진(河夾河鎭~木奇鎭) 구간은 만곡이 심하고 험준한 협곡으로서 더 이상 진입하기가 곤란하다. 그리하여 하협하진(河夾河鎭)에서 오룡하(五龍河) 연안과 구릉성 산지를 따라 목기진(木奇鎭)으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자하(蘇子河) 하류방면의 지형조건으로 인해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 연안의 신빈지역(新賓地域)으로 진입할 때 상협하진(上夾河鎭) 일대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상협하진(上夾河鎭) 일대는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 연안으로 진입하는 두 각래 도로가 만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인 것이다. 
 
산성은 남잡목~신빈현성(南雜木~新賓縣城) 도로 동쪽의 험준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남잡목~신빈현성(南雜木~新賓縣城) 도로는 득승보촌(得勝堡村)을 지난 다음 변장산(邊墻山)의 산등선을 따라 동남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산능선으로 오르기 직전 지점에서 동북쪽으로 작은 산간도로가 갈라진다. 산간도로를 따라 0.45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북쪽의 오룡하(五龍河) 연안 관문립자(關門砬子) 골짜기를 따라가면 산성(山城)과 오룡촌(五龍村)이 나오며, 남쪽으로 0.8km 정도 나아가면 하강자촌(下崗子村)에서 남잡목~신빈현성(南雜木~新賓縣城) 도로와 합류하게 된다. 
 
갈림길 남쪽의 산간로 좌우에는 대서산(大西山)과 관문립자산(關門砬子山)이 우뚝 솟아 있으며, 북쪽의 관문립자(關門砬子) 골짜기도 양안이 수직 절벽이면서 심하게 굴곡되어 있어 험준하다. 산간도로의 갈림길 곧 관문립자(關門砬子) 입구는 서쪽으로 득승보촌(得勝堡村), 동쪽으로 오룡산성(五龍山城)과 오룡촌(五龍村), 남쪽으로 하강자촌(下崗子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인 것이다. 관문립자(關門砬子) 입구에서 동쪽으로 골짜기를 따라 나아가면 오룡산성(五龍山城)이 나온다. 산성의 북쪽에는 오룡하(五龍河) 연안의 경작지가 펼쳐져 있으며 오룡촌으로 향하는 지방도로도 있다. 동쪽은 수직절벽이고, 남쪽으로는 넓게 트인 황수배자(荒樹排子) 골짜기가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황수배자(荒樹排子) 골짜기 입구를 사이에 놓고 관문립자산(關門砬子山)과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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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賓 五龍山城 주변 지형도  新賓 五龍山城 방어계통과 평면도 新賓 五龍山城 출토유물


3)유적의 현황과 성곽의 구조
 
산성은 해발 438.3m인 동남쪽 산봉우리에서 동북과 서북쪽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 안쪽 골짜기를 감싸안는 형태로 축조되었다. 산성의 북쪽과 동쪽은 수십 미터 높이의 수직 절벽이며, 서쪽의 산등성이도 가파르고 험준하며, 남쪽 산비탈도 높고 험준하며 오르기 힘들다. 대체로 성벽 바깥쪽 경사면은 험준한 반면, 안쪽으로는 산등성이에서부터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과 대지가 펼쳐지고 있으며 경작지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동서 길이 1km, 남북 너비 0.5km로서 평면이 삼각형에 가까운 키모양을 이루고 있다. 각 방면의 산봉우리를 기준으로 동․남․서․북벽으로 나뉘는데, 동벽 292m, 남벽 854m, 서벽 354m, 북벽 607m 등으로서 전체 둘레는 2,107m에 이른다. 
 
(1)동벽 
 
길이 292m로서 동쪽 망대(望臺, 해발 387.3m)와 동남쪽 망대(望臺, 해발 438.3m)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성벽은 험준한 수직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은 부분과 인공성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공성벽은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1m이며 윗면 너비는 1m이다. 
 
(2)남벽 
 
길이 854m로서 네 성벽 가운데 가장 길다. 동남 각대(角臺)와 서쪽(角臺, 해발 353m)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데, 모두 인공성벽이다. 동남 각대(角臺)에서 시작된 성벽은 경사가 완만한 산비탈을 따라 축조되었고, 성벽 아래에는 길이 262m, 너비 3~5m인 평탄한 내리막길이 있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트인 곳(割口)이 있는데, 후대에 산에 오르기 위해 개설한 통로로 파악된다. 이 부분의 성벽은 외벽 높이 3~4m, 내벽 높이 1~3m이다. 트인 곳에서 서쪽 각대(角臺)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이 축조되어 있는데, 외벽 높이 2~3m, 내벽 높이 1~1.5m, 윗면 너비 1m이다. 
 
(3)서벽 
 
길이 354m로서 서쪽 각대(角臺)와 북쪽 각대(角臺, 381.1m)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두 각대(角臺) 사이에는 서문(西門)이 위치한 골짜기 입구가 있다. 골짜기 입구 바닥은 너비 5m로서 북문의 문길에 해당한다. 서벽은 이 문길을 중심으로 동서 양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서쪽 부분은 문길에서 서쪽 각대, 동쪽 부분은 문길에서 북쪽 각대에 각각 이르는 구간이다. 서쪽 각대(角臺)는 둥근 형태의 감제고지로서 성벽의 유실을 방지하고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보호벽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성벽은 정상부에만 축조되어 있는데, 직경 5m인 반원형으로 앞으로 약간 돌출하였다. 서벽의 동서 양쪽 부분은 모두 험준하고 구불구불한 암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으며, 인공성벽은 없다. 각대(角臺)가 위치한 감제고지를 이용하여 서문 입구를 공제(控制)하고 있다. 
 
(4)북벽 
 
길이 607m로서 북쪽 각대(角臺)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성벽은 북쪽 각대에서 동쪽으로 연이어지다가 465m 지점에서 남쪽으로 직각으로 꺾여 동쪽 망대에 이른다. 성벽은 외벽 높이 2~3m, 내벽 높이 1~1.5m, 위쪽 너비 1m이다. 
 
(5)성벽과 축성방식 
 
성벽은 대부분 잡석을 이용하였다. 그 가운데 납작한 방추형인 쐐기형돌(楔形石)도 조금 섞여 있지만, 대부분 제대로 다듬지 않았다. 쐐기형돌도 치밀하게 가공된 편은 아니다. 이처럼 오룡산성(五龍山城)의 축성방식은 잡석(雜石)과 설형석(楔形石)을 섞어서 축조하였을 뿐 아니라 성벽 외면도 그렇게 정치하지 않다는 점에서 집안 산성자산성(集安 山城子山城), 환인 오녀산성(桓仁 五女山城), 신빈 흑구산성(新賓 黑溝山城) 등의 고구려 초기 산성과 뚜렷이 구별된다고 이해되고 있다. 
 
먼저 성돌은 대부분 잡석으로 조잡하다. 다듬은 쐐기형 성돌도 조금 있지만, 크기가 다양하고 모서리가 분명치 않는 등 가공상태가 조잡한 편이다. 이는 초기 산성의 성들이 치밀하게 다듬어진 것이라는 사실과 뚜렷이 구별된다. 신빈 태자성(新賓 太子城)에도 정교하게 다듬은 성돌이 거의 없다고 하는데, 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축조되었거나 아니면 초기보다 뒤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을 반영한다고 이해된다. 
 
축조방식을 보면, 바깥쪽은 경사가 가파르고 안쪽은 완만한 산등성이에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산등성이에는 천연성벽으로 이용한 만큼 우뚝 솟은 절벽이 거의 없다. 이는 산등성이에 우뚝 솟은 좁고 기다란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고 그 사이의 트인 곳에 인공성벽을 축조하던 초기 축성법과 뚜렷이 구별된다. 즉 오룡산성의 경우 바깥쪽은 오르기 힘들 정도로 수십 미터 높이의 낭떠러지이지만, 산등성이에는 천연성벽으로 삼을 만큼 절벽이 거의 없고 평탄하기 때문에 산등성이 거의 전체에 인공성벽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신빈 태자성(新賓 太子城)이나 유하 나통산성(柳河 羅通山城)에서도 이러한 축성법이 확인되는데, 이것 역시 초기 산성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축성법으로 이해된다.
 
 
4)역사적 성격
 
오룡산성(五龍山城)이 위치한 상협하진(上夾河鎭) 일대는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 연안으로 진입하는 두 갈래의 도로가 만나는 교통로상의 요충지이다. 특히 청대 구가도(淸代 舊街道)로서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영반(營盤) → 하협하진(河夾河鎭) → 오룡하(五龍河) → 상협하진(上夾河鎭) 루트는 오룡하(五龍河) 연안을 따라오다가 상협하진(上夾河鎭) 일대에서 방향을 바꾸어 구릉성 산지로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지형조건으로 보아 오룡산성(五龍山城)은 혼하(渾河)에서 소자하(蘇子河) 연안으로 진입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되었다고 파악된다. 
 
오룡산성(五龍山城)의 지형이나 성곽시설도 이를 반영하는데, 북쪽에 오룡구(五龍溝), 동쪽에 소산구(小山溝), 서남쪽에 황수배자구(荒樹排子溝) 등의 골짜기가 자리잡고 있어 주위 산맥과 완전히 끊여 있는 등 전체적으로 오룡산성은 주변의 산줄기와 차단되어 있다. 이는 산성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고구려 산성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의 하나이다. 오룡산성(五龍山城)은 지형조건상 산성 자체만으로는 방어체계에 결함이 있으므로 변장산(邊墻山)의 성벽을 비롯하여 득승보협곡 입구, 관문립자 골짜기 입구, 대서산~관문립자산(大西山~關門砬子山) 협곡로 등에 차단벽을 축조하여 총체적인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다. 이처럼 오룡산성(五龍山城)은 혼하(渾河)방면에서 소자하(蘇子河) 연안으로 진격하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오룡산성의 출토 유물 가운데 토기는 4세기 초~5세기 말, 와당은 4세기 말~5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또한 성벽축조방식에서 고구려 초기 산성과 달리 쐐기형 성돌보다 잡석의 비중이 높고 축조상태도 정치하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3~4세기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성이 위치한 지역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3세기 후반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문헌기록상 4세기 전반부터 혼하(渾河) 연안의 신성(新城)을 비롯하여 소자하 연안에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 등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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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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