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afe.daum.net/yeohwicenter/4ulL/174

Ⅱ.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

        - 압록강 ·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중심으로 -  신 광 철
       Ⅰ. 서론                                http://tadream.tistory.com/5520
        Ⅱ.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 http://tadream.tistory.com/5519
        Ⅲ. 압록강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2
        Ⅳ. 요하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3
        Ⅴ. 결론                               http://tadream.tistory.com/5521      
        참고문헌
 
1. 5나부 통합시기
 
나부 연맹체의 초기 맹주국인 환인 지역 비류수 유역에 있던 沸流國(불류국)이었다. 당시 연맹체 내부에 대한 비류국의 통제력은 비교적 약했는데(盧泰敦 1975: 12-14), 추모 집단은 이 시기 연맹체를 구성하고 있던 소국 중 하나인 졸본부여에 터를 내렸던 것이다. 이후 유리왕대가 되면 고구려는 명실공히 압록강 중류역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유리왕대 등장하는 수많은 田獵(전렵)과 作宮(작궁) 기사는 유리왕의 적극적인 세력권 확대 노력으로 볼 수 있다(金龍善 1980: 57-59; 金瑛河 1988: 9-34).
 
고구려의 중심 세력인 5나부의 지역 범위는 초기 적석총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환인과 집안, 통화, 봉성, 관전 등과 현재 집안의 압록강 반대편 지역인 만포시, 중강군, 자성군, 시중군, 위원군, 초산군, 송원군, 희천 등을 포함한 주변 일대인 것으로 보인다(池炳穆 1987). 이 5나부 지역을 벗어난 외곽 지역으로의 본격적이고 대규모적인 진출은 나부체제가 완성된 태조대왕대부터 이루어졌으며(李殿福 1986: 60), 5나부 이외 지역민에 대한 정복은 고구려에 부족한 물산을 획득하기 위해 행해졌다.
 
그 정복대상으로는 백두산 동남쪽의 행인국, 훈춘 일대의 북옥저, 개마고원 근처의 개마국과 구다국, 동옥저를 꼽을 수 있겠다. 이들 지역은 모두 양질의 철제(황기덕 1963)와 목재, 해산물과 농업생산물을 얻을 수 있는 지역인데다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사 요충지들이었다. 고구려는 이들 지역을 통합함으로써 대외팽창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다.
 
2. 후한 왕조와의 대립시기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요동진출은 4세기 모용선비와의 대립에서 그 기원을 찾곤 한다(孔錫龜 1998: 23; 李基東 2005: 292). 하지만 고구려는 유리왕 11년(B.세기 9)에 이미 선비 滿離集團(만리집단)을 예하집단으로 거느렸고(노태돈 1999: 60-61), 33년(14)에는 현도군의 고구려현을 습격하여 탈취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진출 의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에 설치되었다가 고조선의 유민에 의해 기원전 75년 서쪽으로 쫓겨 가게 된다. 이후 혼하 상류에 제2현도군이 설치되는데 중심지역에 설치된 고구려현, 상은대, 서개마 3개 현 중 고구려현을 고구려가 탈취함으로써 고구려의 서북 변경은 1세기 초에 혼하 상류까지 이르게 된다(서병국 1997: 83).
 
뒤이어 모본왕 2년(49)에는 한나라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하였으며 태조대왕 3년(55)에는 요수 서쪽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의 침략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또한 2세기 전반에는 선비족과 연합하여 한군현을 여러 차례 공격하였는데 이를 통해 봤을 때 고구려는 요하 하류의 요동 평원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이미 요하 중류를 통해 요하 상류 나아가 서요하 일대의 유목민족과 통교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 확보를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余昊奎 1999a: 16).
 
이 시기 고구려는 새롭게 차지한 동옥저 지역 등을 개발하면서 농업, 철생산 등 경제의 안정적 기반을 구축한 이후에 요동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하였기 때문에(朴性鳳 1995: 15-17) 상대적으로 요하유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고로 모본왕의 후한 동북군현 습격도 기습에 의존한 약탈전 성격이 강했으며, 태조대왕대 쌓은 요서 10성 또한 장기간 주변 지역을 장악하기보다는 적을 공격하는데 있어 전초기지적인 성격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3. 공손정권 · 위 왕조와의 대립시기
 
190년,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웅들이 군사를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워지자 요동에서는 公孫度이라는 인물이 자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요동군을 셋으로 나눠 요동, 중요, 요서 3군으로 만들고 남쪽으로 바다 건너 동래의 여러 현을 점령하여 영주를 설치하는 등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 외에 현도군과 낙랑군까지 휘하에 두고 육지와 바다를 통해 중국 내지에서 피난민을 받아들이니 13만의 인구는 단기간에 40만까지 증가하였다.
 
197년 고국천왕이 죽고 둘째 동생 연우가 산상왕으로 즉위하자 첫째 동생 발기는 이것에 반발하여 소노가와 3만여 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공손도에게 군대를 빌려 고구려를 침공한다. 비록 발기의 군대가 고구려군에게 패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측에서 봤을 때 공손정권은 상당히 위험한 적국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요동에서 공손정권이 세를 확장하자 고구려는 요동진출의 장애가 되는 공손정권을 제거하기 위해서 오와의 관계를 끊고 위와의 국교관계를 강화한다(徐榮洙 1987).
 
이후 고구려는 238년 위가 공손정권을 공격하자 양평성 전투시 천여 명의 군사를 파견해 위를 도와준다. 이는 요동에서의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함이었지만 공손정권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와 인구를 위가 전부 차지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불편하게 된다. 이듬해부터 위는 요동군의 관리와 백성들을 산동반도로 이주시키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마도 고구려의 압력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 242년 서안평을 공격한 고구려는 위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吳舜濟 1998). 245년 위는 유주자사 관구검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는데 2차례의 승리에 도취된 동천왕의 착오로 인해 고구려는 결국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도성은 파괴된다. 이후 중천왕대에 왕의 아우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가 처형당하고 관나부인이 왕후를 참소하며 왕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역시 목숨을 잃은 점 등을 보면 관구검에게 도성이 파괴된 이후,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 대한 끊임없는 진출을 모색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는데 결정적인 원인으로는 동천왕과 고구려 군사정책 입안자들의 판단착오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로서는 주적이자 시급한 격퇴 대상인 공손정권을 공격하는 것이 당시 적절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공손정권은 전력적으로 고구려가 맞대응할 수 있는 상태였고 지정학적으로 화북의 통일정권인 위 왕조와의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반면 위 왕조의 입장에서는 공손정권을 멸망시킬 경우, 2차적 과제는 당연히 고구려 제압이었다(윤명철 2003: 96). 그런 상황에서 장차 국경을 마주하게 될 위 왕조에 대해 충분한 대안책을 고려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으며 관구검 침입시, 2차례의 승리에 고무되어 경솔하게 소규모 부대만 이끌고 관구검과 정면대결을 펼쳐 격파당한 것 역시 큰 실책이었다.
 
그 결과, 고구려는 이전에 진출했던 혼하 상류유역에서 더 진출하지 못 한 채 다시금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4. 모용선비 및 북위 왕조와의 대립시기
 
3세기 말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서북 변경은 위 왕조와 모용선비의 침입으로 불안했으나 4세기로 접어들면서 서북 변경의 정세는 고구려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4세기 초 중국에서는 ‘8왕의 난’이 일어나 서진이 망하고 이후 남북조시대라고 불리게 될 300년간의 혼란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 사이 고구려는 311년 요동군 서안평을 점령하고 313~314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까지 차지하였다. 또한 315년에는 요하와 혼하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3현도군까지 차지함으로써 고구려의 서변은 요하 유역까지 이르렀다(서병국 1997: 87-88).
 
이 무렵, 모용선비의 수장 모용외는 서진이 멸망하는 316년을 전후하여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여 대릉하 상류지역과 산해관 지역 일대에 4개 군을 신설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池培善 1986: 44; 千寬宇 1989: 105). 당시 중국 대륙에는 330년 수립된 후조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그 북쪽에 위치한 모용선비의 전연과 유구 북방에서 대치하는 형세였다. 미천왕은 이 같은 양대 세력의 대립 상황을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후조가 전연을 견제하는 동안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확산시키려 하였다.
 
그에 따라 신성을 새로운 군사거점으로 삼아 군사력 확충에 박차를 가했으며 고국원왕 역시 신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338년 후조를 제압한 전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고 341년에는 요동반도 서쪽 해안지역의 평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천산산맥 이서의 평곽을 전연이 장악함으로써 고구려의 요동 진출은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모용황은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다.
 
고국원왕 12년(342) 모용황이 정병 4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들어 왔을 때, 고구려는 적군의 예상 침입로를 잘못 판단하여 참패를 당한 끝에 왕은 단기로 피신해야 했고 환도성은 함락되기까지 했다. 이때 왕모와 왕비를 비롯하여 5만여 명의 백성이 전연으로 끌려가고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까지 파헤쳐졌다. 고구려는 작전의 융통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연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병력이 시간만 허비하는 遊兵化(유병화) 현상을 초래했던 것이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100).

이후 370년 전연은 새로 등장한 전진에게 멸망당하고 2년 뒤 전진과 고구려는 사절과 승려를 교환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384년 전진이 무너진 뒤 모용선비 정권인 후연이 등장하고 화북의 혼란을 피해 유주 · 기주 지방의 유민이 다수 고구려로 유입되기 시작한다. 고국양왕은 일단 385년 6월 4만군을 파견해 요동군과 현도군을 함락하지만 11월 모용농이 이끄는 대군에게 다시 요동군과 현도군을 빼앗긴다. 당시 백제를 상대로 예성강 일대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던 고구려였기에 2개의 전선을 유지하기는 무리였을 것이다(李基東 2005: 293).
 
하지만 광개토태왕릉비를 보면 광개토태왕이 395년 비려를 정벌하고 말머리를 돌려 양평도를 지나 북풍 등지를 시찰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북풍은 요동군 8개 현 중 하나로 이는 395년 이전에 고구려가 요동군을 차지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실제 405년 후연왕 모용희가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다가 패퇴하는데 이를 통해 봤을 때 고구려가 요동군을 차지한 시기는 385~395년 사이로 보인다. 이처럼 405년 모용희의 요동성 공격을 격퇴하고, 406년에는 목저성 공격마저 격퇴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완전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후연의 모용희가 풍발 등에 의해 살해되고 모용운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북연과 우호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북연은 북위의 압박에 위축되어 있었고 북연왕 풍홍은 비밀리에 고구려에 망명의사를 타진하게 된다. 이에 북위로부터 북연과의 교섭 만류를 받았지만 고구려는 요서 깊숙이 군대를 보내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에 입성했다. 이때 수만의 백성과 각종 물자를 호위하는 고구려군의 행렬이 80여리에 달했는데 북위군은 그 위세에 눌려 정면대결을 하지 못 했다. 이런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북위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했으며, 몽골고원의 패권을 장악한 유연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더 나아가 장수왕 67년(479)에는 유연과 지두우족을 분할 점령한 후 거란족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기도 했다(서영대 2007: 191).
 
이후 고구려는 요하 이서 지역까지 군사작전범위를 넓혀(김용만 2003: 350~354), 훗날 수 · 당이라고 하는 강력한 적의 침입에 맞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5. 수 · 당 왕조와의 대립시기
 
5세기 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국의 북위와 남조,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유연 및 서역의 토욕혼, 동방의 고구려를 중심축으로 이들 국가 사이의 역관계에 의해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 질서를 배경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및 말갈, 거란 등 여러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던 동북아시아에는 북방과 중원 세력의 영향과 침투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고구려 중심의 세력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6세기 말, 북주 정권을 탈취한 양견이 국호를 隋로 고치고 장안에 도읍하니 그가 바로 수 문제다. 그는 590년 노골적인 경고성 국서를 보내고 영양왕은 598년 1만의 말갈병을 이끌고 요서를 선제공격했다. 직후 수 문제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제대로 전투 한번 못 치르고 패퇴하고 말았다. 수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는 612~614년에 걸쳐 3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고구려 요동 방어망의 중심지인 요동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채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4차례에 걸친 고-수 전쟁으로 인해 수 왕조는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임기환 2007: 288-298).
 
이후 등장한 당 왕조 역시 고구려와 국운을 걸고 대립했다. 644년 당 태종은 고구려 정벌 준비를 서두르고 645년 요하를 도하한다. 고구려는 현도성과 신성, 건안성을 지켜냈지만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며 전황을 타개한다. 하지만 안시성과 주필산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당군은 퇴각을 결심한다(김용만 2003: 148-158). 이후 647년 국경지대에서 소규모 전투가 산발적으로 벌어지지만 이 역시 큰 효과를 얻을 수 없었고, 당 태종은 649년 숨을 거두고 만다.
 
660년 당 고종은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6명의 사령관 중 3명이 죽고 3개 행군이 전멸되거나 와해되는 참패를 당한다(김용만 2003: 265). 하지만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나고 연개소문의 장자 연남생이 당으로 투항하자 당 왕조는 667년 3차 침공을 감행한다. 그 결과, 신성 주변 16개성이 함락됨과 동시에 부여성 주변 40성이 항복하면서 요동과 서북의 요충지들을 차례로 잃어버린 고구려는 668년 9월 멸망하게 된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인해 5세기 이래 유지되던 다원적 국제질서가 붕괴되고(노태돈 1988),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 국제 질서로 개편되기에 이르렀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