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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 압록강 ·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중심으로 -  신 광 철 
       Ⅰ. 서론                               http://tadream.tistory.com/5520
        Ⅱ.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     http://tadream.tistory.com/5519
        Ⅲ. 압록강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2
        Ⅳ. 요하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3
        Ⅴ. 결론                               http://tadream.tistory.com/5521       
        참고문헌

‘高句麗’라는 국호는 본래 ‘句麗’(句驪, 駒驪)(구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구려'는 고구려어에서 성이나 고을을 뜻하는 ‘溝漊’(구루), 성을 의미하는 ‘忽’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이인영 2006: 171-173). 이후 여기에 ‘高’字를 붙여 생겨난 것이 고구려라는 국호인데 아마 ‘높은 나라’, ‘큰 나라’, ‘高大한 나라’, ‘高貴’한 나라‘ 정도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박용운 2004: 46). 이를 통해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민집단은 일찍부터 ‘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문헌에서 ‘구려’라는 명칭은 기원전 107년 전한이 현도군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로 보아 고구려를 건국한 압록강 중류 일대의 주민집단은 늦어도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각지에 성을 축조하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남일룡 1995; 리순진 1995; 이송래 1993: 210).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역에 있던 정치 세력들이 각자 내부의 독자성을 보유한 상태로 누층적으로 결집하여 형성된 나라이다. 추모왕이 남하하기 이전부터 那라고 불린 지역 집단이 상호 통합과 복속을 거쳐 상당한 정치체로 성장했고, 추모 집단은 이들을 결집시켜 고구려를 건국했던 것이다(여호규 2007: 21).
 
실제 환인 오녀산성에서는 燕 계통의 선철제 주조도끼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자연적인 요새지인 경우, 이른 시기부터 방어시설로 이용되었음을 반영한다. 또한 압록강 중류일대와 이웃한 渾河(혼하) 상류유역에서는 방어를 고려하여 산지에 자리 잡은 신석기시대 말기~청동기시대의 취락유적이 다수 존재하는데 취락유적의 입지조건이 고구려 초기 산성과 매우 유사하여 주목된다(余昊奎 1999a: 14). 이처럼 압록강 중류 일대에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산지에 방어용 취락이 들어서고 더 나아가 ‘구루’라고 불렸던 성이 축조되었을 것이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은 총 길이 790㎞, 유역 면적 31,739㎡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지만, 하류 유역을 제외하면 넓은 평야가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다. 백두산에서 중강진에 이르는 상류 유역은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 지대로서 해발 고도가 대체로 1,000m 이상인 험준한 산악 지대이다. 중강진에서 시작되는 중류 유역도 여러 계통의 암석이 뒤섞여 복잡한 지층을 이루며, 특히 압록강 연안 남쪽에는 강남산맥, 북쪽에는 노령산맥과 용강산맥 등 여러 산줄기가 동북에서 서남으로 내달리며 험준한 산악 지형을 이루고 있다(여호규 2007: 22).
 
압록강 유역에 대한 영역확장이 마무리되자 고구려는 이후 요하유역에 대한 집중적인 영역확장정책을 실시한다. 이곳은 단순한 鐵産地(철산지)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李龍範 1966) 고구려를 포함한 중국왕조 및 북방민족의 군사적 진출을 위한 시험장 내지는 최후 결전장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산성은 요동지방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신형식 2000a: 8).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요하는 예로부터 중국 6대 하천의 하나로 지목될 정도로 큰 하천이다. 요하는 크게 상류지역과 중하류지역으로 나뉘며 상류지역은 발원지에 따라 서요하와 동요하로 양분된다(劉威 1998). 서요하는 역사적으로 유목민족의 활동무대로서 고구려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동요하 일대는 대부분 광활한 동북대평원을 가로지르는 구간으로서 아직까지 고구려 성이 발견된 바가 없다.
 
요하 중하류지역 역시 서쪽과 동쪽의 자연지형이 확연히 구별된다. 서쪽 지역에는 동서 방향의 과이심사막이나 동북~서남 방향의 의무려산 등이 요하 서안까지 뻗어있기 때문에 지류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편이다. 이에 비해 동쪽 지역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가면서 대흑산맥, 길림합달령산맥, 용강산맥, 천산산맥 등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이들 지류 연안에는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충적평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연평균 강수량 600㎜ 이상, 연평균 기온 23~24℃로서 농사짓기에 충분하다(劉明光 1998). 특히 각 지류 연안에 펼쳐진 충적평지는 폭 1~2㎞, 길이 수십㎞로서 지형조건상 압록강 중류 연안과 유사하다.
 
이처럼 요하 중하류 가운데 동쪽지역이 서쪽지역보다 농경에 더 적합하며, 지류 연안에는 고구려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연안과 유사한 河谷平地가 발달해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일찍부터 요하 동쪽의 지류 연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요동평원의 중국세력이나 서요하 · 대릉하 방면의 유목민족과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본고에서는 고구려가 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본 다음, 압록강 · 요하 유역에 축조된 각 성들이 어떠한 군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특히 지형에 따라 성의 규모나 성격 등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여 고구려가 일관된 군사전략에 맞춰 각지에 축성 사업을 벌였음을 검토하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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