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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고구려 2대 유리명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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俶儻有奇節        뜻이 크고 기이한 절개 있는 자. 

元子曰類利        원자의 이름은 유리로다.
得劍繼父位        칼을 얻어 아비의 자리를 이었고
塞盆止人○        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피했노라.

<동명왕편> 종장(終章)

 

《동명왕편》의 종장 첫구절에 나오는 대목이다.

동명왕의 이야기가 아닌, 그의 아들 유리왕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명왕편》에 왜 갑자기 유리왕의 이야기가 나오나 하시는 분이 있겠지만,

사실 《동명왕편》은 주몽왕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서사시이면서 동시에 역사 기록이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주몽왕의 선대, 그러니까 해모수와 유화의 이야기를 다룬

서장(序章), 주몽왕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가 본장(本章), 그리고 주몽왕의 아내와 아들

유리왕의 간략한 이야기와 지은이(이규보)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 종장(終章)이다.


[琉璃明王立. 諱類利<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유리명왕(琉璃明王)이 즉위했다. 이름은 유리(類利)<혹은 유류(孺留)라고도 하였다.>이다. 주몽의 원자이고, 어머니는 예(禮)씨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즉위전기

 

유리왕은 《삼국사》와 《동명왕편》에서 말했다시피 주몽왕의 제1왕자 즉 원자(元子)다. '유리(琉璃)'라는 말은 불교적 윤색의 흔적인데, 유리보전(琉璃寶殿)이라고 해서 불교 전각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전각이 있다. 나는 불교 지식은 젬병이라서 그게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하는 깊은 곳까지는 못 들어간다. 그냥 불교적인 윤색이라는 정도만 말하고 그치련다.

 

《광개토태왕릉비》나 《삼국사》백제 온조왕본기, 그리고 유리명왕본기에는 '유류'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 이름이 고구려 당시의 것과 가장 비슷한 발음과 표기법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명성왕 주몽이 사망한 뒤, 그는 왕의 첫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의 2대 국왕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 그는 '아버지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컸던 컴플렉스로 마음고생이 몹시 심했던 것으로 전한다. 《삼국사(三國史)》의 내용을 보자.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앞서 주몽이 부여에 있으면서 예씨 성 가진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아이를 가졌다. 주몽이 떠난[歸] 뒤에 아이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유리다. 어릴 때 길에서 놀면서 참새를 쏘려다 실수로 그만 물 긷던 아낙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아낙이 꾸짖어 말하였다.

“이 새끼가 애비가 없어 이리 못됐구나.”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즉위전기

 

왕이 처음 부여를 떠날 때 쫓기는 와중에서 아내를 데려가는 것이 위험할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동명성왕은 아내를 부여에 남겨둔채 떠났다. 그가 떠난 뒤 그 부인은 퍽 힘겹게 살았을 것이다. 왕을 놓친 부여 왕자들이 그녀를 가만 놔둘리 없고,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아들과 함께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갔을지 모른다. 안 그랬으면 유리가 어려서부터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활이나 쏘러 다니고, 길가의 아낙(신분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으로부터 '애비도 없는 놈'이라는 '쌍욕'을 들을 이유도 없었겠지.('아버지 없는 아이는 버릇이 없다'는 말은 이 시대에도 있었던 것 같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고 말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상실감ㅡ근본도 뿌리도 없는 부평초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느꼈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린아이의 정체성을 뒤흔드는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이 더 있을까?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則言, 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유리는 부끄러워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분이예요? 지금 어디 계세요?”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우리 아버지는 비상한 분이시다. 나라에 용납되지 못해서 남쪽 땅으로 도망쳐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갈 적에 나더러 ‘네가 아들을 낳게 되면, 내가 물건을 남겨 두었는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 하라. 만약 이를 찾을 수 있다면 곧 내 아들이리라'고 하셨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즉위전기

  

《동명왕편》에서는 이것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한다. 내용이 《삼국사》에 비해 살이 듬뿍 붙었다.

 

[類利少有奇節云云. 少以彈雀爲業, 見一婦戴水盆, 彈破之. 其女怒而○曰 "無父之兒, 彈破我盆." 類利大慙, 以泥丸彈之, 塞盆孔如故, 歸家問母曰 "我父是誰?" 母以類利年少戱之曰 "汝無定父." 類利泣曰, "人無定父, 將何面目見人乎?" 遂欲自刎. 母大驚止之曰 "前言戱耳. 汝父是天帝孫, 河伯甥. 怨爲扶餘之臣, 逃往南土, 始造國家. 汝往見之乎?" 對曰 "父爲人君, 子爲人臣, 吾雖不才, 豈不愧乎?" 母曰 "汝父去時有遺言, '吾有藏物七嶺七谷石上之松, 能得此者. 乃我之子也.'"]

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다. 어려서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였다.
“아비도 없는 놈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구나.”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누구예요?”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가 어렸으므로 장난으로 대답했다.
“너는 정해진 아버지가 없는데.”
유리는 울면서 말했다.
“사람이 아버지도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 말했다.
“아까는 농담이었어. 네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자야. 부여에서 신하노릇 하기 싫다고 도망가서 남쪽 땅에서 나라를 세우셨지, 가볼려구?“
“아버지는 왕이 되었는데 아들은 남의 신하나 되었으니,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버지가 가실 때 남기신 말에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감추어 둔 것이 있다.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하셨다.”

<동명왕편> 종장(終章)

 

《동명왕편》과 《삼국사》. 둘은 비슷하면서 다르다. 둘다 같은 《구삼국사》를 갖고 만들었는데, 내용이 이렇게나 판이하게 다르다. 아니, 《동명왕편》의 내용이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생생하다. 그저 참조만 했는데도 이 정도라면, 실제 《구삼국사》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애석하게도 그것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슬프고도 아쉬울 따름이다. 주몽왕은 떠나기 전, 아내와 자신의 아이에게 신표를 남기고 떠났다. 만약 아이가 태어나면 그 신표를 가지고 함께 자신을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아래'에 감추어두었다는 수수께끼같은 말. 그것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類利聞之, 乃往山谷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 · 句鄒 · 都祖等三人, 行至卒本.]

유리는 이 말을 듣고 산골짜기로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고, 피곤하여 돌아왔다. 어느날 아침 마루 위에 있을 때 주춧돌 틈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다가가서 보니 주춧돌에 일곱 모서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둥 밑에서 부러진 칼 한 쪽을 찾아냈다. 마침내 그것을 가지고 옥지(屋智) · 구추(句鄒) · 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떠나 졸본에 이르렀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즉위전기

 

우리 나라 무속, 정확히는 황해도의 내림굿 절차 가운데 하나가 물건을 숨겨놓고 그걸 직접 찾아보라고 시키는 것이 있다. 무당들이 굿할 때에 쓰는 부채나 방울, 칼 같은 무구(巫具)를 방안 여기저기 몰래 감춰놓고, 만신이 될 사람 즉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될 사람에게 그것을 직접 찾게 하는 것인데, 무구들을 모두 찾아보임으로서 자신의 영적 능력 즉 신기(神氣)를 증명하는 것이 곧 우리 나라에서 무당이 되는 하나의 절차이다. 자신이 모시게 될 신의 힘을 빌어 '감'으로 '한번에'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운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지금 유류도 추모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한 '내림굿'의 절차ㅡ아버지가 숨겨놓은 물건을 찾아내기 위한 절차를 치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버지가 남겼다는 그 신표는, 뜻밖의 엉뚱한 곳에 있었다.

 

[類利自往山谷, 搜求不得, 疲倦而還. 類利聞堂柱有悲聲, 其柱乃石上之松木, 體有七稜. 類利自解之曰, "七嶺七谷者, 七稜也. 石上松者, 柱也." 起而就視之, 柱上有孔. 得毀劒一片, 大喜.]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다가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가 당(堂)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기둥은 돌 위의 소나무이고 나무 모양이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해득하였다.
“일곱 고개에 일곱 골짜기라는 것은 일곱 모서리다. 돌 위 소나무라는 것은 기둥이다.”
일어나서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조각 하나를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동명왕편> 종장(終章)

 

유리는 마침내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우연찮은 기회로 그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일곱 모가 난 바위. 보통 돌이나 바위는 이리저리 자기가 모나고 싶은 대로 모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꼭 일곱 모가 나는 돌은 없다. 사람이 인공적으로 깎은 것이면 모를까..... 그리고 돌 위에 소나무가 있다는 말에서, 그 '일곱 모난 돌'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착안하게 된다면.... 그렇다. '일곱 모난 돌 위의 소나무 밑'이라는 말은 결국, '주춧돌 위의 기둥'을 말하는 것이 된다. 아마 그 기둥도 소나무로 만든 것이였을 것이다. 유리는 수수께끼를 풀었고 신표를 찾았다. 신표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부왕을 뵙고 부러진 칼을 바치자 왕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부러진 칼을 꺼내어 합쳐 보았다.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은 기뻐하고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 권제13, 고구려본기1, 유리명왕 즉위전기

 

동명왕은 유난히 '7'이라는 숫자를 좋아했던 것일까. 수수께끼에 나오는 숫자가 모두 '7' 일색이다. 《가락국기》에서 수로왕이 자신의 왕도가 될 곳을 찾아 봉황동 유적을 방문했다가 한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수로왕 역시 동명왕과 마찬가지로 북방출자설, 즉 북쪽에서부터 남하한 기마민족이란 설이 있으며 그 뿌리는 대개 '부여'로 비정된다) 그 말이 다음과 같다.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룬다."

고대 세계에서 숫자라는 건 단순한 부호가 아니라, 고대인의 사상을 지배하고 모든 움직임의 기본이 될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기호였다. 고대 중국 하왕조의 우왕이 낙수 강가에서 얻었다는 《하도(河圖)》와 《낙서(落書)》, 희랍의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숫자가 가진 절대성을 중시해서 종교로까지 발전시켰을 만큼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리학은 만물의 현상을 설명하고 그 본체를 규명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던 것이다. 자연의 비밀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려는 욕구에서부터 수(數)가 출발하였으며, 물질의 형태소의 표상으로서만이 아니라 물질이 발생하는 순위 혹은 물질의 성질을 표상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ㅡ는 것이다.

 

'7'이라는 숫자는 우리 말로는 지금 '일곱'이라고 읽지만 고구려 때에는 '나난(나단)'으로 읽었는데, 몽골이나 만주·여진어에서 7을 '나단(Nadan)' 일본어로 '나나(Nana)'로 읽는 것에서 그 잔영이 남아있다.(왜 우리 조상들이 쓰던 말이 지금 우리말과 똑같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묻지 마시라. 나도 골치아프니까.)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타타르 족이나 소요트 족, 예니세이 족들에게서 7의 관념은 흔히 보이는 것이다. 특히 예니세이(에네트) 족 샤먼들이 쓰는 북에는 일곱 가닥의 선이 있는데, 이것은 영혼이 처음 향한다는 지하세계인 '칠대동굴(七大洞窟)'을 의미하고, 내도(內圖)에 그려진 일곱 개의 반원형은 곧 일곱 개의 바다를 가리킨다. 사람의 영혼이 일곱 개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예니세이 족의 신앙인데, 마지막 일곱 번째 영인 울베(Ulwej)는 바깥에 있어 어디든지 동행하며 샤먼의 눈에만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뭐, 굳이 단군설화의 '3ㆍ7'을 끌어대지 않아도 고래의 칠성신앙이라던지 하는 것에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대해 가졌던 신성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前漢鴻嘉四年夏四月, 奔高句麗, 以劒一片, 奉之於王. 王出所有毀劒一片合之, 血出連爲一劍. 王謂類利曰, "汝實我子, 有何神聖乎?" 類利應聲, 擧身聳空, 乘牖中日,  示其神聖之異. 王大悅, 立爲太子.]

전한(前漢) 홍가(鴻嘉)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로 도망쳐 칼 한 조각을 왕께 바쳤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하나의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물었다.
“네가 정말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神聖)이 있지?”
유리는 즉시 몸을 날려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 위에 오름으로서 신성의 기이함을 보였다. 왕께서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동명왕편> 종장(終章)

 

해모수와 추모, 그리고 추모와 유류. 그들은 왕이면서 또한 무당, '당굴'이다. 우리나라 무속에서 북방계와 남방계는 서로 다른 계통을 견지하는데, 그것은 신을 모시고 드는 '만신'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을 받아들이고 모시게 되느냐에 있다. 일본과 비슷하게 어떤 한 집안에서 몇 대를 이어 신을 몸에 받아들이고 무당이 되는 '세습무당' 형식의 남방계와는 달리, '강신무당'으로 대표되는 북방계 무속은 혈연과는 상관없이 만신이 가진 초자연적인 위력이나 주력, 그리고 지혜, 소위 말하는 그 '신기'에 따라 계승이 결정된다. 유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혈연주의'가 아니라 '재능주의'인 셈.

 

추모왕은 자신을 찾아온 아들에게 묻는다. 네가 정말 내 자식이 맞다면 너에게는 어떤 신성한 능력이 있느냐고. 여기서부터 추모는 유류와의 혈연적 관계보다도 유류가 자신만큼의 능력 즉 신기(神氣)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나 몽골 같은 북방계 무속에서는 만신이 모시던 신이 다른 만신에게 내림굿을 내릴 때, 그 내림굿을 내려준 사람을 '신어머니'라 하고 내림굿을 받고 새로이 만신이 된 사람을 '신딸'이라고 한다. '혈연'이 아니라 그 모시는 '신'의 동질성이, 혈연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두 사람을 '신어머니'와 '신딸', 보통의 그것과 같은 모녀관계로 묶어주며, 그 순간부터 둘은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추모왕과 유류왕은 누가 뭐래도 틀림없는 혈연적 관계가 있었다고 나는 믿는다. 추모왕계와 유류왕계, 해씨계와 고씨계, 소노부니 계루부니 하면서 왕통교체가 있었을 것이다 어떻다고 해도 솔직히 난 그런 것 모른다. 유류는 핏줄로도 틀림없는 추모왕의 아들이고, 추모왕은 틀림없는 유류왕의 아버지다.

 

술이부작(述而不作)ㅡ저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 원래는 공자가 한 말이라는데(《논어》술이편 첫머리 참조), 《삼국사》뿐 아니라 동양 모든 역사고전의 편찬기조이자 불문율이기도 한 말이다. 김부식 영감은 옛날부터 있던 기록들을 모아서 저술했을 뿐이지 그 영감 자신이 지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바 아니지만) 《동명왕편》에 보면, 그 내용은 확실히 《삼국사》보다 더 자세하면서도 믿을수 없는 신비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원전은 물론 《삼국사》보다 더 이전의 《구삼국사》에 모티브를 두고 있을 것이고. 그 《구삼국사》와, 《고기(古記)》ㆍ《신라고기(新羅古記)》ㆍ《백제고기(百濟古記)》ㆍ《삼한고기(三韓古記)》ㆍ《해동고기(海東古記)》등의 여러 잡다한 고기들을 모아서 지금의 《삼국사》가 만들어졌다고 해야 하나. 이때의 일을 조선조 성호 이익은 '칠릉석(七稜石)'이라는 제목의 한시로 지어 읊었더란다.

 

於菟墮地能食牛        범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를 잡을 기세를 지녔고

迥立空山倏生風        멀리 빈 산에 서면 바람이 일어난다

悲聲遙和在陰鳴        슬픈 소리 멀리 화답하여 음지에 울림이 있으니

天闕九重心流通        구중궁궐까지 왕과 마음이 통하도다

母曰嗟汝兒有父        어머니 말씀하시매 "아아, 너에게도 아버지가 있으니

善謎說與腹中子        수수께끼를 뱃속의 네게 주셨단다."

十八公下七嶺谷        십팔공 아래 일곱 고개와 골짜기

神光黯黯城起        신광이 어둑하게 풍성에서 일어나니

炯炯一段周宋鐔        빛나는 한 조각은 천자의 칼이로다.

忽然身騎靑虹飛        홀연히 푸른 무지개 타고 날아가노니

恒山寶符倚天氣        항산의 보배로운 부절이 하늘 기운에 의지하여

斷劒來會騰淸輝        부러진 칼 맞추니 푸른 빛이 솟구친다

王曰嗟我國有主        왕께서 말씀하사 "아아, 우리나라에 주인이 있게 되었도다.

斬伐荊棘兒能爲        가시 베는 일은 네게 맡기리라."

兒拜稽首承命罷        아이는 절하고 머리 조아려 명 받들어 물러나니

七稜古石成龜螭        일곱 모의 옛 돌은 비석을 이루었구나.

 

뭐, 어쨌든 이제 《동명왕편》을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김부식 영감은 유학자라서 유교 윤리에 어긋나거나 너무 황당하고 기이한 내용이다 싶으면 가차없이 삭제하고 《삼국사》를 썼고, 그것은 엄청난 비판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유롭다. 난 역사가가 아니니까. 하지만 고구려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주욱.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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