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localkorea.org/32414

부여·고구려의 식문화는 오늘날 한국 음식문화의 기반
    1. 고구려의 맥적(貊炙)이 숯불갈비(불고기)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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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구려의 ‘전국장(戰國漿)’에서 오늘날의 청국장과 된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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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맥적(貊炙)이 숯불갈비(불고기)의 기원이다
이명희(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0. 서론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변방 정권이며 그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현재 중국의 영토에서 활동하였던 나라라는 사실을 내세운다. 매우 단순하고 황당한 논리다. 이러한 중국 측의 주장에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우리 조상들이 세운 나라이므로 우리 역사다”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구려의 멸망 이후를 생각해 보라. 고구려민의 일부만이 신라에 흡수될 뿐이다. 그리고 일부는 당으로 이주하게 되어 고선지 장군 같은 이는 서역에서 당나라 사람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 일부는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서 발해를 건국한다. 

 
나는 이렇게 답하려고 한다. ‘고구려의 문화가 한국에 주로 계승되어 있으므로 그 역사는 한국인의 역사이다.’ 고구려는 종족 구성으로 볼 때 다민족 국가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예맥족을 중심으로 거란, 말갈, 선비, 돌궐, 한족 등 여러 종족을 포괄하는 다민족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가 이룩한 문화가 현재의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있으므로, 고구려민은 곧 우리들의 조상이고, 또 그 역사는 우리들의 역사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오늘날의 거란족이나 말갈족, 그리고 한족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고 있지 않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이 계승하고 있는 고구려 문화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고구려인들이 이룩한 음식문화와 주택문화 등이 오늘날 우리에게 계승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인이 발전시킨 맥적(숯불고기)이나 청국장과 같은 음식문화, 온돌과 같은 주거 문화 등은 오늘날 우리 생활문화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고구려의 음식문화가 어떻게 우리 음식문화의 바탕이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1. 고구려의 맥적(貊炙)이 숯불갈비(불고기)의 기원이다


오늘날 우리의 식문화 중에서 세계화하고 있는 음식의 하나가 ‘불고기’이다. ‘불고기’는 고기를 양념하여 숯불에 직화(直火)구이를 하는 것인데, 오늘날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 직화구이의 기원이 바로 고구려의 맥적(貊炙) 혹은 맥구(貊灸)이다. (쇠)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식문화는 원래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기에 양념을 하여 저며 두었다가 직화구이로 요리하여 먹는 음식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맥족(貊族)이라고 하며 이들이 부여족, 즉 고구려인의 주류를 구성한다.
 
옛 중국 진(秦)나라 때 쓰여진 『수신기(搜神記)』라는 책에 “맥적은 하찮은 다른 민족의 먹거리이거늘 태시 이래 중국인이 이것을 숭상하여 중요한 잔치에 이 음식을 내놓으니 이는 외국의 침략을 받을 징조이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다른 민족은 바로 맥족이며, 그 맥족은 중국의 동북지방과 내몽고지방에 살고 있던 종족으로서 후에 부여와 고구려에 흡수 통일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 수신기의 기록을 보면 중국인들은 외국의 음식이 상에 오르는 것을 외세 침략으로 볼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맥적이 중국인에게 있어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고급 요리로 인기가 높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맥적이 통일신라 이후 목축의 쇠퇴와 고려시대 숭불정책으로 인한 육식의 금기를 뚫고 고려 후기에 ‘설야멱적(雪夜覓炙)’을 부활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 원지배기에 육식을 하는 몽고인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그동안 민간에 잠적해 있던 ‘맥적’이 새롭게 재등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설야멱적’의 기원을 몽고에서 찾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그것은 고구려의 맥적을 모르고 하는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무릇 식문화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종교적 이유 등으로 인하여 쇠퇴하고 변형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단절되기는 어렵다. 설야멱적은 맥적이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에 민간에서 잠적해 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이며, ‘맥(貊)’의 음을 따서 멱(覓)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개성 지방에서 유행한 설야멱적은 고기를 굽다가 냉수에 담구고, 또 다시 굽고 하기를 반복한다고 『해동죽지(海東竹枝)』라는 기록에 나온다. 여기서 고기를 굽다가 물에 담가 다시 구운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의 쇠고기는 일소를 도살하여 그 고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질기고 기름이 적었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육질이 질기고 기름이 적기 때문에 그 맛을 돋우기 위해 양념을 하면서 고기를 연하게 숙성시키는 조리법이 발달하였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반찬의 기본은 된장에 있었기 때문에 고기양념과 숙성을 할 때에도 장류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장류의 강한 맛을 헹구어내기 위해 한 번 구웠다가 물에 담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리고 다시 다른 것으로 양념을 하여 구워 먹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구려에서 확립된 맥적이 고려시대에는 설야멱으로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궁중요리로서 너비아니가 되었으며, 이것이 조선왕조 멸망 후 일반에 보급되어 ‘갈비’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확립된 ‘맥적’이 오늘날 숯불갈비, 나아가서는 숯불구이로 계승되어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또 세계인을 매료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오늘날 숯불양념 갈비를 보면 양념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 계통이 발견된다. 하나는 소금을 위주로 하는 양념이고 다른 하나는 간장을 위주로 하는 양념이다. 소금을 위주로 하는 양념갈비의 대표가 ‘수원갈비’라면, 간장을 위주로 하는 양념갈비의 대표가 ‘예산갈비’이다. 오늘날 수원갈비의 기원을 찾으면 화춘옥이 나오고 화춘옥의 갈비는 조선의 궁중요리에 연결된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산갈비는 예산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고기를 조리하여 먹는 식문화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산갈비’의 특징은 간장을 써서 양념을 하고, 밖에서 숯불로 다 구운 다음에 뜨겁게 데운 돌 접시에 놓아 식탁에 내놓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예산갈비’는 간장으로 양념을 할까? 예산은 백제의 고토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에 부흥운동이 매우 활발했던 지역이고 백제의 문화의 영향이 깊었던 곳이다. 그런데 백제를 세운 중심세력은 부여·고구려계의 유민들로서 이들 또한 맥적을 먹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맥적이 후대에도 살아남아 있었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오늘날의 예산갈비로 있는 게 아닐까? 이때 장류로서 양념과 숙성하던 종래의 조리법이 비교적 싱거운 왜간장(진간장)이 도입되면서 간장으로 숙성과 양념을 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종래 전통 장류로 양념과 숙성할 때 파생되는 된장의 강한 맛과 짠 기운을 찬물에 헹구는 조리법도 생략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예산갈비가 ‘석갈비’라는 이름으로 충남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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