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localkorea.org/32414

부여·고구려의 식문화는 오늘날 한국 음식문화의 기반
    1. 고구려의 맥적(貊炙)이 숯불갈비(불고기)의 기원이다 http://tadream.tistory.com/5568
    2. 고구려의 ‘전국장(戰國漿)’에서 오늘날의 청국장과 된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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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전국장(戰國漿)’에서 오늘날의 청국장과 된장이 나왔다. 




한국 전통 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음식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된장이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된장이야말로 한국음식의 토대이면서 그 특징을 형성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된장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거의 모든 반찬에 쓰인다. 그리고 한국음식은 비빔밥에서 보이듯이 여러 가지 반찬을 섞어서 먹는 방법이 발달하였고, 찌개 혹은 탕 음식에서 보이듯이 따뜻한 음식을 선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징의 배후에는 모두 된장이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 서유구도 『증보산림경제』「장제품조」에 “장은 모든 음식맛의 으뜸이 된다. 집안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좋은 채소와 맛있는 고기가 있은들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없다. 설혹 초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어도 여러 가지 좋은 맛의 장이 있을 때에는 반찬에 아무 걱정이 없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된장이 한국 음식의 기본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생활문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된장도 우리 음식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어느 특정인의 노력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된장과 관련된 약간의 문헌상 기록과 오늘날 된장의 모습을 통하여 된장과 청국장의 기원을 찾아보도록 하자.


가. 청국장의 기원



고대의 문헌 중에 된장과 관련된 기록보다는 된장과 유사한 ‘청국장’에 관한 기록이 먼저 나타난다. 그것은 아마 청국장이 된장보다 앞서 만들어진 식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농서라 할 수 있는 북위의『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책에 청국장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시(豉)’라는 음식이 나온다. 거기에 ‘시’는 “콩을 삶아 짚으로 싼 다음 곰팡이가 끼도록 띄우고 이를 짓이겨 독 속에 밀봉하고 햇볕에 쬐었다가 소금을 섞어 먹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시’는 오늘날 우리가 먹는 청국장과 유사하며, 이후 중국 문헌에서는 콩을 발효한 식품의 통칭으로 불려졌다. 
 
고구려는 콩의 원산지이며, 옛 중국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고구려가 선장양(善醬釀)이라 하여 발효문화가 발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시’의 냄새를 고려취(高麗臭)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나라의 『박물지(博物志)』에서 ‘시’는 외국 음식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의 원산지가 바로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구려에서는 어떻게 하여 청국장의 원조인 ‘시’가 만들어졌을까? 고구려는 잘 알려져 있듯이 정복사업을 활발히 폈던 나라이다. 그리고 경제의 상당부분을 정복전쟁을 통해서 조달하였고, 그 결과 부경이라는 창고가 발달하였다. 고구려 병사들은 정복전쟁에서 이곳저곳을 많이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보급부대가 없이 비상식을 병사들이 직접 지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삶은 콩을 말안장 밑에 깔고 타고 다니면 사람과 말의 체온을 받아 발효하게 되는데 이것을 비상식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요리할 필요도 없으며 완전식품일 뿐 아니라 고단백질이라 적은 양만 먹어도 많은 힘을 쓸 수 있었다. 게다가 상할 염려도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휴대식품으로서 최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를 전국장(戰國醬)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에서도 ‘책성지시(柵城之豉)’라고 하여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이 군량으로서 ‘시’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시’ 혹은 전국장이 청국장으로 변하였을까? 한국의 전통에 정통한 이규태 씨는 『한국인의 밥상문화』에서 “병자호란에 참전한 오랑캐 병사, 곧 청국 병사들의 주된 군량이었던 데서 청국장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청나라 병사들의 휴대식품설을 제기하고 있다. 



이처럼 청국장은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같은 북방민족인 여진족(만주족)에도 보급되었으며 우리에게는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중요한 식품의 하나로 애용되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청국장을 담북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서 “담북장은 메줏덩이처럼 단단히 굳혀두었다가 이를 가루를 내어 끓여먹는다”라고 하여 청국장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메주처럼 말린 것을 담북장이라고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낫도(納豆)라고 하여 우리처럼 찌개를 만들어 먹지 않고 날것으로 먹는 식품이 있는데, 이것 또한 고구려가 만든 ‘시’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나. 된장의 기원



된장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우리나라 된장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앞서 지적한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의 고구려 관련 기록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장양(善醬釀)에서 ‘장(醬)’이 곧바로 된장을 이야기하는지는 의문이다. 이것은 된장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기보다는 오히려 청국장을 만들어온 전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된장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즐겨 먹는 ‘된장’에 대해서는 오래된 기록이 거의 없다. 왜일까? 
 
첫째, 모든 사람이 아는 일에 대해서는 기록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초기에 고구려의 ‘장’에 대한 기술이 있고 그 이후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장 담그기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 장 담그기가 일상화되었다고 보여진다. 조선 후기의 문헌 『구황보유방(救荒補遺方)』에 장 담그기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그것은 우리나라의 전통 장 담그기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나라 각 가정에서 행해지는 장 담그기 기술은 문자로 표현하여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장 담그기는 각 가문 여인네들의 기본적인 일이었고,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오랜 시간에 걸쳐 체험을 통해 전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문자나 말로써가 아니라 눈대중과 손대중 그리고 감각으로 익혀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자로서 나타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장 담그기는 신성한 의식이었으며 각 가문의 전통이며 비법이었다. 그래서 장 담그기는 좋은 날을 받아 시행하였고, 집안의 안주인이 직접 참여하였으며 다른 집안사람이 오는 것을 금하였다. 그래서 장맛은 곧 그 집안 여인네의 자랑이었으며 자부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된장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앞서도 이야기하였으나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는 이미 오늘날과 같은 된장이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삼국시대 중기 이후부터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중기 이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한자를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있었음에도 그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미 일반화되어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고려 이후에도 기록이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본다. 
 
그러면 삼국시대에 어떻게 된장이 완성되었을까? 그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증거자료도 없기 때문에 상상 속에서 추론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된장의 모습과 우리 민족의 역사를 통해 된장의 형성과정을 역으로 추론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된장은 늦가을에 콩을 삶아서 절구로 대충 짓이긴 후 메주 틀에 넣어 모양을 만들고, 그것을 자연 상태에서 건조시키면서 곰팡이를 받아 발효시킨 후, 봄이 채 오기 전에 항아리에 넣어 소금물에 절이면서 더욱 숙성시키고, 초여름이 시작될 무렵 간장을 뜨고 메주 덩이 장을 으깨어서 소금과 함께 항아리에 재여 더욱 숙성시켜서 만든다.     이처럼 된장은 장기간에 걸쳐 두 번씩이나 숙성시키는 과정이 있어 청국장보다 깊은 맛을 낼 수 있고 또 장기간 보존 식품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청국장은 콩을 삶아 일정 정도의 열을 가해 급히 발효시켜서 빠른 시일 안에 먹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부패하여 버려야 하는 문제점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물론 물기를 적게 하면 어느 정도는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가장 좋은 군량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청국장이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청국장이 부패하여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싹 말려야 했는데 이것은 이미 청국장은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담북장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담북장을 먹기 위해 말라서 딱딱해진 장을 물에 넣어 끓여 먹는 방법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 담북장을 가지고 찌개 끓이는 것을 상상해 보면 오늘날 된장찌개와 흡사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맛이 깊을 리는 없다. 여기서 청국장 혹은 담북장을 개선할 필요가 생겨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식품을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띄우는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절이는 방법이다. 양쪽 모두 발효시킨다는 점에서는 같다. 띄우는 방식은 청국장과 같이 내륙의 북방민족이 일찍부터 사용해 오던 방법이며, 절이는 방법은 남방의 해양민족이 야채 등을 보존하기 위해 발견한 방법이다. 우리 민족이 대륙의 북방민족과 남방의 해양민족이 결합되어 형성되었듯이 우리 음식도 북방식과 남방식이 융합되어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전통 가옥인 한옥이 북방민족이 개발한 온돌과 남방민족이 상용하는 마루가 결합되어 완성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된장은 바로 북방민족의 청국장과 담북장이 남방 해양민족의 식문화와 만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콩을 띄운 청국장 혹은 담북장을 가지고 김치와 같이 소금물에 절이는 조리법을 응용함으로써 탄생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일찍이 부여에서 “콩으로 간장과 된장이 섞인 걸쭉한 장을 담갔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된장의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된장의 본고장은 백제?



우리 역사상 된장을 완성시킨 주역들은 과연 어느 시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감히 ‘백제’라고 추정해 본다. 왜냐하면 백제는 부여 및 고구려 계통의 부족이 한강 유역으로 내려와 그곳의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북방계통의 문화와 남방계통의 문화가 비교적 용이하게 결합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판단된다. 즉, 북방에서 내려온 백제의 중심부족이 남방성 해양문화를 가지고 있던 토착세력과 만나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과정에서 된장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그리고 백제는 5세기 중엽에 고구려 장수왕에 쫓겨 한강 유역을 버리고 웅진으로 내려오고 또 이어서 사비로 천도하였다. 그리고 사비로 천도할 때 백제는 나라이름을 ‘남부여’라 하고, 왕이 자신의 성을 ‘부여’씨로 할 정도로 부여 계승 의식이 강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연유에서인지 백제의 고도(故都) 공주와 부여 및 그 인근에는 부여·고구려 계통의 음식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앞서 지적했던 ‘예산갈비’도 멀리 그 연원을 올라가면 백제와 연결되고 고구려의 맥적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예산갈비’ 외에도 몇 가지가 더 발견된다. 즉, 공주-부여-서천 일대에 광범위하게 유행하고 있는 청국장과 구육(狗肉)이 그것이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같이 늦가을의 계절음식으로서, 청국장과 여름철의 보양 음식으로서 구육은 우리나라 전국에서 골고루 나타나는 음식문화이다. 그런데 굳이 여기서 거론하는 것은 공주-부여-서천 지역에서는 이 음식이 계절음식이 아니라 일상음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청국장을 늦가을과 겨울철에만 먹는 것이 아니라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틈틈이 애용한다. 그리고 구육은 사시사철 애용한다. 특히 서천 지역에서는 장례식의 산음식이나 회갑연의 식사로서도 이용할 정도이니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지를 짐작할 있다. 
 
그러면 왜 공주-부여-서천에서는 이렇게 청국장과 구육이 일상화되어 있는 것일까? 이들 지역이 모두 금강 줄기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백제의 본거지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있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백제 고토 지역의 음식문화는 부여 및 고구려 계통의 문화가 백제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중남부 지방으로 보급되어 갔음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북방 기마민족의 문화와 남방 해양민족의 문화를 본격적으로 결합시키고 융화시킨 것도 백제였으리라는 추정을 갖게 한다. 따라서 북방의 띄우는 조리법과 남방의 절이는 조리법을 융화시킨 된장을 완성시킨 주역도 백제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주장해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념하고 싶은 것은 부여 및 고구려의 북방 계통 문화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단지 의식 속에서만 계승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 문화 속에 계승되어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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