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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 치열하게 저항한 고구려 말갈인
20070127T162619 | 수정시간: 2009-01-11 [22:15:11] | 20면

'말갈'은 변방적이고 반독립적이었다. 그들은 고구려 중앙정부와의 관계에서 대체적으로는 협조적이었지만 때로는 저항적이고 고구려 멸망에 이르러 일부는 당에 항복하여 당을 위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 대부분은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가장 강력하게 끝까지 당나라에 항쟁하던 세력이었다. 당과의 항쟁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쟁터가 그들의 생활 터전이자 가족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 장수가 안시성을 치려하니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아군(我軍,고구려 중앙군)과 말갈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하려 하였다…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6천800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니… 당 장수가 욕살 이하 관장(官長) 3천500명을 가려서 내지(당)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나 말갈 사람 3천300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말갈로 불리었던 안시성 주변 주민들이야말로 당나라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였기에 생매장의 보복을 당하였지만,고구려 중앙군 상당수는 평양으로 귀환해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만약 생매장 당한 '말갈'사람들이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었다면 그토록 고구려를 지키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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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4> 동모산에 자리잡은 최초의 산성-성산자산성

(전략)
한편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당의 추격군인 거란의 항복 장수 이해고의 추격을 뿌리치고 발해 건국에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그를 돕고 있던 '말갈' 세력 때문이었다. 중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는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는 데 그를 도왔던 세력으로 고구려인과 함께 말갈인을 꼽고 있다. 

과연 말갈인들은 누구인가? 이들과 고구려인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발해는 과연 고구려 유민이 세운 왕조였는가 아니면 고구려와 관계없는 말갈인들이 세운 왕조였는가 하는 점들이 학계의 쟁점이다. 이 문제는 필자가 발해사 연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봉착한 문제였으며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한 부분이다. 1988년에 내놓은 '숙신·읍루연구'와 '고구려시대 말갈연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결론은 말갈이란 고구려와 다른 종족이 아니라 고구려 변방 사람들을 낮춰서 부른 종족명이라는 것이다. 고대에는 서울사람만을 나라사람으로 인정하는 역사관이 있었다. '삼국사기'는 신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신라를 경주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신라인하면 경주 사람만을 지칭하였다는 것이다. 요즈음도 서울 사람들이 부산 사람을 '시골 사람'으로 낮춰보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고대의 백제사람이란 공주·부여 사람만을 그리고 고구려 사람이란 평양의 도성 안 사람만을 지칭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말갈이라는 멸시어는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라,고구려와 당나라 사람들이 낮춰 부른 이름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말갈을 고구려와 다른 종족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다. 말갈이라는 말 속에는 부락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백두산 지역 사람을 '백산말갈(白山靺鞨)'이라 한다든지,송화강 유역 사람을 낮춰서 '속말말갈(粟末靺鞨)'이라 불렀다. 때문에 '신당서'가 대조영을 '속말말갈'이라 한 것은 '송화강 지역 시골사람'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러니까 말갈 추장 걸사비우는 고구려 변방 장수로서 고구려를 끝까지 지키던 장수였으며,고구려가 멸망해서는 대조영과 함께 영주로 강제 이주당한 세력의 추장이었다. 끝까지 대조영과 운명을 함께한 걸사비우는 고구려의 정규군에 편입된 세력이 아니라,변방의 독자 세력으로서 말갈 추장이라 불렸던 자이다. 

한편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이 당에 끌려가 고구려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당의 안동도독으로 임명되었다가,고구려 부흥을 위해 오히려 '말갈' 즉 고구려 변방인과 공모하였다는 '구당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이때의 말갈도 고구려 변방 현지인에 대한 낮춤말 이외의 다른 뜻이 아니다. "의봉(儀鳳) 연간(676~679)에 당 고종이 고장(보장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요동도독(遼東都督)을 임명하여 조선왕(朝鮮王)에 봉하고… 그런데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다시 불러다 늑주(勒州)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남(河南) 등 여러 주로 분산하여 옮겼다." 

한규철/경성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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