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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발해문화의 자취를 찾아서
고구려 닮아 氣차고 세련美까지 `亞~ 엄친아'
2011. 12. 22 00:00 입력 | 2013. 01. 05 07:31 수정
 
일반 대중들은 고구려인의 진취적이고 쌍무적인 기상은 기억하고 있지만, 발해인의 용맹한 습속은 잘 알지 못한다.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와 문화는 기억하고 있지만 발해의 역사와 문화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이는 발해의 역사가 다른 왕조에 비해 사료가 적고, 남아 있는 유산이 적기 때문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발해의 습속과 문화를 소개하면서 찬란한 해동성국의 일면을 소개하고자 한다.
 
용맹스러운 기상-발해인 셋이 모이면 호랑이도 잡는다

중국 남송시대에 작성된 금(金)나라의 송막기문(松漠紀聞)이라는 견문록에는 다음과 같이 발해인의 용맹함을 묘사한 문구가 발견된다. “남자들은 지혜와 모략이 많으며, 날래고 용감함이 다른 나라 사람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심지어 ‘발해사람 셋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처럼 발해인은 중국인들도 인정한 용맹한 사람들이었으며, 진취적이고 쌍무적인 고구려인과도 비견될 만한 용맹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진 상경용천부 성터에 있는 발해 흥륭사 석등 

발해의 음악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연주

발해의 중앙관청에는 당과 마찬가지로 예의와 제사를 관장하던 태상시(太常寺)가 있었다. 이곳에서 음악과 무용을 관장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발해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일본의 ‘속일본기’ 권13, 성무천황 천평 12년 정사 조에서 살펴볼 수 있다. 즉,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기진몽 일행이 740년 정월에 성무천황 앞에서 ‘본국의 음악’을 연주했다는 기록이다. 이 연주를 계기로 발해 음악이 일본에 처음으로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749년에는 동대사(東大寺)에서 개최된 법회에서 대당악(大唐樂) 및 오악(吳樂)과 함께 발해악(渤海樂)이 연주되기도 했다. 이후 일본조정에서는 내웅(內雄)을 발해에 파견해 발해악을 학습하도록 했으며, 이후 발해악은 일본 궁중음악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아 중요 의식이나 제사·종교 등의 행사 때 널리 쓰이게 됐다. 일본 궁정에서는 발해가 멸망한 후에도 오래도록 발해악을 궁중음악의 중요한 요소로 전해 내려갔다. 아울러 지금까지 일본에서 연주되고 있는 아악 곡에 ‘신말갈(新靺鞨)’이란 곡은 발해에서 전래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발해악은 중국의 송과 금에도 이어졌다. 송에서는 효종(孝宗) 12년(1185) 3월에 발해 음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린 예가 있고, 송의 진양(陳暘)이 지은 ‘악서’ 호부(胡部)에 나오는 말갈무(靺鞨舞)란 것도 발해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또 금 시기에는 발해교방(渤海敎坊)이 있어서 발해 음악이 제도적으로 계속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춤. 답추(踏鎚)

한편, 발해인들 사이에는 답추(踏鎚)라고 하는 춤도 유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거란의 유하관(柳河館) 근처에서 발해 유민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묘사한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보인다. “발해 풍속에 세시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하는 사람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해 노래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거란국지’ 권24, 왕기공행정록·王沂公行程錄)” 이를 통해 발해에서는 일반인들 사이에 춤 추고 노래 부르는 일종의 집단무용이 있었으며, 발해인들의 낙천적인 생활풍습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가무를 즐겼던 풍속과 관련해 그 계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일례가 될 수도 있다.

발해 석조물의 표상, 흥륭사 석등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영안시(寧安市) 동경성진(東京城鎭)에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성터가 있다. 상경용천부지 제1 절터는 발해시대의 절터였는데, 그 기초만 남아 있다가 청대에 들어와 흥륭사(興隆寺)라는 절이 세워졌다. 지금은 1861년에 중건된 다섯 채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모두 상경유지박물관(上京遺址博物館)으로 사용된다. 주목되는 것은 전시관 앞마당에 발해 석조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석등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어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의 미를 느낄 수 있다. 원래 높이는 6.4m지만 지금 남아 있는 높이는 6m다. 현무암으로 만든 이 석등은 덮개돌(蓋石)이 팔각지붕 모양을 이루고, 그 아래의 불 주머니(火舍)도 팔각으로 돼 있다. 특히 하대석과 상대석에 장식된 연꽃무늬는 부조가 강하고 힘차게 표현돼 있어 고구려 미술 특유의 강건함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동경성진 상경용천부 성터에 있는 발해 흥륭사 석등 

발해의 독특한 건축물, 24개돌 유적

동북아시아에서는 그 유형이 알려지지 않은 발해만의 고유한 건축 유적이 있다. 바로 ‘24개돌 유적’이 그것이다. 현재까지도 24개돌 유적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정해지지 않고 있다. 절터 혹은 관청터, 발해왕족의 빈소, 곡식창고, 제사를 지내는 곳, 역참이라는 견해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

24개돌 유적으로 그 소재가 확인된 것은 지금까지 총 12개다. 지역별 분포를 보면 상경용천부로 가는 길목 가운데 있는 돈화시 부근의 4개(강동·관지·해청방·요전자 24개돌), 이 길과 연결된 경박호 부근에 2개(경풍·만구 24개돌)가 있다. 또한 동경 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가는 길목인 가야하 연안 왕청현 백초구진 흥륭촌에 1개(흥륭 24개돌), 두만강 연안 교통 요충지에 2개(마패·석건평 24개돌), 그리고 함경도 동해안 지역에 3개(송평구역·회문리·동흥리 24개돌)가 발견됐다. 유적들은 모두 주변 경관이 수려하며, 주요 도로변에 있다. 또한, 지면으로부터 1m 정도 주춧돌이 솟아 있는 고상식(高床式) 건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주춧돌 간격이 일반 건물보다 매우 좁은 특징을 지닌다. 아울러 3열 8개씩의 초석으로 배열돼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니는 24개돌 유적은 바닥에서 떠 있는 건축물이며, 주춧돌에 기둥을 세우는 일반적인 가구식 건물이 아니라 목재를 가로로 뉘어 쌓는 귀틀집 형상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 촬영한 마패 24개돌 유적. 이병건 교수 제공
 

2011년 촬영한 마패 24개돌 유적. 중국의 잘못된 발해유적 정비를 알려주는 실례가 되고 있다. 모든 24개돌 유적이 3열 8개씩의 초석으로 배열돼 있는데, 현재 마패 24개돌 유적은 4열 6개씩의 초석으로 배열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병건 교수 제공 

중국의 발해유적 정비 현황

발해의 문화유산은 오늘날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중국지역에 대부분 밀집돼 있다. 중국은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북한과 함께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경험이 있다. 또한, 발해의 역사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자국역사라는 인식을 표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라면 중국은 발해유적을 단독으로 유네스코에 등재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에도 중국은 상경성·팔련성·서고성 등을 비롯한 발해의 주요 유적지를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정비해 나가고 있다. 유적에 대한 정비사업은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차원에서 환영할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은 고구려의 문화적 특징과 발해만의 독특한 문화적 요소들은 배제한 채 중국의 문화적 색채만을 투영하며 정비사업을 펼치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강성봉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수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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