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도피성' 출국, 기획부터 좌절까지 '막전막후'
[분석] 여권은 왜 끝까지 원세훈 전 원장에 침묵했을까?
13.03.24 18:03 l 최종 업데이트 13.03.24 18:03 l 구영식(ysku)

▲  퇴임식후 3일만에 미국으로 출국하려다 좌절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자료사진) ⓒ 남소연

'한밤중 퇴임식'을 연 지 사흘 만에 미국으로 출국하려던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계획은 결국 좌절됐다. 

지난 22일 <오마이뉴스>에서 원세훈 전 원장의 미국행을 단독으로 보도한 이후 국정원과 원 전 원장쪽은 "미국출국 계획 자체가 없었다"고 반박했다. '도피성 출국'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변명이다. 하지만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그의 미국행 계획은 '사실'이었다. 

'한밤중 퇴임식'은 미국 출국이 임박했다는 신호였다 

원세훈 전 원장이 퇴임한 후에 미 스탠포드대에 간다는 얘기는 작년부터 흘러나왔다. 지난해 대선 전에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민주통합당의 한 의원이 당시 원세훈 원장에게 "퇴임한 뒤에 미 스탠포드대에 갈 계획이 있느냐?"고 물었고, 원 원장은 "그럴 계획이 전혀 없다"고 답변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게다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인터넷 댓글 공작 등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의혹도 묻혀갔다. 하지만 <한겨레>의 추적보도를 통해 국정원 여직원 김아무개씨가 여러 개의 계정을 가지고 이명박 정부 치적 홍보, 야당 비난 등의 댓글을 단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의혹이 서서히 '사실'로 확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최근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원세훈 지시사항'이 담긴 25개 문건까지 공개했다. 국정원까지 이 문건들의 실체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원세훈 전 원장은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을 직접 지시한 당사자로 지목됐다. 국가정보기관 수장으로서는 최대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의혹 사건이 이렇게 커지면서 정치권에서는 원세훈 전 원장의 '퇴임 뒤 출국설'이 다시 흘러나왔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진선미 의원이 '원세훈 지시사항' 문건을 공개한 직후 기자에게 "원세훈 원장이 퇴임하면 바로 미국으로 갈 것 같다"고 귀띔했다. 이 인사는 원 전 원장의 미국 체류장소로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라라카운티에 위치한 '스탠포드대'를 지목했다. 

미 스탠포드대는 원세훈 전 원장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MB의 핵심측근'인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할 당시 행정1부시장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 2006년 6월 부시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이듬해(2007년)까지 스탠포드대 초빙연구원을 지냈다. 

원세훈 전 원장의 '퇴임 뒤 출국설'이 다시 흘러나온 직후인 지난 21일 국정원에서는 원 전 원장의 퇴임식이 열렸다. 국정원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지난 22일 기자에게 "원세훈 전 원장이 어제 밤중에 간부들만 불러서 퇴임식을 했다"며 "이임사에서 '저를 열심히 도와줘서 감사하다, 앞으로도 국가안보를 위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뭔가 어색한 '한밤중 퇴임식'은 원세훈 전 원장의 미국 출국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극적인 풍경이었다. 이러한 정보와 사실 등을 토대로 <오마이뉴스>는 22일 "원세훈 전 원장이 21일 오후 늦게 퇴임식을 열었고, 이후 미국으로 출국해 스탠포드대에 머물 계획이다"라고 단독보도했다(관련기사 : 원세훈 퇴임 3일 만에 미국행... 도피? ). 이어 다음날(23일) <한겨레>는 한발 더 나아가 "원세훈 전 원장이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권편을 예약했다"고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관련기사 : 원세훈, 24일 미국행…도피성 출국 의혹). 

최근까지 국가기밀을 다루던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퇴임하자마자 외국으로 나가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국회 정보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 내부권력투쟁에서 패해 미국으로 망명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중정) 부장을 거론하면서 "원 전 원장의 출국은 국가기밀 보호에 큰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 민주노총,전교조,4대강범대위 - 원세훈 국정원장 고소 민주노총, 전교조, 4대강범대위 대표자들이 지난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원세훈 국정원장을 국정원법 위반, 명예훼손, 업무방해 등으로 고소했다. 진선미 민주통합당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원세훈 원장은 이들 단체를 '종북세력' '내부의 적'으로 지목했다. ⓒ 권우성

원세훈은 왜 퇴임식 사흘 만에 미국행을 계획했나? 

하지만 국정원쪽에서는 "원세훈 전 원장이 항공권을 예약하지도 않았으며, 애초 미국 출국 계획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원세훈 전 원장조차 민주당쪽의 한 인사와 한 전화통화에서 "미국으로 출국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23일 오후 <오마이뉴스>에서 원세훈 전 원장의 자택 주변을 탐문취재한 결과, 원세훈 전 원장이 한달 전부터 이삿짐을 꾸린 정황이 포착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날(2월 24일)에 사람들이 (원세훈 원장의 자택을) 드나들면서 현관과 대문까지 비닐로 다 덮었다. 집 안이 하나도 안보이게 해놓아서 기밀서류를 옮기는가 싶었다."(60대 아주머니) 

인근에 사는 또다른 60대 아주머니도 "지난주 평일 낮에 용달차와 탑차 2대가 동원돼 이삿짐을 싸길래 좋은 데로 이사가나 보다 생각했다"고 전했다. 원세훈 전 원장이 최근까지 미국행을 위해 이삿짐을 꾸렸다는 증언이다. 이런 정황들을 헤아릴 때 원 전 원장이 진작부터 미국행을 준비해온 것만은 '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왜 원세훈 전 원장은 퇴임식을 연 지 사흘 만에 서둘러 출국하려고 한 것일까? 우선 '급박한 국면'이 작용했다. 25건의 '원세훈 지시사항'이 공개되면서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의 핵심 당사자로 자신이 지목됐고, 그로 인해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수 건의 고소·고발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그는 '피고발·고소인' 신분이 됐다. 자칫 '피의자' 신분으로 바뀔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원세훈 전 원장이 미국행을 서두른 데는 '좀 더 깊은 이유'가 있다고 짐작된다. 최근 기자와 만난 전직 국정원 직원은 "지난 대선 때 현직 직원이 '이것을 막지 못하면 민주당은 선거에 질 수밖에 없다'고 얘기했다"며 "하지만 그는 '이것'이 무엇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그는 "인터넷 댓글 공작보다 더 큰 건이 있는 것 같다고 짐작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증거인 '원세훈 지시사항'이 공개된 이후에도 새누리당과 청와대 등 여권이 줄곧 원세훈 전 원장에 침묵해왔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원 전 원장이 지난 2009년 2월 국정원장에 취임한 이후 당시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박근혜 현 대통령을 사찰한 배후로 지목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결국 그가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모종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여권이 그를 둘러싼 의혹에 침묵하거나 미국행까지 방조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검찰이 원세훈 전 원장의 출국금지를 망설였던 이유도 이러한 '원세훈-여권의 공생관계'를 의식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검찰은 진보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원 전 원장을 고소·고발하고, <오마이뉴스>에서 그의 '도피성 미국행'을 보도했는데도 23일 오전까지 출국금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원세훈 전 원장의 출국금지 조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던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검찰은 원 전 원장의 출국을 금지시킬 의지가 전혀 없었다"고 전했다. 

'침묵하던 여권'의 눈치만 보며 뒷짐지고 있던 검찰은 23일 오후 6시 이전에서야 법무부에 원세훈 전 원장의 출국금지를 요청했다. 원 전 원장의 미국행을 둘러싸고 부정적 여론이 급속하게 커져갔고, 민주통합당 등 야당이 '출국금지 조치'를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뒤늦게 조치한 것이다. 이는 오는 4월 2일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라는 일정을 정치적으로 헤아린 결과이기도 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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