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이명박 - MB정권 5년 막후스토리 [14] 4대강 사업 강행 앞과 뒤
여론 뭉개고 방송 막고…닥치고 보 건설
[일요신문] [제1089호] 2013년03월27일 09시20분

 
▲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7월 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2회 지역투자박람회 개막식을 마치고 4대강 살리기 사업관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선거 후보의 ‘핵심 공약’은 딜레마다. 그것 때문에 꼭 당선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역풍이 분다고 버릴 수는 없다. 야권은 사사건건 이 ‘핵심 공약’을 물고 늘어지고 대통령 당선자는 ‘당근’을 주며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 공약 이행의 성과는 역사가 판단할 몫이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으로선 고민이 컸을 법하다. 그래서 이명박이 선택한 것은 ‘이보 후퇴 후 일보 전진’이었다. ‘한반도 대운하’를 ‘4대강 정비사업’으로 바꾼 뒤, 여론을 살펴 추진키로 한 것. 그래도 반감은 숙지지 않았다.

2008년 5월 21일. 포항이 고향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은 경북도청에서 열린 대구·경북 업무보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국에 가보면 가장 큰 항구는 바다가 아니라 강에 있다. 그런데 강을 하수구인 양 쓰는 곳은 우리나라 말고는 없다. 이런 것을 개선해야 한다. 하지만 (여러 강의 물길을) 잇고 하는 것은 국민이 불안해하니 뒤로 좀 미루자.”

‘대운하 2단계 추진론’의 탄생은 바로 이 발언에서부터 나왔다. 주민들이 개발을 원하는 영산강과 낙동강부터 운하를 하고 나서 4대강을 정비하고, 그 뒤 여론을 봐가며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음날인 5월 22일, 이명박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해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다. 그 정도로 여론은 나빠져 있었다. 한반도 대운하를 이끌 정국 추동력은 완전히 상실된 상태. 하지만 한쪽으로는 사과하는 한이 있어도 ‘대운하’만큼은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운하’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분위기였다. 

‘대국민 홍보’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바로 그즈음이다. 장석효 당시 한반도대운하연구회 회장은 “국민이 내용을 모른다. 처음에 (명칭을) 잘 정했어야 하는데 마땅한 이름이 없었다. 별생각 없이 ‘운하’라고 이름 붙였다”며 이름 붙이기(네이밍·naming)라는 첫 단추부터 실수였다고 고백한다. 

이만의 당시 환경부 장관은 대운하 사업 논란에 대해 환경재단이 주최한 한 강연에서 “국민이 운하를 잘 몰라서 그렇다”고 밝혔다. 원래 운하라고 하는 것은 내륙에 선박의 항행이나 농지의 관개, 배수 또는 용수를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水路)를 뜻한다. 이에 이 장관은 “운하에는 기존 강에 별다른 공사 없이 배가 다니게 하는 워터웨이(waterway)와 강 양쪽에 콘크리트벽을 쌓아 만든 커낼(canal)이 있다”며 이명박의 대운하는 바로 ‘워터웨이’임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친환경 치수와 관광 개념을 앞세운 셈인데 그런 발언이 알려진 직후엔 “진작에 비상 급수, 홍수 예방, 문화·역사 관광 벨트 등을 위한 워터웨이로 이름을 붙였어야지…” 하는 아쉬움이 이명박에게 우호적인 세력에게서 새어나온다. 이명박은 2008년 10월 정부가 제시한 100대 국정 과제에서 ‘대운하’를 아예 빼기도 했다. 

임기 첫해를 ‘쇠고기 파동 정국’으로 보낸 이명박은 임기 둘째 해 ‘녹색 뉴딜’ 카드를 꺼내 든다. 2009년 첫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서다. 하지만 누가 봐도 ‘녹색’보다는 ‘뉴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친환경적이라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에 힘쓰겠다는 의지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단연 4대강 정비 사업이 뉴딜의 첫 정책으로 꼽혔다. 

사실 4대강 사업은 정부가 경기 부양을 언급할 때마다 단골로 나온 사업이었다. 2008년 12월 균형발전위원회에서 지역 경제 활성화 대책으로 거론되더니 한국형 뉴딜 정책 10대 프로젝트에 포함되면서 재등장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4대강 유역 정비로 ‘위장’한 대운하 건설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지역 경제는 토목 공사가 아니라 교육과 복지를 통해 기반부터 닦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이명박은 2009년 신년 국정연설에서 “4대강 살리기는 재해 예방, 환경 보전, 수량 확보, 수질 개선, 관광 산업 진흥 등 다목적 효과가 있다. 28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여기에다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지역 발전’이라는 명분을 넣는다. 수도권이 반대하니 지역 여론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었다. 지역 개발, 땅 개발을 원하는 전라도와 경상도 일부에서 이명박의 ‘4대강 사업’에 우호적인 여론이 퍼지기 시작한다. 

‘뉴딜’에만 쏠리는 비판을 돌파하고자 이명박이 내놓은 카드가 바로 ‘자전거’였다. 친환경적 교통수단인 자전거, 그리고 4대강을 잇는 자전거 길, 이명박은 ‘바로 이거다’ 무릎을 쳤다. 

▲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전혜숙 민주당 의원이 4대강 주변 유적지에 대해 질의하고 있다. 일요신문 DB

2009년 5월 3일. ‘대한민국 자전거 축전’ 폐막식에서 이명박은 “우리의 IT 기술과 부품소재 개발 잠재력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차세대 자전거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뜬금없는 ‘자전거 선진국’ 발언에 자전거 동호회 회원들조차 고개를 갸우뚱한다. 인터넷에서는 “왼쪽 페달 없애고 왼쪽 핸들 안 돌아가는 ‘명바이크’가 탄생하는가” “MTB(산악용 자전거)는 MB가 타는 산악용 자전거?” 등등 ‘자전거 선진국’에 대한 비아냥과 자조 섞인 댓글이 줄을 잇는다. 이명박은 그전에도 “전국을 자전거 길로 연결하겠다” “자전거 시대를 열겠다”고 외치면서 자전거는 녹색성장의 동반자이자 녹색뉴딜 사업의 핵심이라고 밝혀 왔다. 하지만 모두가 “결국 4대강 사업을 미화하기 위해, 포장하기 위해 자전거 정책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품었다. 자전거 선진국은 출퇴근이나 등하교를 자전거로 할 수 있게 해야지 레저용 길부터 만드는 것은 후진국적 발상이라는 따끔한 지적도 나왔다. 

2009년은 ‘4대강 의혹’으로 점철됐다 해도 과언 아니다. 국정원이 4대강 정비 지역 현장 탐방에 나서 주민들의 여론을 청취한 것을 두고 ‘국정원 개입’ 논란이 인다. 그런데 현장 탐방 뒤 아무 결과가 없자 주민들이 청와대 앞으로 시위를 가려 했고, 그 사이에 국정원이 “그러다 (정부에) 밉보일 수 있다”고 회유하면서 일종의 협박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사실 국정원은 대공, 대정부 전복, 방첩, 대테러, 국제범죄조직 등에 대해서만 직무상 정보수집에 나선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당시 “4대강 살리기 사업과 관련해 정보를 수집하고 작성, 배포하는 것은 국정원 고유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명백한 위법”이라고 주장했다.  

22조 원이라는 대규모 국책공사를 초고속으로 1000일 안에 마무리한다는 것도 도마에 올랐다. 매일 220억씩 들어가는 사업을 ‘초법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2008년 12월 4대강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기공식을 가지더니, 2009년 2월 국토해양부가 정부합동 4대강 살리기 기획단을 발족, 4월 말 마스터플랜에 대한 중간 용역보고회가 열렸다. 그리고 6월 초에 최종 마스터플랜이 발표된 것이다. 

그해 6월 국회에서 열린 4대강 살리기 사업 마스터플랜 간담회에서 민주당 측 보좌관이 국토해양부 측에 법적인 절차를 묻자 4대강살리기추진본부 측은 “모든 절차를 따르게 되면 목표 기한 내에 사업을 마칠 수 없다”고 답한다. 결국, 핵심 공약을 ‘법 위에서’ 이뤄내겠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불법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다. 게다가 기획재정부 장관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대규모 사업에 예산을 주려면 미리 예비타당성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뒤로 하고, 기본적인 ‘예타’ 조사도 벌이지 않았다. 

그해 8월 17일은 대한민국 언론의 후진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날이기도 했다. MBC <PD수첩>이 ‘4대강 수심 6m의 비밀’을 방영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구린 구석이 있었는지 국토해양부는 서울남부지방법원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기각되면서 시청자들이 몹시도 궁금해 했다. 그런데 방송 3시간 전, 김재철 MBC 사장과 경영진은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는 이사들이 ‘사전 시사’를 요구했는데 제작진이 불응했다”며 ‘방송 보류’를 결정한다. ‘김재철’이라는 이름이 지금껏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는 신호탄이었다. MBC 사장을 역임했던 당시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법원에서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거부한 것을 경영진이 방송 보류 결정을 한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부끄러워했다. <PD수첩>팀이 보여주려 했던 것은 4대강 정비 사업이 대운하를 위한 포석이라는 의혹에 휩싸인 이유, 4대강 정비 사업 지역과 고질적인 물 부족 내지는 홍수 피해 지역이 서로 다른 곳이라는 지적이었다. 

2009년 국회 국정감사도 ‘4대강 국감’으로 명명됐다. 특히 8조 원에 이르는 사업비용을 대는 수자원공사는 뺨을 있는 대로 맞았다. 수자원공사가 4대강 주변을 관광지나 주택단지로 개발하려 한다, 오히려 강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 땅장사를 부추긴다, 낙동강변에 디즈니랜드나 카지노를 건설할 것이다 등등 각종 의혹에 일일이 답해야 했다. 

청와대와 정부는 또 애매한 공기업을 끌어들여 순간의 소나기만 피하려 든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부가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를 줄이기 위해 국책사업을 공기업에 떠넘긴 편법 예산이란 비판도 제기됐다. 결국 “정부의 ‘분식회계’ 아니냐”는 비판이었다.  

국토해양부는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에 야당의 4대강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알리는 문건을 만들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이는 정부와 여당이 미리 짜고 모의 또는 공조했다는 일종의 ‘공작설’ ‘방해설’로 회자했다. 국토부가 그동안 국회에 제출한 문건과 동일한 표지양식, 편집양식, 기호, 약물, 서체, 어투가 한나라당 여러 의원실에 ‘한나라당’ 이름을 달고 퍼진 것이었다. 

그해 국감장에서는 4대강에 난도질당하던 한 초선 의원이 “이제 도산 안창호만 남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벤치마킹했고, 4대강살리기추진본부가 마스터플랜에 올려놓았던 도산 안창호의 ‘강산개조론’ 말고는 4대강을 옹호할 근거가 하나도 없게 됐다는 푸념이었다. 하지만 그 뒤 조금씩 4대강은 정비되면서 국민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간다.

최기서 언론인
 

잠깐 - 안창호 선생의 ‘강산개조론’

도산 안창호 선생은 ‘4대 민족개조론’을 주창했는데 그중 국토개조론이 있다. 1919년 상해에서 도산 선생은 연설에서 “우리 한국의 모든 것을 다 개조해야 하겠소. 심지어 우리 강과 산도 개조해야 하겠소. ‘강과 산을 개조해 무엇 하나?’ ‘이 급하고 바쁜 때에 언제 그런 것들을 개조하나?’ 하시리다 마는 그렇지 않소. 강과 산을 개조하고 아니하는 데 얼마나 큰 관계가 있는지 아시오. 강과 산을 개조해 산에는 나무가 가득히 서 있고, 강에는 물이 풍만하게 흘러간다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행복이 되겠소. 산과 물을 그대로 자연에 맡겨 두면 나무가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릅니다. 홍수가 넘쳐서 강산을 헐고 묻습니다. 강산이 황폐하면 민족도 약해집니다”라고 부르짖었다. 이명박의 ‘4대강 사업’이 과연 이 정신을 얼마나 실천에 옮겼는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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