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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혼,고구려는 지금 ⑺] 첫 발견 정영호 단국대 박물관장
국민일보 | 기사입력 2005-02-22 23:35 | 최종수정 2005-02-22 23:35

중원고구려비를 처음 조사했던 정영호 단국대박물관장(71)은 18일 “비석을 첫 발견했던 식목일 즈음이면 요즘도 매년 충주에 내려가 중원비가 전하는 이야기를 음미해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정 관장이 몸담았던 단국대 학술조사단은 1979년 4월5일 충북의 향토문화재단체 예성동호회 제보로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의 마을회관 앞에서 ‘칠전팔기’라는 입석과 나란히 세워진 석비를 발견했다. 오랫동안 방치돼있던 비는 사면에 이끼가 가득 끼어있어 조사단원 25명이 5시간 넘게 뜨거운 물을 붓고 이끼제거 작업을 한 뒤에야 첫 탁본을 뜰 수 있었다. 유적조사를 알리는 고유제를 지내던 중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정순택(여)씨가 달려와 “시할머니부터 자신까지 3대가 아들을 낳기 위해 이 석비에 기도하고 득남했다”며 절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첫 탁본지를 손에 든 조사단의 교수진은 ‘전부대사자’ ‘하부’ 등 고구려 관등이 적혀있고 광개토대왕비에 언급된 ‘고모루성’이 눈에 보이자 고구려비가 아니냐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고구려’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아 모두 가슴을 졸였다. 2시간 넘게 탁본지를 보던 정 관장 눈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정 관장은 고구려 관등과 고려대왕 명문 외에 이 비석이 한강 유역에서 500∼600m 떨어진 입석마을에 세워진 점,신라와 형제관계를 강조하는 내용을 볼 때 고구려가 남방 진출 거점에 세운 접경비라는 해석을 내리고 이를 발표했다.

정 관장은 실제 이 마을에는 이 비석이 일종의 경계였음을 알려주는 전설 두 가지가 전해왔다고 말했다. 조선 숙종이 이곳을 지나다 ‘전의이씨’에게 이 비를 기준으로 안쪽 밭과 논을 하사했다는 이야기와 한 경상감사가 순직해 서울로 운구하던 중 이 입석 부근에서 움직이지 않아 근처에 산소 자리를 잡자 비로소 관이 움직였으며 왕은 그 공로로 중원비를 경계로 땅을 하사했다 내용이다.

중원고구려비는 1972년 전국을 강타한 대홍수때 하마터면 영영 역사에서 사라질 뻔 했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물에 잠긴 마을을 복구한 뒤 비석을 일으켜 세우고 칠전팔기 정신으로 단합했다는 의미로 구호비를 세웠다. 정 관장은 “만약 이 입석이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면 중원고구려비는 디딤돌 석재로 영영 사라졌을 것”이라고 회한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중원고구려비가 역사의 상징물로 힘겹게 살아남아온 데 비해 우리는 이 비를 너무 홀대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강주화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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