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21045

전우치는 왜 불행한 최후를 맞았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전우치>, 첫 번째 이야기
13.01.04 10:04 l 최종 업데이트 13.01.04 10:04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전우치>의 전우치(차태현 분). ⓒ KBS

KBS 드라마 <전우치>에서 코믹한 도사로 등장하는 전우치(차태현 분)는 16세기의 실존 인물이었다. 그는 유명한 도사였지만, 마술사 같은 행적도 남겼다.   

인조 쿠데타 뒤에 광해군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역모죄로 몰려 죽임을 당한 어우당 유몽인. 그가 지은 책이 유명한 <어우야담>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전우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희한한 쇼를 보여주었다. 아래 내용은 원문을 발췌해서 요약한 내용이다. 

"전우치는 노끈을 공중에 던져 수직으로 세운 뒤, 사람을 시켜 노끈을 잡고 올라가도록 했다. 노끈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갔다. 잠시 뒤, 공중에 올라간 사람이 천도복숭아를 많이 따서 아래로 던졌다. 그러자 사람들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복숭아를 집어먹었다. 

얼마 안 있어, 복숭아는 안 떨어지고 붉은 피가 철철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당황해하자, 전우치는 "상제께서 (공중에 올라간) 저 사람을 죽였다"고 말했다. 잠시 뒤, 공중에 올라간 사람의 육신이 이리저리 찢겨 토막 상태로 떨어졌다. 

다들 기겁을 하고 있을 때, 전우치는 시신 토막을 부지런히 접합했다. 그러자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 부활한 사람은 일어나서 비틀비틀 걷다가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마술 쇼를 펼쳤던 전우치 

이 기록은 얼핏 보면 거짓말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과장은 있겠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마술을 묘사하는 기록이다. 유사한 장면은 TV에서도 구경할 수 있다. 여성을 상자 속에 넣은 뒤 몸을 잘랐다가 다시 접합하는 장면은 마술 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전우치는 도사였지만, 이처럼 마술 쇼도 보여주었다.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의 '전우치' 편에 따르면, 전우치는 어렸을 때 한동안 사찰에 기거했다. 시험 준비를 위한 글공부 때문이었다.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시험을 준비했다는 점이나 집에서 노비를 두었다는 점을 보면 그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스님이 그에게 심부름도 시키고 꾸짖기도 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는 절에서 일종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글공부를 했던 것 같다.


▲  눈 내린 사찰의 풍경.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사의 경내 풍경. ⓒ 김종성

나중에 한양에서 하급 관원 생활을 했지만, 전우치는 이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이는 절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절에서 시험공부만 한 게 아니었다. 그곳에서 도술도 공부했다. 

전우치는 스승 없이 도술을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우가 선물해준 술법 서적을 통해 도술을 배웠노라고 말했다. 이것은 스승 없이 독학으로 도술을 배웠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스승이 있었다면, 여우 덕분에 배웠다는 소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양 생활을 접고 개성에서 도사 생활을 한 전우치는 선비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이는 단순히 마술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우, 당시의 도사들은 신선교(신선도) 지도자도 겸했다. 전우치도 그런 이유 때문에 명성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선비들의 시나 글에서 신선이니 선녀니 도원(桃園)이니 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 유학자들은 유교뿐만 아니라 신선교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신선교를 거부하면서도,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어우야담>에 허균(1569~1618년)과 동시대의 인물인 한무외라는 선비가 등장한다. 그는 평안도 영변 지역의 향교에 근무하는 곽치허라는 선비한테서 신선교와 방술을 배웠다. 유교 교육기관인 향교에 근무하는 선비가 또 다른 선비에게 신선교와 방술을 가르친 것이다. 

일부 선비들 사이에서 신선교의 인기가 높았던 이유 중의 하나로서, 유교·불교에 비해 신선교가 장수나 건강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선비들 사이에 신선교에 대한 수요가 있었기에, 전우치의 명성이 그들 사이에서 퍼진 것으로 보인다. 

전우치의 명성을 입증하는 일화가 많다. <어우야담>에는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송기수가 그에게 "매번 책 속에서 선생님의 존함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또 신숙주의 손자인 신광한도 그를 정성스럽게 대했고, 황해도 재령군수인 박광우도 숙식을 제공하면서 가르침을 청했다. 

신선교 탄압과 전우치의 불행한 최후 


▲  신선교 의식이 거행된 장소인 참성단의 모습을 담은 우표. 서울시 중구 충무로의 우표박물관에 전시된 사진. ⓒ 김종성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지만, 전우치가 불행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시대가 신선교에 대한 유교의 공세가 최종 국면에 달한 16세기였다는 점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개인적으로 그를 좋아했지만, 정권에 참여한 유학자들은 유교 이외의 것들을 근절할 목적으로 신선교를 탄압했다.

<세조실록> 및 <예종실록>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이전인 15세기에 조선 정부는 유교의 요구에 따라 신선교와 고조선에 관한 서적을 대거 몰수한 적이 있다. 고조선에 관한 서적까지 금지한 것은 고조선의 국교가 신선교였기 때문이다. 

15세기에 뒤이은 16세기에 신선교에 대한 탄압은 최종 국면에 도달했다. 향촌을 유교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규범체계인 향약이 전국 각지에 보급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16세기는 유교가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총공세를 펼친 시대였다. 

이런 시대였기에 전우치의 삶은 평탄할 수 없었다. <어우야담>에 따르면, 정부에서는 그의 도술이 해괴하다는 이유로 체포령을 내렸다.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재령 군수 박광우에게도 "전우치를 붙잡아 두라"는 황해도 관찰사의 비밀 편지가 하달됐다. 

박광우가 상부의 편지를 받고 머뭇거리자, 전우치는 자신에 관한 일임을 직감했다. 박광우는 숨겨주려 했지만, 전우치는 "나한테 방도가 있네"라며 거부했다. 그날 밤, 그는 스스로 목을 맸다. 도사의 길을 걷던 한 지식인이 유교 중심의 사회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언제 썼는지는 모르지만, 전우치는 이런 시를 지었다. 앞부분은 생략하고 끝부분만 소개한다. 

"도마뱀이 용을 조롱하니 진짜 용이 부끄럽다.
산인(山人)이 소매를 치켜 올리고 일찍 돌아가니,
계수나무 붉은 절벽, 풍경이 좋구나."

도마뱀이 용을 알아보지 못하고 용을 조롱하는 세상. 세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을 조롱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전우치도 마음껏 조롱했다. 그는 소매를 치켜 올리고 산속으로 되돌아가 자기만의 세상에 푹 빠졌다. 

전우치 같은 16세기 도사들의 몰락과 함께, 조선 신선교는 결정적인 쇠락의 길로 빠져 들었다. 전우치의 죽음은 그런 상징성을 띠는 것이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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