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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7>제19대 광개토대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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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비』에는 심각한 논쟁의 가운데에 있는 구절이 있다. 이른바 '신묘년조'.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속민(屬民)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건너와 백잔을 파(破)하고 (2字缺) 신라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기록은 사실이 아니다. 그 동안 우리와 일본 사이에서는 주로 글자가 분명하지 않아서 논란이 되던 신묘년래도해파 어쩌고저쩌고 하는 구절 앞부분, '백잔과 신라가 옛날부터 속민으로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왔다'는 말은 이상하게도 아무도 의심을 갖지 않았다.(실상 이것부터 문제가 됐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실 신라는 어떨지 몰라도, 백제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친 적이 없다. 언제부터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는데? 속민은 고사하고, 툭하면 '한판 뜰래?' 하고 고구려에게 기어오르던 것이 바로 이 백제라는 놈이다.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까지 쳐들어가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을 죽인 것이 372년경의 일.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사실을 갖고 첫운을 떼면서 시작한 문장인데 뒷부분이 사실일 리가 있나. 일본쪽에서야 소위 '임나일본부' 운운하면서 그 증거자료로 『능비』 신묘년조를 내세웠지만, 사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느니 하는 서두부터가 고구려쪽이 백제를 깎아내리려 갖다바른 수식어였다.

 

역사란 원래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기 마련이라 했다. 고구려라고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저 비석은 어디까지나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칭송하고 한껏 찬양하기 위해서 세운 것, 말이야 바른말로 태왕의 정복전쟁은 대부분 백제와 벌인 것이 대부분이다.(말하자면 백제는 태왕의 샌드백이었다는 거지.)신라나 왜 같은 경우는 번듯하게 자기들이 쓰던 국호를 써주면서, 굳이 백제만 '백잔(百殘)'이라고 쓴 것도 다 이유가 있다. 풀이하자면 '백제 떨거지들'이라는 뜻인데, 이 비문을 쓴 사람이나 아니면 이 비문과 관련된 사람이 백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있었으니 그런 말을 거침없이 쓸수 있었던 거다.(단순히 어느 왕가의 자화자찬이 아니라, 백제에 대한 분노 자체가 고구려 사람들 대부분의 공통된 정서였다.) 백제에 대해 자꾸 언급하다보면 상대적으로 백제가 얼마나 대단한 세력이었는지 은연중에 선전해주는 꼴이 될까봐, 차라리 백제를 어떤 식으로든 깎아내려서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것, 『능비』의 기본 제작 방침이었다.

 

전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무렵의 백제는 한반도 안에서 고구려와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라는 천혜의 요새를 가지고, 동쪽으로는 금관가야나 왜와도 남방해양동맹을 맺고 신라를 압박하며, 저너머 요서와 산동 지역에까지 진출해 그들의 군현을 설치하기까지 했던 강대한 나라가 바로 백제. 그런 백제에게 국가 원수 한 사람을 잃기까지 한 고구려로서는 백제에게 이를 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구려 국왕의 행차 장면. 안악 3호분 대행렬도 중에서.>

 

영락 6년 병신. 태왕은 드디어 백제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六年丙申, 王躬率▨軍, 討伐殘國.]

6년 병신(396년)에 왕께서 친히[躬] 군을 이끌고 잔국(殘國)을 토벌하셨노라.

『광개토태왕릉비』

 

비문에 나오는 태왕의 무훈은 크게 두 가지로 표현된다. '왕이 친히 이끌고[躬率]'와 '명령으로 파견[敎遣]'. 1973년을 전후해 일본 학자들이 논의한 '합리적' 해석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태왕의 무훈은 하나도 빠짐없이 '왕이 직접 이끌고' 아니면 '명령으로 파견하여'라는 대조적인 두 가지 표현 가운데 하나를 상투적으로 써먹고 있다는 것. 정벌전쟁에 군사를 지휘한 것이 태왕 자신이냐 아니냐에 차이가 있다. 특히 '왕께서 친히 이끌고'라는 구절 앞에는 꼭, 태왕이 직접 군사행동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꼭 삽입되어 있는데, 비려족을 치던 영락 5년과 6년, 그리고 14년(404)과 20년(410)은 이런 식으로 해당 국가의 사정과 '태왕이 정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열거하고서 태왕이 직접 전투 일선에 나서도록 구문이 짜여져 있다. 흔히들 말하는 '전치문'이다.

 

[軍▨▨首, 攻取寧八城, 臼模盧城, 各模盧城, 幹氐利城, ▨▨城, 閣彌城, 牟盧城, 彌沙城, ▨舍蔦城, 阿旦城, 古利城, ▨利城, 雜珍城, 奧利城, 勾牟城, 古模耶羅城, 頁▨▨▨▨城, ▨而耶羅城, 瑑城, 於利城, ▨▨城, 豆奴城, 沸▨▨ 利城, 彌鄒城, 也利城, 太山韓城, 掃加城, 敦拔城, ▨▨▨城, 婁賣城, 散那城, 那旦城, 細城, 牟婁城, 于婁城, 蘇灰城, 燕婁城, 析支利城, 巖門▨城, 林城, ▨▨▨▨▨▨▨利城, 就鄒城, ▨拔城, 古牟婁城, 閏奴城, 貫奴城, 彡穰城, 曾▨城, ▨▨盧城, 仇天城, ▨▨▨▨▨其國城.]

군이 ▨▨하여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성, 각미성(閣彌城),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사조성,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리성,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혈▨▨▨▨성, ▨이야라성,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 ▨▨성, 두노성(豆奴城), 비▨▨리성,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성, 누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암문▨성, 임성(林城), ▨▨▨▨▨▨▨리성, 취추성(就鄒城), ▨발성,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증▨성, ▨▨노성, 구천성(仇天城) … 등을 공격하여 차지하시고[攻取], 그 수도[國城]를 … 하셨노라.

『광개토태왕릉비』

 

알수 없는 글자가 상당히 많아 그 의미를 제대로 알수 없지만, 태왕의 군대가 아리수를 건너 백제의 수도까지 압박했고, 겁을 먹은 백제왕이 나와서 항복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골자다.

 

[殘不服義,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歸穴▨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跪王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迷之, 愆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잔(殘: 백제)이 의(義)를 따르지 아니하고 감히 나와서 싸우니, 왕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遣刺] 그 수도[城]에 육박하셨노라. 곧 그 성을 포위하시니 잔주(殘主)는 궁지에 몰려[困逼], 남녀 포로[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1천 필을 바치며 왕께 항복하며 맹세하였다.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이 되겠나이다."

태왕께서는 전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시고, 나중에나마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여,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셨다.

『광개토태왕릉비』

 

태왕이 백제에 대한 전쟁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인의(仁義)의 구현이었다. 『능비』는 백제를 '잔인무도한 나라'라는 뜻의 '잔국(殘國)', 아신왕을 '떨거지 왕초'라는 뜻의 '잔주'로 얕잡아 부르고 있다.(전쟁책임을 모두 백제에게 돌리는 듯한 발언이다.) 맹자는 "인(仁)을 해치는 것은 적(賊), 의(義)를 해치는 것은 잔(殘)이다."라고 했다. '인의 실질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이요, 의(義)의 실질은 곧 형(兄)에게 복종하는 것'이 맹자가 말한 인의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로, 같은 부여계에서 갈라져나온 고구려와 백제를 전통적인 형제관계로 규정하면서, 형(고구려)의 말을 듣지 않는 동생(백제)에게 '어쩔수 없이' 맴매했다는 것이 전쟁의 명분. 고구려야말로 하늘의 자손이자 부여계 왕통의 적자라는 고유의 천손사상에, 맹자의 인의사상에 입각한 유교적인 '왕도정치론'이 결합되어 태왕의 남정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잔주, 백제왕이 저지른 앞서의 잘못ㅡ그것은 고국원왕의 일일 터. 선대 근초고왕의 군대가 지금의 고구려처럼,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까지 육박해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그때의 일을 우리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이제 너희에게도 똑같이 되갚아주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서 태왕은 백제의 58성 700촌, 백제왕의 아우와 백제의 고위 대신 10명을 '전리품'으로서 인질 비슷하게 붙잡아 수도로 개선한다.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역사에서 다시 없을 대승의 기록이다.

 

선미실도(先迷失道) 후순득상(後順得常)이라. 처음에는 좀 개념이 안 잡혀서 까불었지만 나중에나마 머리 팍 숙여서 사죄하는 것을 보니 기쁘도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한다면 이런 일이 왜 있으리오.(웃기고 있다ㅍ) 태왕이나 그의 업적을 비석에 새긴 고구려인들은 중국과의 전쟁 승리보다도 백제와의 전쟁 승리에 좀더 점수를 매긴 것일까.

 

<안악 3호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의 군대>

 

태왕의 정복전 대부분은 백제와 관련된 것이 많다. 『능비』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획득했다는 소위 58성의 이름을 친절하게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비록 마모된 글자가 많아 확인할 수 없는 것도 더러 있다만) 마모되어 이름을 알 수 없는 성들을 빼고 그 이름들을 나열해보면

 

영팔성(寧八城)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간저리성(幹氐利城)

각미성(閣彌城)

모로성(牟盧城)

미사성(彌沙城)

아단성(阿旦城)

고리성(古利城)

잡진성(雜珍城)

오리성(奧利城)

구모성(勾牟城)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

전성(瑑城),

어리성(於利城)

두노성(豆奴城)

미추성(彌鄒城)

야리성(也利城)

태산한성(太山韓城)

소가성(掃加城)

돈발성(敦拔城)

누매성(婁賣城)

산나성(散那城)

나단성(那旦城)

세성(細城)

모루성(牟婁城)

우루성(于婁城)

소회성(蘇灰城)

연루성(燕婁城)

석지리성(析支利城)

임성(林城)(헥헥;;)

취추성(就鄒城)

고모루성(古牟婁城)

윤노성(閏奴城)

관노성(貫奴城)

삼양성(彡穰城)

구천성(仇天城)

 

등이다. 재미있는 건 이 58개나 되는 성들이 영락 6년이라는 그 1년 동안에 모두 얻은 성은 아니라는 거. 그리고 저 성들이 모두 뼈빠지게 피터지게 공격해 얻은 성도 아니라는 것. 나는 몰랐는데 '공파(攻破)', '공취(攻取)', '득(得)'은 서로 다른 개념이란다.『능비』 영락 6년조의 마지막 구절 가운데 "이에 58개의 성과 7백 개의 마을을 얻었다[是得五十八城村七百]"라고 말한 것은 백제의 고구려에 대한 항복 결산이자 댓가로, 고구려에게 강제로 할양당한 성들이라는 것. 연호에 대한 의심이 가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영락 6년이 태왕 6년이라면 이 해는 고구려와 백제의 30년 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간 역사적인 해다.

 

즉위하자마자 백제와의 전쟁을 벌여 석현성을 비롯한 10개의 성을 빼앗고, 이듬해에는 백제 서북변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함락시켰지만 백제는 굴하지 않고 다시금 고구려를 공격해왔고 관미성을 돌아 곧장 남평양과 가까운 수곡성까지 쳐들어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마침내 고구려군은 수륙 협공으로 백제의 왕성을 압박했다. 아신왕이 항복해오자 태왕은 아신왕의 아우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앞장섰던 열 명의 대신, 그리고 백제 왕성과 가까운 위치의 중요한 요새ㅡ남한강 일대의 58성과 700촌을 요구했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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