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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8>제19대 광개토태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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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이 백제를 정벌해 '노객의 맹서'를 받아낼 때도 부여는 건재했다.

 

[五月, 辛亥, 以范陽王德為都督冀ㆍ兗ㆍ靑ㆍ徐ㆍ荊ㆍ豫六州諸軍事ㆍ車騎大將軍ㆍ冀州牧, 鎭鄴. 遼西王農爲都督並ㆍ雍ㆍ益ㆍ梁ㆍ秦ㆍ涼六州諸軍事ㆍ并州牧, 鎭晉陽. 又以安定王庫辱官偉爲太師, 夫餘王為太傅.]

5월 신해에 범양왕 덕(德)을 도독 冀ㆍ兗ㆍ청(青)ㆍ서(徐)ㆍ형(荊)ㆍ豫 6주제군사(六州諸軍事)ㆍ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ㆍ冀州牧으로 업(鄴)을 지키게 했다. 요서왕 농을 도독 병(並)ㆍ雍ㆍ익(益)ㆍ양(梁)ㆍ秦ㆍ양(涼) 6주제군사ㆍ병주목(并州牧)으로 진양(晉陽)을 지키게 했다. 또한 한정왕(安定王) 庫辱官偉하여 태사(太師)로 삼고, 부여왕은 태부(太傅)로 삼았다.

《자치통감》 권제108, 진기(晉紀)제30,

열종효무황제(烈宗孝武皇帝) 하(下), 태원 21년 병신(396)

 

이때 부여왕의 이름은 여울(餘蔚)로 앞서 영양태수로 임명되었다가 이번에 태부가 되었다. 부여, 넌 대체 뭐냐;;; 도대체 뭐하러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니 참.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愼土谷, 因便抄得. 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朝貢, 論事.]

8년 무술(398)에 교(敎)하여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해 백신(帛愼)의 토곡(土谷)을 관찰하고 이로 인하여 또한 순시하였다. 그 때에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3백여 명을 잡아왔더니, 이 이후로는 조공하고 보고하면서 함께 일을 논했다[論事].

『광개토태왕릉비』

 

백신. 그것은 숙신 즉 말갈(예맥)이다. 이미 추모왕 원년에 정벌당한 일이 있는 말갈은, 영락 8년에 이르러 또다시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남녀 3백여 명이 수도로 잡혀온다. 무슨 성인지는 모르지만 가태라곡이라는 곳의 주민들은 고구려에 지극히 반항적인, 보수 우익들 식으로 말하면 '불순반동분자' 쯤 되는 것들이었다. 이들을 잡아서 끌고 온 뒤로는 숙신이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조공도 꼬박꼬박 바치게 되었다는데, 숙신족의 입장에서 보면 담덕왕도 결국 다른 나라의 무자비하고 폭압적인 독재자, 전제군주나 다를 것이 없었다.

 

[九年,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9년(399) 봄 정월에 왕은 연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흔히 고구려를 가리켜 '제국'이라고 부르고 태왕을 가리켜서 '대제(大帝)'라고 부른다. 태왕의 업적도 분명 우리 역사에서 볼 때 '위대한' 업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태왕을 가리켜서 '황제'니 '폐하'니, 짐이 어떠니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역사왜곡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영락태왕의 후연 조공기사다. 사실 태왕은 살아 생전에 딱 한 번 조공을 했고 이게 바로 그 유일한 태왕조의 조공기사지만, '조공'을 바친 이상 형식적으로는 후연과 동등할 수가 없다. 황제는 조공을 받기만 하지 바치는 존재가 결코 아니니까. 우리 나라에서 고대사를 다룬 사극들이 많아지면서, 고구려나 백제, 신라도 고려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왕내제(外王內帝)'의 형식으로 겉으로는 중국이 요구하는 조공을 바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왕을 가리켜 황제라고 칭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지,실제로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2월에 연왕 성(盛)이 우리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며 스스로 3만 군사를 이끌고 습격했는데,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과 남소성(南蘇城)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백여 리의 땅을 넓혀, 5천여 호를 옮겨놓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9년(399)

 

《삼국사》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나 백제의 왕들은 모두 스스로를 '고(孤)'나 '과인(寡人)'으로 칭하는데(중국이나, 고려 때에는 황제가 자신을 칭할 때에 '짐朕'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왕들은 간간이 '짐(朕)'이라고 칭하는 것이 보인다. '오(吾)'나 '아(我)'도 있다. 신라 중심적 사고방식에 물든 노망난 노인네가 제멋대로 호칭을 바꿔버렸겠지 싶기도 한데 그럴 거였으면 '거서간'이니 '차차웅'이니 하는 신라의 왕호들을 그대로 놔뒀을 리도 없다. 무엇보다 『능비』에서도, 이 고구려 당대인들의 금석문에 나오는 칭호들을 살펴봐도 천자국에서 쓰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김부식 영감이 멋대로 기록에 손을 댔다는 설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능비』 안에서 왕이 명령하는 것을 가리켜서는 '교(敎)'라 했고,(황제가 내리는 명령은 '칙勅' 아니면 '조詔') 추모왕이 하늘로 승천하는 부분을 묘사할 때도 추모왕의 뒤를 이은 유류왕을 '세자(世子)'라고 했다. 이 당시 고구려가 안으로나마 천자를 자처했다면 분명 '태자太子'라고 불렀겠지.(여담이지만 《삼국사》에서는 시종 '태자' '왕태자'라는 단어만 등장한다.)

 

발해나 고려에서 자국의 왕을 가리켜 '황제'라고 칭했던 것은 『정혜공주묘지명』, 『정효공주묘지명』 등의 발해 금석문에 나오는 '황상(皇上)'이나, 《고려사》 및 고려 묘지명에 나오는 '해동천자(海東天子)'라는 단어를 놓고 보면 미루어 짐작할수 있지만, 『능비』에서는 괴이하게도 그런 식의 '칭제(稱制)'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당시로서는 '제후국'에 준할 만한 용어들을 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광개토태왕처럼 스스로를 왕중의 왕인 '태왕(太王)'이라 칭하며, 천자국에서나 쓸수 있는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당당히 썼던 위대한 정복군주께서 제후국의 제도를 쓴다는 건 한 마디로 '깨는' 일이다.

 


리들이 말하는 소위 '천자국 제도'의 용어들은, 중국에서도 진(秦)의 시황제 때에 만들어졌다. 소위 진시황제의 '천하통일' 이전에는 중국에서도 그들의 통치자를 '왕(王)'이라 불렀다. 중국 고대 3대라 불리는 하(夏)ㆍ은(殷)ㆍ주(周)의 통치자들 때부터. 그때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제후국'들의 용어가 바로 천자국의 제도였다. '왕'이라는 글자 자체가, '권위'를 상징하는 '도끼[斧]'를 들고 다스리는 자를 뜻하는 갑골문자의 모양이 변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조금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셋[三]'에 '하나[一]'가 결쳐진 글자, '하늘과 땅과 사람[三]'을 아우르는 '유일무이[一]'의 존재. '왕'이란 글자 자체가,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황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께서는 '주'라는 나라에 대해 거의 '동경'에 가까운 환상을 갖고 계셨달까, 그분은 주의 통치자를 가리켜 '천왕(天王)'이라 불렀다. 하늘의 군주라는 뜻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왕'은 '신성함'의 대명사로서 누가 쓰고 싶다고 쓰는 것이 아니었다. 은의 '탕왕'도 그러했고, 주의 '문왕'이나 '무왕'도 그러했다. 대신 그 무렵 천자 아래의 제후들은 '공후백자남(公候伯子男)'이라고 해서 '~~공(公)', '~~후(候)'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춘추시대 강력한 왕조라 불렸던 소위 '춘추 5패(覇)'의 군주들도 마찬가지. 조선이 명에 대해서 사대외교(굳이 안 해도 될 뻘짓)를 하면서, '제후국으로서 천자국의 제도를 감히 어떻게 쓰겠는가' 이러고는 자국 통치자를 '왕'이라고 불렀듯, 주(周)의 힘이 쇠약해져 여러 제후들이 난립했던 그 춘추시대 제후들도 '명목상'의 천자국인 '주'를 의식해 그 주에서 쓰는 '왕'이란 칭호를 감히(?) 대놓고 쓰지는 못하고 '~~공'이니 '~~후'니 하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전국시대에 이르러 서로 죽이고 죽이는 '약육강식' 전쟁의 시대가 오게 되자 '때는 왔도다'하고 일곱 나라가 앞다투어 '~~왕'이라고 쓰게 된 것인데, 그 일곱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진이, 법가 사상에 기반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여섯 나라를 무력 병합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다.(BC.221) 전국시대를 끝낸 진왕 영정은, 자신이 여섯 나라의 왕을 자기 발밑에 두었으니 앞서의 여섯 왕들과는 차별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통일도 했으니 공적은 고대 중국 전설상의 성군, '삼황오제(三皇五帝)'와도 맞먹는다는 자만(?)에 가까운 자부심을 보였다. 그렇게 자신이 어떤 '왕'들과도 비교할수 없는 높은 자라는 뜻에서 고대에서부터 써오던 '왕'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어냈다. 이걸 중국에서도 그가 최초로 썼기에 처음 '시(始)'라는 글자를 앞에 붙여 '시황제'라고 부른다. 오늘날 우리가 '황제국의 용어'라고 알고 있는 '짐'이니 '칙'이니, '폐하'라는 용어들이 바로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20세기 초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에 의해 복권되기 전까지, 살아서는 '자객'의 위협에 시달렸고 죽어서는 무덤이 방화당했고, 자기 아버지까지 진왕이 아닌 여불위였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문까지 거의 3천년 동안이나 중국인들로부터 미움받았던 진시황제가 만든 '황제'의 이름이 20세기 초까지 쓰인 것은 무척 이해할수 없는 점이지만, 중요한 건 고구려에서 천자국만의 특권으로 여겨지던 '연호'를 쓰면서도 왜 다른 용어를 제후국의 그것과 같은 것을 썼느냐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중국의 세계관과는 다른, 고구려만의 독자적 세계관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아가, '황제'를 칭하는 중국의 천하관에 대한 반발. 당시의 중국 중심에서 생각하면 '왕'이라는 이름은 제후국의 것이지만, 고구려의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공자께서 찬양했던 '옛 제도', 주에서 쓰던 '제왕'의 칭호를 그냥 쓰는 것뿐이다.

 

공자의 책을 읽고, 공자께서 '태평성대'라 칭송했던 서주의 제도를 따른다면서 어떻게, 진시황제같은 '폭군'이 만든 용어를 쓸수 있겠나. 고구려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오히려 저쪽에서 '황제'라 부른다고 우리까지 덩달아 '황제'로 바꾸는 것이 더 줏대없는 짓 아닐까? 여지껏 잘 써오던 칭호를 버려가면서 말이다.(실상 황제래봤자 북방민족한테 쩔쩔매면서 산 게 고작인걸)

 

태왕이니 천손이니 하는 것을 보면, 중국과는 다른 뭔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주의 칭호를 답습하고 있긴 하지만, 그냥 왕도 아니고 '태왕'이다. 왕중의 왕이라는 뜻이다. 《삼국사》에서야 그냥 '광개토왕'이라고 했지만,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말을 놓고 보면 고구려인들의 중심은 중국 천자가 아니라 고구려의 태왕이었고, 태왕은 곧, 황제 레벨의 최고 통치자를 부르는 존칭이었다. 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으면서 자신을 '대'막리지라고 붙인 것과 그 아들 남건이 또 그 앞에 '태'자를 붙여서 '태대막리지'라고 한 것을 유치하게 생각하면 그냥 지금 애들 놀때에 내가 대장이다, 니가 대장이면 나는 대대장이다, 아니다, 나는 대대대장이다, 하고 자기를 높이는 것 같아서, 어찌보면 말장난같고 투박하고 어색하게 보여도, 모든 왕들을 지배하는 왕에게 '태'자를 붙여주는 것은 본인들에게는 상당한 자존심 표출이고 누군가에게 해줄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던 것이다.

 

천손(天孫)이라는 것도 결국 고구려인들이 자신들의 통치자에게 붙인 최고의 호칭인데, '천손'이라는 칭호를 중국 놈들이 동북공정에 인용해서 쓴다면, 저들이 하늘의 아들[天子]을 모시고 있으니 우리는 그 '하늘의 아들'의 아들[天孫]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천자'가 아닌 '천손'의 칭호를 썼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들이나 손자나 결국 같은 곁가지고, 아들보다는 손자가 좀더 아래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고구려 역사에 대해 개코도 모르는 놈이 하는 소리다. '천손'이 뭔데? '하늘의 손자'?  그렇다. 동명왕은 하늘의 손자다. 하지만 그 하늘의 손자, 그를 태어나게 한 주체가 되는 '하늘의 아들'은 중국 천자가 아니라, 하늘의 신이신 천제께서 직접 부여왕의 옛 도읍에 내려가서 노닐게 하신 그분의 아들, '천왕랑(天王郞)' 해모수다. 천제에게 해모수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의 아들이 동명왕으로서 고구려의 초대 국왕이 되어 스스로를 '천손'이라고 불렀으니,천제(父) - 해모수(子) - 동명왕(孫)으로 이어지는 연결벨트에 따라서 동명왕과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후손을 '천손'이라고 부른 것 뿐이지, 그 연결벨트 속에 중국이 개입된 부분은 어디에서도 볼수 없다.

 

그럼에도 저들이, 고구려인들이 말한 '천제'가 중국 도교에서 모시는 '옥황상제'라고 밀어붙인다면, 저들은 우리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저 하늘의 세계까지도 자기들 역사로 만들려고 하는 꼴이니 더 할말이 없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9년 기해(399)에 백잔이 맹서를 어기고 왜와 화통했다. 왕께서는 평양으로 내려가 돌아보셨다.

『광개토태왕릉비』

 

왜는 『능비』 의 무훈 기사에 등장하는 민족집단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나타난다. 비문 안에서는 태왕의 앞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왜'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 설명한 바가 있지만, 여기서 좀더 확실히 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것이 있다. '왜'를 부각시킨 것이 단순히 백제를 깎아내리는 데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앞서 『능비』에서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른,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라고 적은 비문의 왜곡된 증언을 실은바 있다. 비문 속의 '고구려 천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 주변의 민족집단으로서 '왜'가 비문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또 고구려와는 수차 전쟁을 벌였지만, 백제나 신라, 동부여와 숙신, 비려족과는 달리 왜는 토벌해서 조공을 강요할 대상은 결코 아니다. 일본측 학자의 해석이 옳을 지도 모른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더니라" 하는.

 

이런 종류의 무훈(武勳) 기사는 언제나 그 안에 등장하는 '영웅'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서술된다. 영웅이 속한 세상과 세계를 위협하는 이계(異界)의 침범자에 의해 세상의 질서는 어지러워진다. 그 속에서 영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역할과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며 극적인 반전을 가져온다. 누가 봐도 이길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상황을 이기게 만드는 반전 말이다. 『능비』에서 태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에 나서는 것은 상대집단이 고구려에 대한 '부당한 행위'를 했을 때 뿐이며(어디까지나 『능비』를 지은 고구려인들의 생각일 뿐이지만) 누가 봐도 불리하고 곤란한 상황을 태왕은 '전능한 왕'으로서 아군의 위협을 뒤엎고 막대한 전과를 올린다. 이 경우 태왕과 고구려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설정된 것들이 강하면 강할수록,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태왕의 영웅적인 활약 내지는 아군(고구려)의 질서세계나 경계가 더욱 선명하게 의식된다.

 

『능비』속에서 고구려와 태왕, 그리고 고구려에 정치적으로 예속된 신라는 아군으로서 하나의 질서를 만들고 있다. 이 질서를 파괴하려는 '악당' 백제는 이계(異界)의 존재인 왜를 끌어들이며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 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 還告以▨計.]

왕께서는 평양으로 내려가 돌아보고 계셨다. 계셨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고하였다.

“왜인이 국경에 우글거리며 성과 해자[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民)으로 삼으려 합니다. 왕께 귀의하여[歸王] 구원을 요청합니다[請命].”

태왕께서는 은혜롭고 자애로우셨다.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기시어, 신라 사신을 보내 돌아가 계책을 고하게 하셨다.

『광개토태왕릉비』

 

왜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능비』가 적어놨지만, 사실 모든 배후에는 백제가 있었다. 가야와 왜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백제가 마침내 금관가야와 왜를 끌어들여 고구려에 맞서고, 그러면서 친고구려 노선을 펴고 있던 신라를 공격하기에 이른 것. 신라는 늑대들 소굴에 홀홀단신으로 던져진 한 마리 어린 양에 불과한 존재다.

 

"모든 인간 집단은 바로 '적'을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자기 편을 찾고 자기 편을 갖는다."

독일 학자 칼 슈미트의 말이란다. 인간 사회는 자신을 '내부'이자 '아(我)'로서 확실하게 정의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위협하는(혹은 그렇게 생각되는) '비아(非我)' 침범자를 필요로 하는데, 여기선 왜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백제나 신라를 가리켜 고구려의 속민이라고 한 것과 왜를 '최대 최악의 적'으로 묘사한 것은 이런 이유다. 말했지만 고구려가 백제를 속민이라 불렀다고 백제가 그걸 받아들였냐 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백제의 동맹국으로 백제의 사주를 받아 신라를 친 왜는 오히려 고구려가 전쟁을 일으키고 신라에 원병을 보내어 백제를 때려야 하는 이유를 직간접적으로 설명해주는 효율적인 도구다.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의 속민으로 간주하는 고구려측 논리에서 그들 나라를 친 왜는 고구려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궁극적인 적을 '왜'라고 인상짓는 것은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고구려의 정치권과 질서권을 명확히 하는 것일뿐 아니라 지배공동체 내의 융합과 결속을 호소하는 것이 되고, 고구려 왕권을 강화하는 결과도 가져온다. 왜라는 외부에 의해 내부가 강렬한 형태로 환기되며 단결이 촉구되는 것. 『능비』의 왜는 아(我)와 비아(非我), 내부와 외부라는 차이를 분명히 밝힘으로서 『능비』를 읽는 독자를 질서로의 충동으로 휘모는 장치인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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