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17004

[충무공의 숨결따라] 여수-효심이 살아숨쉬는 곳
[기획특집 ①] 여수-충무공 어머니가 사시던 곳, 충민사와 석천사, 선소와 타루비
2011-06-02 14:04 | CBS문화부 김영태 기자 



올해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 466주년 되는 해이다. CBS는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충무공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기획특집:충무공의 숨결따라]를 마련했다. 여수좌수영과 한산도,거제 칠천량과 진도 울돌목, 남해 관음포 등 주요 전적지를 돌며 오늘 이충무공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그리고 어떻게 기억되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했다.[편집자 주]

1.여수 - 이충무공의 효심이 살아숨쉬는 곳   http://tadream.tistory.com/5919
2.한산도- 학익진의 승리,조선수군들의 노고  http://tadream.tistory.com/327
3.칠천량- 패배의 쓰라린 기억, 역사의 교훈삼아   http://tadream.tistory.com/5918
4-1.진도- 왜덕산, 적장후손들이 찾는 평화의 무덤   http://tadream.tistory.com/5905
4-2. 진도- 명량해전에서 쇠사슬 사용은 사실인가?   http://tadream.tistory.com/325  
5.남해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http://tadream.tistory.com/5920

◈충무공 어머니가 사시던 곳

임진왜란 중에 이충무공 어머니가 살았던 곳이 전남 여수시 웅천동(고음내, 古音川) 송현마을이다. 그분은 1593년 6월부터 1597년 4월까지 4년 가까이 사셨다. 아들며느리 방씨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2011년 5월 16일 아직 햇살이 강렬하게 비치는 늦은 오후에 그곳을 방문했다. 도로변에서 마을길을 따라 800미터 가량 들어가자 입구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큰 개 두마리가 컹컹 짖어대고, 안쪽에 낡은 시골집 한채가 자리잡고 있다. 그 집 마당을 건너 더 안쪽으로 가니, 조그만 터에 그곳이 이순신 어머니가 사시던 집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장방형 터는 관목으로 경계를 이루고,뒤쪽에 대나무 숲이 무성했다.



그곳에 유물이라고 있는 가마솥과 멧돌,절구통은 정대수가(家) 왼쪽 귀퉁이에 방치되어 있고, 그 녹슨 가마솥은 바닥에 구멍이 뻥 뚫려 있고 그 멧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30여분이 지나자 그 집에 살고 있는 주인장이 나타났다.올해 78살의 정평호씨로, 이순신 장군 휘하 군관이었던 정대수 장군의 14대손이다. 정대수 장군 역시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효자였다고 한다. 정씨 일가는 이순신 장군이 어머님을 걱정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며칠 전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닌 송현마을에 불이 났었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었다. 마을사람들이 급히 힘을 합하여 불을 껐으니 망정이지 정말 큰 변고가 날 뻔했다. 정씨네 일가가 자신들보다 어머님을 먼저 챙겨 주었다니 정말이지 그 보답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이순신은 적고 있다.

유물 석점이 고물처럼 방치돼 있는 것을 보고서 의아히 여겨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정씨에게 묻자, 이제는 이곳이 유적지로 복원될 계획이라고 한다. 정씨는 "복원 계획에 따라 이전 보상을 받았으며, 올해 안에 마무리한다고 들었다"고 "14대째 이충무공 어머니 기거지를 지켜나왔으니, 관리인으로 선임되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드러냈다.그곳에는 아름드리 팽나무보호수가 큰 가지를 늘어뜨리고 숲이 우거졌으며, 입구의 커다란 앵두나무에 싱싱하고 붉은 앵두열매들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정씨 부부는 짐칸이 달린 오토바이를 타고 큰 웃음을 지으며 들판으로 나갔다. 



이충무공은 전라좌수사 시절 좌수영본영에서 20리 떨어진 이곳에 어머니를 모셔두고,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러 왔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변씨는 충남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에서 살다가 1593년 6월에 여수로 거처를 옮긴다. 이순신이 1591년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2년 4개월만이다.1592년(임진년) 정월 초하루에 쓴 일기에 어머니를 뵙지 못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어머님을 떠나서 두 번이나 남쪽에서 설을 쇠니 간절한 회포를 이길 수가 없다." 어머니를 가까이 뵐 수 있는 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충무공이 1593년 7월 15일 한산도로 진을 옮기고, 불과 한 달 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면서 한산도 통제영에서 수군을 지휘해야 했기 때문에 여수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1594년 1월 11일에 쓴 일기에 이런 고충을 적고 있다. "어머님께 가니 어머님은 아직 주무시고 계시어 일어나지 않으셨다.웅성대는 소리에 놀라 깨어 일어나셨으나 기운이 어렴풋하시어 앞이 머지 않으신 것같다. 오직 눈물이 흐를 뿐이다. 말씀은 착오가 없으시다. 적을 치는 일이 급해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바로 다음날 일기에는 어머니의 큰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하고 두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으로 탄식하지는 아니하셨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다. 1596년 8월 12일 일기에는 모자간의 깊은 정이 듬뿍 묻어난다."종일 노젓기를 재촉하여 밤 10시경에 어머님께 이르렀더니 백발이 아주 무성하셨고, 나를 보시더니 놀라 일어나셨다. 기운이 흐려지셔서 아침 저녁을 보전하시기 어려웠다. 눈물을 머금고 서로 붙들고 앉아서 밤새도록 위로하며 어머님의 마음을 풀어드렸다." 



이순신은 1597년 2-3월 통제사 파직과 하옥을 겪고, 28일만인 4월 1일에 풀려나 백의종군 명을 받고 경상도로 향하던 중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큰 슬픔을 당한다. 선산과 집이 있는 아산에 가서 조상의 묘와 사당에 인사를 고하면서 며칠을 묶고 있던 4월 13일에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던 것이다. 그 날자 일기를 보자.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뛰어나가 가슴을 치고 뛰고 궁그니 하늘의 해도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어찌 이루다 적을 수 있으랴."여수에 머물고 있던 이순신의 어머니는 아들이 전라좌수사에서 해임되자 본가인 아산을 향해 배편으로 가던 중에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하고 4월 11일 배 위에서 임종한 것이다. 어머니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예감했던 것일까.여수를 출발할 때 관을 준비해 가지고 왔다. 4월 11일 이순신의 꿈에서도 어머니의 죽음이 예감되었다. 그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꿈이 몹시 산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매우 언짢아서 취한 듯 미친 듯 걷잡을수가 없으니, 이게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병드신 어머님 생각을 하면 쉴새없이 눈물이 흐른다. 궁금하여 종을 보내 어머님의 안부를 알아오도록 했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장사를 다 마치지 못한 채 4월 19일 길을 떠나야 했다. 이날 심경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어서 죽는 건만 같지 못하구나" 난중일기 중 노모에 관한 일기는 88일분에 이른다.

◈충민사와 석천사, 유교사당을 스님이 관리한 내력은? 
 

 
전남 여수에는 덕충동에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최초의 사액 사당 충민사가 있다.충민사 바로 옆에는 석천사가 자리잡고 있다. 유교사당과 불교사찰이 나란히 붙어 있는 이 두 곳은 한 몸처럼 인식되어 왔다. 충민사는 향교 교리로서 의병으로 참전했던 박대복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박대복은 이순신 휘하에서 7년동안이나 종군했던 의병이었다. 그는 전사한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장군이 매일같이 오르내리며 마셨던 석천수(현재 충민사 뒤편)를 찾아가 두어 칸 사당을 세운 것이 충민사의 시작이었다. 충민사 바로 옆 옥천사는 승장 옥형스님과 자운스님이 충무공의 인격과 충절을 기려 세운 암자이다. 의승수군대장으로 참전해서 공을 세운 옥형스님은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의 전사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충민사 곁에 작은 정사(석천사)를 짓고 그곳에 들어갔다. 그는 80이 넘도록 죽는날까지 이 정사에서 나오지 않았다. 충민사는 이들의 정성에 힘입어 이충무공 사후 3년되던 해인 1601년(선조 34년) 왕명을 받아 지어졌으며,사액을 받았다. 이후 충민사는 좌수영에서 파견된 수호승장 스님이 관리를 해왔다.



어떻게 유교사당을 스님이 관리하게 되었을까? 그 내력을 좇다보니,승군조직이 1895년 고종이 좌수영을 폐지할 때까지 유지되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임란이 일어났던 1592년 여수 흥국사에 승군본부가 조직되고,1593년 승군 300명이 웅천전투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호남에 사는 승려들이 이공을 위해 재를 올리는데 사찰마다 안올리는 곳이 없었다. 1599년 불교계에서는 자운스님(화엄사 승려로 추정)이 주도해 선조가 내려준 백미 600석으로 노량에서 수륙재(영혼천도재)를 열고 음식물을 성대히 차려 충민사에 제사까지 지냈다.수륙재에는 임금이 시주좌가 되고, 수군대장이 참여하는 국가 행사로서 전쟁 이후 민심을 달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수륙재에는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 여수 흥국사, 충무 미래사,부산 동래 범어사가 주축이 되어 참여했다. 승군조직은 임란 이후에도 좌수영군 소속으로 300명 규모로 300년 동안 유지해오다 1895년 갑오개혁 군제개편에 의해 좌수영과 수륙재가 폐지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전라좌수영,선소, 타루비 
 

 
1592년 네 차례 해전은 모두 여수에서 발진했다.전란 초기 파괴된 경상우수군이 채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1592년 옥포해전부터 1593년 웅천해전까지 5차에 걸친 해전을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이순신의 전라좌수군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 현재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이 남아 있다. 당시 전라좌수영 성안에는 건물 80여동, 민가 2천여호가 있었다고 한다. 진남관은 임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수군의 중심기지로 사용되었고,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여수에는 임란 전투의 승리를 가져왔던 거북선을 만든 선소가 있다. 2차 해전의 세 차례 전투에서 거북선은 돌격선이 되어 총탄이 빗발치는 적진 속으로 맨 먼저 돌진하여 총통을 쏘며 적선을 깨뜨려 승리의 견인차가 되었다.여수 선소는 좌수영 본영 선소(중앙동)와 방답진 선소(돌산),순천부 선소 등 세 곳이다. 본영 선소는 매립된 위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흔적조차 없고,방답진 선소는 전선을 정박하던 굴강만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여수 시전동에 있는 순천부 선소는 거북선을 비롯한 판옥선,전선 등을 만들고 배를 대피시키던 굴강,칼과 창을 갈고 닦았던 세검정,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고,풀뭇간 등이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굴강은 직경 40미터 내외의 원형으로 거북선 두채가 들어갈 만한 규모이다.해어름 무렵에 찾은 순천부 선소는 굴강이 왼편으로 깊게 들어와 짙게 드리운 녹음이 물에 비치고, 멀리로는 가막만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바다 물결 위로 노을이 붉게 물들이고,굴강 옆 잔디에서 장년 두명이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하는 모습은 400여년 전 대장장이와 목수 후예들의 환영인듯 하였다. 

여수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소대는 좌수영 포루로써 충무공이 군령을 내리던 곳이다. 이곳에는 타루비와 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있다.타루비는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지 6년 후인 1603년에 전라좌수영 소속 군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해 비를 세우고 짧은 비명을 지어 눈물을 떨어뜨린다" 하니 말 그대로 타루비(墮漏碑)가 된 것이다.타루비는 대첩비와 함께 총독부의 비밀지령으로 경복궁 근정전 앞뜰에 묻혀있다가 해방과 함께 되살아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만약에 호남이 없었다면 어찌 이 국가가 있을 수 있으리까?" 이충무공은 1593년 7월 16일 진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 현덕승에게 올린 답서에 이렇게 적었다.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임란 초기에 위태로웠던 나라를 지킨 보루였고, 좌수영 근처에 마련한 이충무공 어머니의 기거지는 효심(孝心)의 산실이었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