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고구려인의 발견」(김용만 저) 

고구려의 장례풍속 
 
고구려의 장례 풍속은 고구려 전기와 후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초기의 사회상을 기록한 [삼국지]에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결혼하자마자 장례 지낼 때 입을 옷을 장만한다고 했다.  또 장례는 아주 후하게 지내,금과 은 ,재물을 모두 쓰며, 돌을 쌓아서 무덤을 만들고 무덤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했다.  이것은 장군총으로 대표되는 적석총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으며, 우씨왕후의 무덤과 고국천왕의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일곱 겹이나 쌓아 심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또한 고구려의 무덤에 많은 부장품이 있다고 외국인들이 알 정도여서 역대로 도굴꾼들이 기승을 부렸는데, 특히 모용선비족은 296년에 서천왕릉을 도굴하려 했다가 실패했고, 342년에는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과 무덤 속에 있는 역대의 보물을 거두어 가기도 했다. 이런 도굴꾼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다.

고구려 후기의 장례 풍속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기록이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지내는 3년상(喪)과 다른 고구려의 3년상의 모습이 특이했다고 기록한다.  시신이 죽은 후 곧 무덤을 만들고, 3년 간 상복을 입는 중국인들과 달리,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고 3년을 지낸 다음에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것은 고구려의 기후가 중국보다 추웠기 때문에 가능한 풍속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이 기간 동안 무덤을 만들었기 때문에 3년동안 집 안에 시신을 모셨던 것 같다. 상복도 입었는데 부모와 남편의 경우는 3년을 입었지만, 형제간에는 세달을 입었고 그것도 고구려 말기에는 한 달만 입었다고 한다.

고구려 전기에 비해 달라진 점은 부장품에 대한 것인데 [북사]에 의하면 장례가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입던 의복과 노리개ㅡ수레ㅡ말 등을 무덤 옆에 놓아두어서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가져가게 했다고 한다. 유품을 무덤 속에 넣어두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해 복이 된다고 믿는 풍습으로 바뀐 것 같다.

고구려의 장례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초상을 치를 때는 눈물을 흘리며 곡을 하나, 장사를 지낼 때는 오히려 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보낸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샤마니즘을 믿는 북방지역 사람들의 장례풍속이다. 이러한 점이 중국과 달랐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