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alhae.org/zb4/view.php?id=pds2&no=158


壁畵를 통해서 본 高句麗의 飮食風俗
第9回高句麗國際學術大會발표논문
周永河(한국정신문화연구원 조교수, 민속학 030922

1. 들어가는 말
2. 음식풍속 관련 벽화의 역사적 성격
3. 일상식사
4. 연회식사
5. 맺음말
참고문헌 


1. 들어가는 말

한국음식사(韓國飮食史)의 수많은 자료를 집대성한 성과를 남긴 이성우 교수는 『고려이전식생활사연구(高麗以前韓國食生活史硏究)』에서 고대 한국음식사의 연구법을 다음과 같이 밝혀 두었다. 첫째 고조선․원삼국 시대의 문헌적인 연구 자료로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속에 기원 후 300년 이전의 기사가 조금 기록되어 있으나, 이 시대의 기사는 신화적인 요소가 많다. 보다 구체적인 음식사 관계의 기사는 오히려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의 정사(正史) 속에 많이 나온다. 또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의 신화 속에도 우리나라의 음식풍속을 추측할 수 있는 기사가 간혹 실려 있다. 둘째, 식기와 부엌세간에 대한 자료는 고고학적인 유물에 의하여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만주지방이 당시에는 우리나라였으므로 이 지방의 유물도 연구대상에 넣어야 한다. 셋째, 우리나라 사서(史書) 속에 당시의 음식생활에 관계되는 몇몇 한자 단어가 나타난다. 이들 한자들은 중국의 사전이나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 옛 문헌을 통하여 해석해야 한다. 또 한자의 뜻이 중국에서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과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도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넷째, 중국의 문헌만으로 해석이 불충분할 때에는 현대과학과 문화사적인 지식을 동원하여 검증해야 한다. 다섯째, 당시의 우리나라는 유목계이면서도 중국의 문화권 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중국 음식사와 연관시키며 한국음식사를 살피는 작업이 필요하다. 
 
비록 1970년대의 역사학과 문화사 연구의 경향성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일부 논의는 재론의 여지가 있지만, 고대 한국 음식사 연구방법을 이처럼 정연하게 제시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러한 적절한 연구방법의 제시 이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여전히 삼국시대의 음식사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단연 오늘날에도 문헌을 비롯한 자료의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인다. 한국음식사 연구는 종래의 식품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연구하는 중요 대상이지만,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연구 조건을 우리는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 점 역시 이성우 교수 이후 연구 성과가 별로 없는 이유 중의 하나다. 특히 식품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식품사 연구는 역사학적 시각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문헌 중심에 머문 사실 나열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음식사 연구는 문화사 연구에서 보면 특수사(特殊史) 혹은 분야사(分野史) 연구의 하나다. 그러나 특수사나 분야사가 지닌 한계는 왕조사 중심의 시대 구분법을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음식사와 같은 분야사는 전체의 역사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왕조의 변화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경우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사람들의 음식 관습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외부 문화와의 접촉, 그리고 사회문화적 시스템의 변용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새로운 단계로 변이된다. 따라서 왕조의 교체가 음식 관습을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교체의 결과가 사람들로 하여금 식사의 내용과 방식을 바꿀 가능성이 더 많다. 
 
따라서 고대인의 음식생활을 살필 때 식품학적 시각과 함께 문화사적 시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특정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행한 음식생활이 지닌 문화적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는 역사적 맥락과 함께 그 사회가 지닌 정치적․경제적․종교적 측면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료 부족의 문제와 함께 특정한 집단 혹은 사람들의 음식생활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서 고구려 벽화 자료는 새로운 문화사적 조망을 하는 데 핵심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종래 음식사 연구에서 보조적인 자료로만 이해되었던 고구려 벽화가 지닌 자료적 가치는 음식사 연구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데 가장 적절한 자료로 이용될 가능성도 많다. 필자는 고구려 벽화를 통해서 음식풍속을 살필 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국가(國家) 전체의 경향보다는 특정시대․특정지역․특정계층에 대한 전제가 필요하다. 관련 자료의 부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종래 음식사 연구의 경향은 전체사(全體史)의 복원에 목표가 주어져 있었다. 비록 전해지는 특정한 기록 자료들이 특정시대․ 특정지역․특정계층을 고려하여 서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일반화의 위험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러한 접근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면에서 고고학 발굴 자료와 함께 고구려 벽화는 기록 자료들이 지닌 일반화의 위험성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대안이 된다. 
 
둘째, 특정시대의 특정국가를 고립된 문화적 ‘섬’으로 이해하려는 경향 때문에 문명과 물건의 교류가 없었다고 믿거나, 이에 반해 모든 것이 중국에서 유래하여 한반도로 전해졌다는 시각은 다분히 진화론과 전파론에 경도된 것이다. 비록 삼국시대로 불리는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지금에 비해 교류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겠지만, 특정계층 상호간에는 일정한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지고 있다. 또 동아시아에 중국 문명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한나라 이후 당나라에 이르는 시기로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살아가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먹고 살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특정지역 특정계층의 생활 모습을 담고 있는 고구려 벽화는 지속과 교류를 통한 문화적 변용을 살피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 
 
셋째, 음식사 연구가 마치 음식물 그 자체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에도 문제가 있다. 주지하듯이 음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음식의 생산과 소비에 관련된 생업기술 및 생활기술과 같은 테크놀로지가 일정한 축을 이루며 진행되지만, 그 속에는 사람들 사이의 조직인 친척관계와 사회조직이 간여하고, 동시에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먹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금기나 종교적 세계관과 상징이 개입된다. 따라서 음식사 연구는 비록 통시적(通時的)이어야 하지만, 특정시대․특정지역․특정계층에 대한 정보가 비교적 분명할 경우 공시적(共時的)인 접근을 통해서 당시의 사회문화상과 연결시키는 연구자세가 필요하다. 
 
기왕에 고구려 시대의 음식사에 대한 연구는 극히 드물다.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음식사 전체를 조망하면서 부분적으로 다룬 것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고구려 문화사를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음식풍속을 다룬 글이 있지만, 고구려 음식풍속을 전면적으로 다룬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 대신에 음식풍속의 대강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본고는 고구려시대에 제작된 고분벽화를 주된 자료로 하여 그 속에 담겨 있는 음식풍속 관련 자료를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두고 마련되었다. 그래서 본론에서는 먼저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벽화 중에서 음식풍속과 관련된 벽화를 정리한다. 특히 고구려 벽화는 그것이 발견된 지역이 분명하기 때문에 고구려 사회가 지닌 지역적 특성을 살피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 벽화의 자료와 기록물 자료를 근거로 일상식사와 연회식사에 대해서 살펴본다. 여기서 ‘식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그 말에 음식물 자체뿐만 아니라, 밥을 먹는 행위와 관련된 제반 요소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식사참여자․식사방법․식사도구 등이 일상과 연회라는 사건을 통해서 조망하려 한다. 다만 본고 역시 기존 연구와 마찬가지로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고구려인의 음식풍속이 지닌 일반적 경향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2. 음식풍속 관련 벽화의 역사적 성격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음식풍속을 그려 놓은 것은 안악3호분․약수리 벽화고분․무용총․각저총 등으로 알려진다. 안악3호분과 약수리벽화고분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소재하는 것으로 대체로 기원후 4세기경에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무용총과 각저총은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에 소재하는 것으로 대체로 5세기경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북한지역에 소재하는 벽화에는 주로 부엌과 방앗간과 같이 음식을 조리하는 장면이 주류를 이룬다면, 중국 동북지역에 소재하는 벽화에는 식사하는 장면과 음식상 나르는 장면이 주로 그려졌다. 즉 전자는 주로 일상의 음식풍속과 관련된 그림이며, 후자는 주로 접빈을 하는 연회음식과 관련된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양식이 일정하게 변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면 〈표1〉에서 소개한 벽화는 각각 일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감 또는 측실이 있는 고분의 형식을 띄는 것으로 안악3호분은 인물풍속도가 주류를 이루는 데 비해, 약수리 벽화고분은 인물풍속도와 사신도가 주된 그림이다. 이에 비해 각저총과 무용총은 똑같이 2실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각저총은 인물풍속도를 위주로 벽화가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무용총은 인물풍속도와 함께 사신도도 그려져 있다. 이런 면에서 북한지역의 고분이 초기 단실분에서 발전한 것이라면, 집안지역의 것은 2실분으로 발전하는 서로 다른 단계를 보여준다.  
 
사실 고구려는 오늘날의 인식에서 말한다면, 다민족국가이면서 그 영토의 광활함으로 인해서 다양한 자연환경과 생업방식을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의 음식풍속 관련 벽화가 나온 두 지역은 고구려 역사 전반에 걸쳐 정치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곳이다. 집안지역은 고구려의 성립 초기부터 국내성이 자리한 정치․군사․교통․경제의 중심지였다. 이에 비해 평안남도의 남포일대와 황해남도의 안악군 일대는 4세기 이후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펴면서 장악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농업생산의 중심지 구실을 했다. 이런 면에서 두 지역의 고분벽화에 보이는 음식풍속 그림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하겠다. 
 
사실 고구려는 전체 역사 과정에서 지역적인 확장을 통해 성립된 국가이다. 김용만은 고구려 문명의 지역적인 다양성을 16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별 환경과 생산기반, 그리고 역사변천을 살펴본 바 있다. 종래 고구려에 대한 이해에서 국지적인 통합성의 가능성에만 주목한 연구들이 다수를 이루는 데 비해, 이와 같이 자연환경의 다양한 층위를 제시한 것은 고구려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압록강 유역에 접한 무용총과 각저총의 소재지인 집안지역은 국내성지역에 속한다. 이 지역은 위도가 41°에 속하는 북방지역이지만 최근의 연평균 기온이 6.3℃인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극한(極寒) 지역은 아니었다. 특히 일찍부터 철 생산과 수공업․농업․어업이 발전했고, 기원전 4세기경에 이미 질 좋은 철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철광산이 개발되기도 했다. 이 덕택에 기원전 3세기경에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어 벌목을 통한 농토의 개간이 촉진되었다. 다만 논농사 지역이 아니고, 주로 조와 콩을 경작하는 밭농사와 압록강을 이용한 어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로 인해 중심을 평양으로 옮긴 이후에도 귀족세력의 집결지로써 정치․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지속시켰다. 
 
이에 비해 안악3호분과 약수리 벽화고분이 소재하는 평양지역과 황해도지역은 고구려 후기에 들어와서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진 427년 이후 국가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안악3호분이 위치하는 황해도는 평야가 발달된 곳으로 비록 밭농사 위주였지만, 후기로 올수록 밭벼농사도 행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약수리 벽화고분이 위치하는 평양 지역 역시 벼․조․콩 등의 곡물과 사과․밤 등의 과수가 비교적 풍부한 곳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생업은 주로 정착농경이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내성지역과 평양지역, 그리고 황해도지역은 모두 정치․경제․군사의 중심지로써 물산의 집중이 이루어진 곳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물풍속도를 주로 그리면서 당시 고분의 주인공이 영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생활상을 벽화로 묘사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 일대에서 유행하던 고분벽화의 양식이 상호 교류된 흔적도 보인다. 가령 안악3호분의 벽화는 중국 요동지역의 한대(漢代) 석곽묘인 요양 삼도호 제1호분, 요양 남설매촌 제1호분, 그리고 요양 봉태자둔 제2호분의 양식과 상호작용 속에서 무덤 주인의 실내생활이 묘사된 듯하다. 또 집안지역의 각저총 묘주 생활도는 도상적인 면과 내용적인 면에서 산동 안구묘 묘주와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이들 지역이 지닌 문화적 공통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사실 무덤에 벽화를 그린다는 것은 지배층으로서 정치․경제의 권력을 지니지 못하면 어렵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현전하는 고분벽화의 내용이 ‘고구려인’으로서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특정 계층의 것일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즉 해당지역의 지배층이 누렸을 생활상의 모습을 이들 벽화는 기록화 형식으로 전한다. 따라서 앞으로 살필 벽화를 통한 고구려의 음식풍속은 다음의 전제가 필요하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이전의 황해도지역(안악3호분)과 평양지역(약수리벽화고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이후의 국내성지역(무용총․각저총)에 살았던 지배층 혹은 귀족들의 음식풍속이 벽화에 남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특히 고분벽화의 주인공인 묘주의 묘사하여 생전에 그가 지녔던 위상과 권위를 그림을 통해 표현했다. 즉 고구려 중기의 특정지역 귀족들의 음식풍속이 고구려 벽화에 남아 있는 그림의 주된 소재이다. 


3. 일상식사

문헌 자료에 의하면, 고구려인의 주식은 조․기장․콩․보리․밀․수수 등으로 알려진다. 그 중에서도 조(粟)는 견포(絹布)와 함께 국가에서 거둬들인 중요한 세금의 하나였다. 주지하듯이 조는 고대 중국의 화북과 동북에서 오곡(五穀)의 하나로 꼽혔던 곡물이다. 보통 조(粟)라 하면 넓은 뜻으로 껍질을 벗기지 않은 모든 곡물을 가리키기도 할 정도로 주식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다른 표현으로는 기장을 표현하는 ‘직(稷)’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기원후 7세기까지는 직 역시 조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다. 조는 쌀에 비해 알이 작고 빛이 노란 색이며 끈기가 적은 편이다. 차조와 메조가 있는데, 차조는 메조에 비해 알이 굵지 않고 차지다. 평양 남경리 유적에서 탄화된 조가 발견된 적이 있을 정도로 북한지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식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도 조는 쌀 다음으로 생산량이 많았던 곡물이었다. 그래서 조는 다른 말로 좁쌀 혹은 소미(小米)로도 불린다. 비록 벼과의 곡물이지만, 그 쓰임새가 쌀과 유사한 탓에 이름도 좁쌀로 불리었다. 
 
따라서 고구려에서는 조를 이용하여 조밥을 지어 일상적으로 먹었을 가능성이 많다. 오늘날 ‘조밥’이라고 하면, 멥쌀에 조를 섞어 지은 것을 가리키지만, 쌀이 보편적인 곡물이 아니었던 시절의 조밥은 조가 주된 재료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조를 주된 재료로 하여 밥을 지을 경우, 어떤 조리방법이 사용되었을까? 조는 멥쌀에 비해 차지지 않다. 이 때문에 솥에 짓는 것보다, 시루에서 스팀을 이용하여 짓는 것이 전분(澱粉)을 호화(糊化) 하는 데 효과적이다. 안악3호분의 벽화에서 디딜방아가 놓인 방앗간(약수리 벽화고분에도 보임)과 아궁이에 놓인 시루는 고구려 사람들이 조의 껍질을 탈곡하여 조밥을 짓는 과정과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시루는 그릇에 직접 불을 대지 않고, 수증기를 이용하여 음식물을 쪄서 익히는 데 사용하는 조리기구이다. 외형상 일반 토기와 비슷하나, 바닥에 구멍이 있어 형태가 다르다. 고구려의 시루는 동이〔大鉢〕 계통의 토기와 비슷하나, 동이보다는 약간 깊은 동체부에 손잡이가 한 쌍 부착되어 있으며, 바닥에도 작은 구멍이 조밀하게 뚫려 있는 것에서부터 가운데에 구멍 1개와 주위에 4개의 구멍을 뚫은 것 등 다양하다. 최종택의 연구에 따르면, 알려진 고구려 유물 중에서 시루는 총 17개로 적석총에서 발견된 부장품인 시유토기(施釉土器) 3점을 제외하면 모두 실생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안악3호분의 부엌 그림에서 보이는 시루는 〈그림2〉의 5세기 초 시루와 그 모양이 닮았다. 아마도 시루바닥의 구멍 역시 이것과 비슷하여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렸을 것이다. 
 
그런데 3세기말에서 5세기 초반까지로 비정되는 시루는 대부분 바닥 구멍이 작고 여러 개인데 비해, 그 이후의 것은 구멍이 크고 5개로 정착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5세기 초반으로 올수록 시루를 바쳐주던 솥이 독립된 조리기구로 자리를 잡으면서 시루의 용도가 밥을 쪄서 익히는 데서 떡을 익히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이미 낙랑9호 고분에서 쇠로 만든 정(鼎)이 발견되었고, 안악3호분의 부엌에도 시루 밑에 놓인 솥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주식의 변천은 죽에서 떡, 그리고 밥의 과정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죽은 디딜방아로 탈곡을 하여 더욱 곱게 분쇄를 한 후 물과 함께 토기에 넣고 끓이는 방법으로 익혀 만들었다. 그러나 떡은 분쇄한 곡물을 시루에 넣고 스팀을 통해서 익혔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의 죽이나 떡의 형태는 오늘날의 것과 유사할 가능성이 많다. 마〔土著〕를 죽의 원료로 사용했다는 기록에서 보아도 고구려의 죽은 곡물만을 위주로 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떡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안악3호분 부엌 그림에서 마치 떡을 고이는 모습처럼 나오는 장면은 오늘날의 시루떡과 흡사하다. 이미 밥을 지어 먹었던 3~5세기 고구려 사람들은 죽이나 떡을 특별한 음식으로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루는 밥과 떡을 익히는 데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부엌세간이었다. 
 
『예기(禮記)』에는 밥의 종류로 기장밥․조밥․벼밥․차조밥․흰기장밥․누른차조밥의 6가지가 나온다. 한나라 때 완성되는 이 책에서 밥의 종류로 꼽은 이 여섯 가지는 비슷한 자연환경에 놓여 있던 고구려에서도 상당히 보편적인 밥의 종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고구려에서 났던 팥․보리․기장․수수 등은 조와 함께 섞이기도 하면서 밥의 재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쌀의 경우 평양지역과 함께 3세기 초에서 6세기 전반기에 장악했던 한강유역과 충청도지역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확보했을 가능성이 많다. 여주군 점동면 흔암리 한강변 유적과 평양시 호남리 남경 유적, 그리고 김포시 통진면 가산리 유적, 고양시 일산읍 유적에서 각각 3000~4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자포니카(Japonica) 형의 탄화미가 나온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구려 중기 이후 귀족들은 쌀을 먹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평양지역과 국내성지역의 귀족들이 남쪽에서 생산된 벼를 먹을 기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문헌과 유물이 없는 현재의 사정에서 이러한 논의는 단지 방증자료를 통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 사람들은 발효음식을 잘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즉 선장양(善藏釀)이란 표현은 곡물로 빚는 술이나 콩으로 만든 간장을 잘 담근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문헌에서는 고구려 사람이 잘 빚는 술로 곡아주(曲阿酒)라는 것이 있는 데, 당나라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아마도 오늘날의 청주와 닮은 술로 주식인 ‘조’로 담지 않았을까 여겨본다. 콩은 원래 고구려의 부여지역이 원산지로 알려진다. 중국에서는 『시경(詩經)』에 숙(菽)이 나오지만, 주나라에 들어와서 화북지역에 부여지역의 콩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콩을 이용하여 간장과 된장을 만든 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성과물로 보인다. ‘장(醬)’이라는 한자는 국물을 뜻하는 ‘장(漿)’과 같은 형상에서 나온 글자로 ‘장(醬)’은 원래 고대 중국인들은 국물이 많은 ‘육장(肉醬)’의 뜻으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메주를 뜻하는 ‘시(豉)’는 콩을 삶아 그것을 일정기간 삭힌 후 이것에 바닷물이나 소금을 뿌려 반죽한 메주덩어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콩이 이미 무문토기시대 유적지에서 등장하고 있는 점과 짠맛을 내는 시(豉)를 ‘염시(鹽豉)’라고 별도로 부르면서 ‘시(豉)’란 말이 외국에서 온 것이라는 기록을 비추어 보면 한반도의 무문토기시대에 된장의 고대형인 짠맛 내는 메주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많다. 
 
비록 고구려 관련 기사는 아니지만, 신라 신문왕(神文王,?~692)의 혼인품목에 시(豉)와 함께 장(醬)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장과 시는 일반인의 필수품이면서 동시에 귀족들의 위세를 위한 가치재적 성격이 강한 음식물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런 탓에 4~5세기의 고구려 귀족들에게도 메주와 장은 중요한 음식물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의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에는 미소(末醬)이란 말이 등장하는 데 이것은 고려의 ‘며조’와 비슷한 발음으로 아마도 고구려의 된장인 고려장(高麗醬)이 전파되어 생긴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간장․된장과 비슷한 장(醬)이 고구려에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안악3호분의 우물 그림에서 보이는 옹기는 총 4개이다. 그 중에서 배가 넓고 입구가 좁은 2 개는 오늘날의 간장독과 그 생김새가 유사하다. 현재 고구려 영역에서 발굴된 직구옹기(直口甕器)의 수는 적은 편이다. 직구옹기는 최대경이 어깨 쪽이며, 비교적 늦은 시기에 출현하는 것으로 6세기 이후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다. 옹기는 보통 높이가 40cm 이상으로 물을 담든지, 간장․된장․술을 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이 동해안의 동옥저에서도 어염(魚鹽)을 국내성지역에 공급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또한 요동지역과 평양지역의 바다에서도 소금을 생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에는 바닷물을 큰 솥에 넣고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기 때문에 육지에서 나는 암염(岩鹽)에 비해 그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결국 395년 전후 광개토왕이 요하지역의 염수(鹽水)를 점령하면서 암염의 생산지를 고구려가 장악하여 소금의 안정적인 확보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의 염장기술은 더욱 발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육고기와 채소의 저장에 간장․된장․소금이 사용되어 절임고기와 절임채소가 주된 반찬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육고기는 귀족이나 특별한 명절이 아니면 먹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조밥에 절임채소가 일반 백성의 일상적인 식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적어도 고구려에 메주가 존재했고 그것을 통해서 간장과 된장이 있었다고 보이니, 채소를 간장이나 된장에 절여서 짠지나 장아찌로 만들어 먹었을 것이 분명하다. 곧 소금에 절인 채소가 짠지이고 간장이나 된장에 절인 채소가 장아찌이니, 그 말의 어원과 관계없이 이와 비슷한 음식이 고구려의 일상적인 식탁에 올랐을 것으로 보인다. 
 
귀족이나 일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일상적인 식사는 주로 평상이나 오늘날의 갱(坑) 위에서 좌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것은 안악3호분과 약수리벽화고분 등에서 묘주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남자 귀족의 경우 식탁과 의자를 이용하여 입식으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한 흔적은 무용총의 접빈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울러 남자 귀족은 입식, 여자 귀족은 좌식을 했다는 점도 각저총 북벽의 식사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식사를 할 때 사용한 도구는 무엇일까? 중국의 경우 숟가락이 젓가락에 비해 빠른 시기에 출토되었다. 그것은 주식인 곡물과 국물음식을 먹는데, 숟가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황하 상류인 감숙성(甘肅省)의 영정(永靖) 대하장(大何莊)의 제가(齊家) 문화 유적지의 묘지에서는 뼈로 만든 숟가락이 106 점이나 나왔다. 이를 통해서 뼈로 만든 숟가락은 결코 소수인의 사치품이 아니었음을 확인한다. 대부분의 숟가락 손잡이 부분은 보통 구멍이 뚫려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허리에 숟가락을 차고 다녔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은 언제나 숟가락을 갖추고 이것으로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를 미루어 보아, 고구려에서도 나무․동물뼈․철제의 숟가락을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고구려 벽화에서 숟가락이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에 추정만 할 뿐이다. 다만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흥성(興城) 유적에서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뼈로 만든 숟가락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고구려 중기인 4~5세기경의 국내성지역과 평양지역, 그리고 황해도지역의 귀족들은 일상음식으로 조밥을 주로 먹으면서 간혹 평양지역 등지에서 생산된 쌀로 지은 밥을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후기로 들어오면 귀족들은 주로 쌀밥을 주식으로 먹고, 백성들은 조밥을 중심으로 기장․수수․보리 등을 시루에 쪄서 먹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밥을 먹을 때 사용한 도구는 숟가락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것을 증명할만한 벽화나 기록물이 없다. 반찬으로는 간장․된장에 절인 채소와 고기류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 구체적인 음식의 내용을 알아볼 자료 역시 없는 편이다. 다만 계절마다 나는 해초류 및 강에서 나는 생선, 그리고 각종 채소와 과실이 먹을거리로 확보되었을 가능성은 많다. 


4. 연회식사

고구려의 동맹(東盟)은 왕실에서 행한 연례의 세시풍속이다. 즉 고구려에서는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로 국중(國中)에 크게 모이는데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다. 이를 동맹이라 한다고 했다. 고구려의 시조묘 제사는 나라의 도읍이 아닌 졸본에 시조묘가 있기 때문에 정치적 행사로 거행되었다면, 동맹은 나라의 도읍에서 행한 국가의례로 연중행사로 행해졌다. 즉 동맹은 왕실에서 주관하여 제신(諸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크게 놀이를 했다. 동맹의 국중대회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벽화가 바로 무용총이다. 그러나 국중대회의 가무(歌舞) 장면은 이 벽화에 나오나, 음주(飮酒)와 제사의 내용은 상세하게 나오지 않는다. 
 
필자는 지난 2년여 동안 기록화를 통해서 한국음식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고구려 벽화 중에서 무용총의 접빈도는 고구려의 연회식사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비록 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당시 국내성 지역의 귀족들이 어떻게 손님을 접대했는지를 그 자체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에서는 무용총의 접빈도를 그림 읽기를 통해서 5세기경 고구려 국내성지역의 귀족들이 누린 연회식사의 한 면모를 살펴보려 한다. 
 
접빈도 벽화(부록〈그림7〉참조)에는 여섯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상을 두고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주인이고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손님이다. 두 사람의 손님은 곁으로 드러난 모습에서 승려이거나 도교의 도사(道士)일 가능성이 많다. 나머지 세 사람은 하인으로 보인다. 두 하인은 주인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데 비해 가운데 무릎을 꿇은 하인은 음식을 접대하고 있다. 특히 그 크기를 주인과 손님에 비해 작게 그려 그가 음식 시중을 드는 하인임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주인과 손님 사이에는 음식상이 각각 3개씩 모두 6개가 있다. 주인의 앞에 놓인 중심 음식상에는 그릇이 모두 5개이다. 주인 가까이 있는 그릇 하나는 다른 것에 비해 크다. 분명히 밥을 담았을 것이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고구려인의 주식은 쌀밥이 아니라, 조를 시루에 찐 조밥이었다. 그러나 5세기경에 국내성 일대의 귀족들은 평양지역에서 가져온 쌀을 이용해서 쌀밥으로 손님을 접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주인의 밥상 앞에서 하인은 칼을 들고 시중을 들고 있다. 아마도 고기로 만든 음식이 주인의 상에 차려진 모양이다. 고구려 10대 왕인 산상왕(山上王,?~227)은 그의 형수였던 선왕 고국천왕의 부인인 우씨의 방문을 받는다. 산상왕은 우씨부인에게 잘해 주려고 친히 칼을 들고 고기를 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상한다. 이에 우씨부인이 치마끈을 풀어 그 손가락을 싸매 준다. 고구려인은 허리에 백색 띠를 두르고, 왼쪽 허리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 허리에는 오자도(五子刀)를 달고 다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칼은 오자도일 가능성이 많다. 즉 하인이 주인을 위해 고기를 썰어 주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 돼지를 널리 가축했으며, 제천의 희생으로도 돼지를 썼고, 사냥에서는 멧돼지를 많이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로 미루어 멧돼지가 접빈도에 등장하는 칼로 썰 음식의 재료가 아닐까 여겨본다. 또한 수렵도와 안악3호분의 육고 그림에도 멧돼지와 함께 개․사슴이 갈고리에 걸린 채 마련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아울러 각종 수렵도에서는 소․노루․사슴은 물론이고 호랑이도 수렵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육식은 고구려 귀족들이 위세를 드러내는 데 사용하는 연회용 음식일 가능성이 많다. 아울러 일반 백성들도 동맹과 같은 국중대회가 있으면 음주가무(飮酒歌舞)와 함께 멧돼지 고기를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 육고기는 어떤 방식으로 조리되었을까? 생으로 굽는 방식, 간장에 절여서 굽는 방식, 시루에 찌는 방식 등 각종 조리법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문헌에 나오는 ‘맥적(貊炙)’이란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최남선은 『고사통(故事通)』에서 맥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국 진(晉)나라 때의 책 『수신기(搜神記)』)를 보면 ‘지금 태시(太始)이래로 이민족의 음식인 강자(羌煮)와 맥적(貊炙)을 매우 귀하게 안다. 그래서 중요한 연회에는 반드시 맥적을 내놓는다. 이것은 바로 융적(戎狄)이 쳐들어 올 징조이다.’라고 경계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맥적에는 대맥(大貊)과 소맥(小貊)이 있었으며, 한대(漢代)에서 이것을 즐겨 맥적을 중심으로 차린 연회를 맥반(貊盤)이라 하였다. 강(羌)은 서북쪽의 유목인을 칭하는 것이고, 맥(貊)은 동북에 있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을 칭한다. 즉 강자(羌煮)는 몽골의 고기요리이고, 맥적(貊炙)은 우리나라 북쪽에서 수렵생활을 하면서 개발한 고기구이이다.”. 
 
그런데 ‘맥적(貊炙)’이 특별히 좋은 음식으로 칭송을 받은 이유는 양념을 했기 때문으로 윤서석 교수는 추정했다. 그러면 그 양념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마도 멧돼지를 통째로 간장에 절여 항아리에 넣어둔 것을 꺼내서 여기에 마늘과 아욱으로 양념을 한 후 그것을 숯불에 놓고 굽는 방식으로 맥적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풍속은 조선후기의 『동국세시기』에도 나온다. 즉 오늘날의 불고기 혹은 너비아니에 가까운 것이 바로 맥적이다. 
 
식탁에 놓인 5개의 그릇에는 밥과 맥적 외에도 생선이 담겼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대무신왕』조에는 “11년 7월에 한의 요동태수가 병장을 이끌고 내침하였을 때 왕이 군신과 함께 모여 그 전수책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우보(右輔) 두지(豆智)가 한 계책을 내었다. 즉 지중(池中)의 鯉魚(잉어)를 수초에 싸고 지주(旨酒)와 함께 보냄으로써 아군에게 군량의 대비가 충분함을 시사하여 주자.”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생선도 연회음식의 중요한 재료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생선을 구웠는지는 조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나머지 2개의 그릇에는 무엇이 담겼을까?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채소절임이 두 그릇 담기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무용총의 접빈도에는 주인과 손님 앞에 놓인 밥상 외에도 각각 두 개의 다른 상이 놓여 있다. 발이 세 개 달린 상에는 입이 좁은 병이 놓였다. 아마도 중국에서 수입한 칠기로 된 목기 술병이 아닐까 여겨본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곡아주(曲阿酒)가 여기에 담겨 있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평소에 조로 밥을 지어먹기도 했지만, 술을 만드는 데도 조는 좋은 재료가 되었다. 먼저 조를 디딜방아에서 곱게 빻아 가루를 낸다. 이 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반죽을 한 후 시루에 안쳐서 떡이 되게 찐다. 이렇게 삶아 낸 조떡을 식힌 후 손으로 다시 반죽을 한다. 충분히 다진 후 그 위에 말린 메주에서 때낸 가루를 넣고 물을 간간이 부어가며 손으로 반죽을 하며 이리저리 잘 섞는다. 이것을 항아리에 넣고 우물에서 떠온 깨끗한 물을 부어 뚜껑을 꼭 덮고 화로 옆에 한 달쯤 두면 술독 맨 위로 맑은 청주가 떠오른다. 
 
아울러 술병의 왼쪽에 놓인 상에는 오늘날의 고임음식과 닮은 것이 놓였다. 아마도 강정․산자․밤 따위를 고임한 곡아주의 안주가 아닐까 여겨진다. 일본의 고대 기록에는 이런 고임음식을 고구려병(高句麗餠)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즉 밤과 잣과 같은 과실을 넣은 떡을 만들고, 과실을 좋아하며, 이것으로 고구려병을 잘 만들었다고 했다. 이러한 고임음식의 전통은 계속 지속되어 고려와 조선의 궁중연회는 물론이고, 오늘날 일반 가정의 제사음식 진설에서도 나타난다. 풍속의 지속이 얼마나 강력하게 이어지는가를 볼 수 있는 사례이다. 
무용총의 술병과 마찬가지로 밥상에 놓인 그릇은 모두 칠기일 가능성이 많다. 이것은 각저총의 그림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각저총의 그림에는 발이 달린 소반에 세 그릇 검은 색 식기가 각각 상에 놓였다. 무용총에는 주인과 손님에게 각각 3개씩 모두 6개의 상과 각각의 음식상에 5개의 검은 색 식기가 놓여 있다. 
 
그림으로 짐작하면 식기는 옻칠을 한 칠기이다. 옻나무가 고구려 지역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이 칠기는 중국 남부로부터 수입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와 비슷한 시기로 알려진 평양 일대에서 오늘날 중국의 사천(四川省) 성도(成都)에서 생산되었다는 표시가 있는 칠기가 발굴되기도 했다. 특히 한나라 때는 칠기는 귀족들의 식기구로 사용되었다. 한나라에서는 국가에서 분업에 의한 칠기의 전문적인 생산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당시 칠기는 가장 값비싼 생활용구였다. 국내성지역의 고구려 귀족들에게도 이런 영향이 미쳐서 중국에서 칠기를 수입하여 연회식사 때 사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일상음식에서 밝혔듯이 고구려인들은 평소에 좌식을 손님이 오면 남자들은 입식을 했다. 무용총 접빈도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주인과 손님은 의자에 앉아서 굽이 높은 사각 반에 음식을 차려서 먹었다. 아울러 음식상도 한 사람마다 한 상이 차려졌다. 그런데 당시 중원의 한족들은 좌식생활을 했다. 그들은 도마〔俎〕에 음식을 차려놓고 쪼그리고 앉아 식사를 했다. 그래서 고구려 방식으로 발이 높은 밥상을 그들은 ‘맥반((貊槃)’이라 불렀고, 의자를 오랑캐의 것이라 하여 호상(胡床)이라 불렀다. 맥반은 각저총과 무용총에서 여러 개 등장한다. 식탁의 높이가 오늘날의 서양식 식탁에 비해서 낮지만, 조선시대의 소반에 비해서는 높다. 조선시대 소반의 전통이 여기서 나오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해 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4~5세기경의 국내성지역에서 살았던 고구려 귀족들은 남자들은 의자와 높은 식탁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하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식사 접대를 했다. 식기로는 중국 남방에서 수입한 칠기가 사용되었다. 식사도구 역시 옻칠을 한 숟가락과 젓가락이 동시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와 관련된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손님이 오는 경우 외에도 귀족들 집에서는 동맹과 같은 명절 때 연회를 위한 식사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마련된 음식은 주로 육고기를 재료로 맥적과 같은 것이 으뜸이었으며, 과실과 떡을 고임한 음식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더욱 자세한 모습을 추정하기는 어렵다. 
 

5. 맺음말

사실 벽화를 통해서 음식의 내용을 살피는 작업은 사실 확인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음식물 자체가 안악3호분의 육고 그림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도 조리법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라도 제공해 주는 벽화가 고구려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본문은 고구려 전체의 음식풍속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4~5세기경 국내성지역, 평양지역, 그리고 황해도지역에 살았던 귀족에 한정된 모색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한계는 더욱 많은 자료의 확충을 통해서 보완될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고구려의 음식풍속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시사점을 발견한다. 첫째, 고구려 사회의 다양한 자연환경과 경제적 조건은 벽화와 문헌 기록에 나타나는 몇몇 현상이 매우 한정적인 측면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오늘날 기준으로 말한다면 고구려인이 중심이 된 다민족 사회였다. 후에 중국의 사서에 기록되는 말갈․여진․돌궐․숙신 등의 종족이 모두 고구려를 구성한 하위 집단이었다. 이것은 생업의 형태에서 유목과 목축, 그리고 농경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또는 각각 이루어졌음을 설명하는 증거가 된다. 아울러 고구려 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아랍계통의 인물들은 고구려의 음식풍속이 단순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둘째, 고구려인이라는 존재가 가능했다고 해도, 거기에는 오늘날의 민족적 특성보다는 지역적 특성이 더 고려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미 김용만의 가설을 살펴본 바도 있지만, 고구려를 유지했던 핵심적인 지역적 기반은 음식풍속에서도 그대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는 이 점에서 고구려 벽화의 형태와 양식뿐만 아니라, 음식풍속에서도 지역적 측면을 고려하는 더욱 세밀한 연구를 요구 받는다. 가령 국내성지역, 평양지역, 그리고 황해도지역의 고지리학과 고생물학의 연구 성과가 있다면, 더욱 자세한 음식물의 종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종교와 음식풍속의 관계에 대한 접근이 더욱 필요하다. 주지하듯이 고구려는 중기 이후 토착적인 조상의례에 불교와 도교를 수용한다. 종교는 한 문화집단에게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규정하는 근간이 된다. 특히 불교의 경우 살생을 금지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미쳤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중요하다.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372년 국내성 시대로 알려진다. 4세기 중엽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안악3호분의 육고는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5세기경의 것으로 여겨지는 무용총에서도 오자도를 사용하여 육고기를 접대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살생금지의 불교 교리가 일상과 연회의 식사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외부에서 새로운 종교가 수용되어도 교리의 민간화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가설과도 맞아 떨어진다. 
 
넷째, 고구려 왕실의 각종 종교의례에서 제물이 어떻게 마련되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비록 시조묘 제사는 연례적으로 행하지 않았지만 기록에 보이며, 동맹과 같은 제천의례는 왕실의 조상제사로 중요하게 행해졌다. 그런데 이 때 제물의 장만과 소비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비록 돼지를 희생 제물로 사용한다는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해지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 길이 없다. 추정하면 유교의례가 이미 고구려에 수용되었기 때문에 『주례』나 『예기』의 예법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 사회는 다원적인 사회문화적 양상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종족 집단의 다층성, 지역적 다층성, 계층적 다층성은 비록 음식풍속이 개개인에게는 비교적 단순했겠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다원성을 축으로 하여 움직였을 가능성이 많다. 더욱이 고려 이후 한반도에 한정되어 음식생활을 영위하면서 재료의 단순화를 가져왔고,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음식이 비교적 단조로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면에서 고구려의 음식풍속을 좀 더 전면적으로 살필 수 있다면, 오늘날 일정하게 지속 혹은 단절되었을 가능성이 많은 고구려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데도 일정한 의의가 있을 것이라 여긴다. 
 
이럴 때 미시적인 새로운 음식사를 정립하는 일은 물론이고 고구려인에 대한 막연한 상상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상 속의 동일 민족 관념’을 해체하는 데도 일조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좀더 열린 공동체를 위한 21세기 연대에서 고구려의 각 지역과 계층에서 행해진 미시사적 문화사는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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