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 성균관

조선 2013. 5. 5. 12:40
출처 : http://www.skkok.com/sub1/sub1_5_1.asp

성균관

연혁

유교에서는 교육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이 매우 컸던 만큼 이를 위한 교육제도 역시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이미 기원전 5세기 무렵에 중국 곡부(曲阜)에서 세계 최초의 사립학교가 바로 공부자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이를 거쳐 나간 제자가 무려 삼천 명에 달했다는 것을 미루어서도 알 수 있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나라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나타난 공식적인 국립대학 교육기관은 372년에 세워진 고구려의 태학(太學)이다. 이곳에서 경전(經典) 읽기를 비롯하여 활쏘기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미루어 볼 때 육예(六藝)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百濟)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의 제도가 있어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고, 신라에서도 역시 782년에 국학(國學)을 세워 「논어」와 「효경(孝經)」을 필수 과목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이 무렵을 전후(前後)해서는 백제의 유학자들이 일본에까지 건너가 유교를 전파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 교육이 이미 체계가 잘 갖춰지고 매우 성행(盛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들어와서는 992년에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國子監)이 설립되어 더욱 세분화되고 발달한 교육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유교의 주요 경전들을 단계별로 나누어 배우고 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다. 또한 예종 14년(1119년)에는 국자감 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장학기구라 할 수 있는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재정적 뒷받침을 하였다.
 
국립대학으로서의 성균관

국자감에서는 경전교육과 더불어 고려 초기부터 공부자묘(孔夫子廟)가 세워져 유교의 창시자인 공부자를 추모하고 그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가지 의식이 행하여졌다. 이같은 의식은 오늘날까지도 계승되어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에 성균관을 비롯한 전국 향교에서 일제히 공부자에 대한 제사 의식인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있다. 

국자감은 유학을 가르치고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는 국립대학으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국자감은 그 후 국학(國學) 또는 성균감(成均監) 등으로 그 명칭이 여러 차례 바뀌어오다가 공민왕(恭愍王) 11년(1356년)에 이르러 ‘성균관(成均館)’으로 정해진 이후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성균관의 규모

고려 때까지 성균관은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太祖)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1398년에 지금의 서울 명륜동으로 옮겨 세워졌다. 

명륜당은 학생들에게 유학을 강의하던 강당으로서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이곳에서는 약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였으며, 국가에서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그리고 대성전은 공부자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와 후대 유학자 21인과 우리 나라의 대유학자 18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문묘(文廟)이다. 또 동·서재는 기숙사로서 모두 2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균관의 규모는 날로 확장되어 성종(成宗)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이 세워진 것을 비롯, 비천당(丕闡堂)과 육일각(六一閣) 등이 차례로 설치됨으로써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유교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체계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향관청은 석전 봉행시에 제관 및 제집사들이 재계하던 공간으로 석전 전날에는 임금께서 내린 향(香)과 축(祝)을 보관 하였으며, 평소에는 학생들의 기숙사로도 사용하였다. 

존경각은 경전을 비롯한 많은 책을 보관하던 도서관으로서 우리 나라 대학 도서관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또한 비천당은 명륜당과 더불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장소로서 설치되었으며, 육일각은 활과 화살 등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육예(六藝) 가운데 한 과목인 사(射) 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성균관의 주요교육 내용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은 유생(儒生)으로 불렸으며, 이들의 생활은 엄격하고도 질서있는 것이었다. 유생들의 하루 일과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경전을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특히 유교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책을 읽을 때에는 그 뜻을 명확하게 이해하여 그 속에 들어있는 깊은 뜻을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윤리도덕을 철저히 지키며 교수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등 국가의 장래를 맡아 나갈 인재로서 소홀함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수업을 받았던 주요 과목은 사서와 오경이었다. 처음 입학한 학생에 대해서는 「대학」부터 배워 단계적으로 다음 과목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유생들에게는 매월 말에 그 동안 공부한 것에 대한 성과를 시험보아 확인하였으며, 그 결과는 국가에까지 보고되는 등 매우 엄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의 탄압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으로서 유교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갈 인재의 양성, 풍속의 교화 등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에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과 향교는 일제의 침략으로 엄청난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10년 무력으로 한국을 합병한 일제는 우리의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합방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던 것이다. 

성균관을 폐지한 일제는 민족 교육이 아닌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설립하였다. 이같은 강압정책에 따라 성균관은 국립대학으로서의 면모를 잃고 경전을 교육하는 사설 전문학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유교 역시 크게 침체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그 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 성균관을 재건하고 유교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전국 유림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성균관이 지니고 있었던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하여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유림들의 뜻을 모아 성균관대학이 설립되었다. 비록 국립대학으로서의 위치를 되찾지는 못하였으나 유교이념에 의한 대학이 다시 우리 나라에 세워질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균관대학의 설립과 더불어 성균관 안에 유림조직으로서 유도회총본부가 설치되고, 각 지방에도 유도회 지부가 결성되어 향교를 중심으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저질러졌던 민족이념으로서의 유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의 상처를 빠른 시간 안에 완전히 회복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전국 유림들의 유교 진흥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꾸준한 노력 속에 청년유도회와 여성유도회가 잇따라 결성되고 자체 언론기구로서 유교신문사가 건립되는 등 체제가 크게 정비되었다. 또한 최근 들어 성균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린이 예절학교’를 비롯, 선비학당과 한림원 및 전국 각 향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청소년인성교육 현장교실’ 등을 개설하는 등 사회교화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과 모습을 점차 되찾아 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매우 높아져 많은 관심과 참여가 뒤따르고 있음은 유교의 부흥과 민족문화의 확립을 위해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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