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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제3대 대무신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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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 작가 원작의 '바람의 나라'>

 

대무신왕(大武神王).

고구려 제3대 태왕이며, 광개토태왕릉비에 나오는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

휘는 무휼(無恤) 또는 미류(味留), 유류명왕의 제3왕자.

《삼국사》에 기록된바 유리왕 23년(AD. 4)생이고, 태자로 봉해진 것은 동왕 33년(AD.14),

즉위한 것은 AD. 18년으로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또한 김진 작가의 대서사극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거기서 대무신왕, 즉 무휼은 신령한 능력을 지닌 왕으로서 대제국 고구려를 꿈꾸며 부여를 정벌하고, 

낙랑과의 혼사를 준비하며 한편으로는 낙랑을 장차 합병하여 장차 인류 시원의 부도(符都)에 이르고자 하는 냉혹함을 지닌,

그러면서도 옛 사랑의 기억과 혈연이라는 틀 속에서 고뇌하는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광개토태왕릉비》는 그를 가리켜 "(선대의)왕업을 이어 발전시킨 자"라고 칭했으며,

우리나라 고대사 등장 인물들을 평가하는데는 그토록 깐깐하고 인색하기가 짝이 없는

보수꼴통 성리학자 순암 안정복 영감마저도,

"뛰어나게 지혜롭고 총명하며[英明], 위엄이 있고 씩씩한데다[威武] 인재를 알아 잘 위임했으며,

땅을 널찍하게 개척하여 나라 형세가 더욱 융창해졌다"며 찬사를 보냈던 그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려 한다.

 

[大武神王立,<或云大解朱留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 有大略. 琉璃王在位三十三年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대무신왕(大武神王)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 휘는 무휼(無恤)이고 유리왕의 셋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고, 장성하여서는 뛰어났으며, 큰 지략이 있었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AD. 14)에 태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가 11세였다. 이 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송(松)씨로서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대무신왕의 휘는 무휼이다. 《북사(北史)》 고려전에는 '막래(莫來)'라고 나오는데,

조선조 한치윤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5대 모본(慕本)의 잘못이 아닐까 주장했지만,

단재 선생은 '막래'는 '무뢰'로 읽어서 '우박[雹]'이라는 뜻이 되고, 이는 곧 '신(神)'이라는 뜻으로(??)

대주류왕(大朱留王)의 이름 '무휼(憮恤)'과 음이 같을 뿐더러,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미류왕이니,

막래는 모본왕이 아니라 미류왕이 분명하다고 말하셨다.

 

《삼국사》가 미류왕의 어머니라고 말한 송씨는 원래 유류명왕 2년(BC.18) 그가 최초로 맞이한 왕비인데,

그녀는 유류명왕과 혼인한지 1년만에 죽었다고 했으니, 무휼왕이 태어난 해와는 31년이나 차이가 있다.

미류왕이 태자로 봉해졌을 때의 나이가 11살이고 즉위한 것은 15살,

부여 사신을 대할 때 나이는 겨우 6살인데 이미 죽은 사람이 애를 낳았을리도 없고...

(고구려왕조실록이라는 책에선 다물후의 딸 송씨라는 여자가 두 명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했는데 옳은 것도 같고)

앞뒤가 안 맞아. 뭔가가.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 來投.]

2년(AD. 19) 봄 정월에 수도에 지진이 일어나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 백성 1천여 호가 투항해 왔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공교롭게도, 그럼 무슨 일이 있었길래 1천 가구나 되는 백성들이 고구려로 투항한 걸까?

《백제본기》에 보면, 공교롭게도 이 무렵에 백제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 浿帶之間, 空無居人.]

여름 4월에 가물었다. 6월에 이르러서야 비가 왔다. 한수(漢水)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서, 고구려로 도망친 자가 1천여 집[戶]이나 되었다.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텅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삼국사> 권제23, 백제본기1, 온조왕 37년(AD.19)

 

패수나 대수 모두 강의 이름이란 것에는 이설이 없고,

순암 노인네가 쓴 《동사강목》이나, 단재 선생의 말로는 패수란 곧 지금의 대동강,

대수란 곧 지금의 임진강(혹은 한강이라고도)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대충 황해도 전역(넓게는 경기도의 서울 한강 이북까지)이 해당되는데,

그 정도가 텅 빌 정도로 엄청난 흉년이 들었고, 그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이 고구려까지 이주했다는 것.

호(戶)라는 것을 한 사람으로 봐야 되는지, 아니면 다른 단위로 쓰는 데가 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설마 그 넓은 땅에 고작 천명밖에 살지 않았다는 걸까. 

 

하지만 대사면령을 내릴 만큼 지진의 피해를 입었을 고구려라고 그들에게 무슨 뾰족한 구제책이 있었겠나.

원래 조금만 살기 힘들어도 보따리 싸서 떠도는 게 우리나라 토풍(土風)아닌가.

하긴 이리저리 말에게 먹일 풀이 자라는 초원을 찾아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후예니까.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3년(AD. 20) 봄 3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미류왕 3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동명왕의 사당, 즉 동명왕묘가 선다.

아버지 유류명왕이 세우지 않았던 것을 그 아들이 이룬 셈인데,

고구려의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에서 최고의 국신(國神)으로 받들어 모시던 두 신 가운데

마지막 한 명인 등고신을 본격적으로 제사지내게 된 계기라 할수 있을 것이다.

등고신이란 곧 동명성왕인데, 고등신이라고도 해서 그가 하늘에 올라 신이 되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시조묘는 신대왕 4년(168) 가을 9월에 졸본에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했으니

아마 동명성왕의 수도 졸본, 즉 홀승골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고국천왕 원년(179) 가을 9월, 동천왕 2년(228) 봄 2월, 중천왕 13년(260) 가을 9월,

고국원왕 2년(332) 봄 2월, 안장왕 3년(521) 여름 4월, 평원왕 2년(560) 봄 2월,

건무왕(建武王) 2년(619) 여름 4월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역대 왕들이 꾸준히 이곳에 가서 참배했다고,

《삼국사》는 전한다.

 


<기린마를 타고서 하늘로 오르는 동명왕. 바람의 나라 17권中>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駏○.]

가을 9월에 왕은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했다. 신비로운 말[神馬]을 얻어서 이름을 거루(駏○)라 지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AD. 20)

 

동명성왕이 부렸다는 기린마(麒麟馬)만큼이나 신비로운 말이 바로 미류왕의 거루다.

거루라는 이름자에 쓰인 글자들은 모두 버새 곧 노새를 가리키는데,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다.

구약성서에도 나오는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들인데, 종족 번식을 못해서 그렇지 체질은 강건하고 거친 먹이도 잘 먹고, 

체격에 비해 무거운 짐도 들수 있고 지구력도 강하다고 한다.

고구려가 산지에 건국된 나라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없이 유용한 짐승이라 할 것이다.

 

영화같은데서 보는 멋진 백마가 아니라, 거의 덩치가 당나귀만한 노새라는 이놈을

왕이 신마라고 부르면서 타고 다니는 것이 쉽게 상상이 되지는 않지만,

사실 13세기 몽골제국 칭기즈칸의 군대가 '악귀'라고 불린 것은 흔히 조랑말이라고 불리는 몽골말의 힘이 컸는데,

이것들은 커봤자 겨우 어른 평균키 정도쯤밖에 안오는 조그만 녀석들이다.

 


<과하마의 후손격인 제주마. 그 조상은 몽고마와 같으며 저 머나먼 북방의 초원에서 왔다.>

 

하지만 굳이 거루같은 노새가 아니어도, 고구려에는 그 토산물로 과하마(果下馬)라는 것이 있었다. 과하마는 곧 토마(土馬)인데,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작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몽고마(프르제발스키호스)와 같은 계통인데, 오늘날 우리나라 제주마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보면 된다(그냥 쉽게, 제주마와 같은 조상을 모신다고 해두자). 동명왕이 부여를 탈출하면서 탔던 말도 바로 이 과하마였다.

 


<해마다 제주도에서 열리는 제주마축제 포스터(그냥 말과 사람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올렸음)>

 

고구려에는 농사에 쓰이는 소만큼이나 말을 아주 귀하게 여겼다.

《구당서》에 보면, 고구려에서는 소나 말을 다치게 하면 그 본인을 아예 노비로 만들었다고 하니,

이들이 얼마나 우마를 소중히 여겼는지는 안봐도 알수 있다.

선대 유류명왕 때에는 공을 세운 신하 부분노에게 황금 30근과 함께 좋은 말 열 필을 내려주었고,

동천왕 때에는 오의 사신에게 수백필의 말을 선물한 이야기가 《동사강목》에 나온다.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扶餘人得此烏, 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시켜 붉은 까마귀를 보냈는데, 머리가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 부여인이 이 새를 얻어 부여왕에게 바치니, 누가 아뢰었다.

“까마귀는 검은 것입니다. 지금 변해서 붉은색이 되었습니다. 또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두 나라를 아우를 징조입니다. 왕께서 고구려를 겸하여 차지할 것입니다.”

대소가 기뻐하여 그것을 보냈다. 아울러 그 어떤 사람의 말도 알려 주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AD. 20)

 


<해뚫음무늬금동관장식에 새겨진 삼족오.>

 

까마귀란 원래 태양 속에 사는 새라고 고대 동아시아 사람들은 여겼다. 삼족오(三足烏) 말이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태양을 묘사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꼭 삼족오가 등장한다.

고대 중국의 전설에서 유래했긴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특유의 우아하면서도 힘찬 모습으로,

고구려만의 삼족오로 바꾸어냈다.

 

그렇게 신비롭게 여긴 새인데, 다른 까마귀와는 달리 몸의 색깔은 붉고,

더구나 머리 하나에 몸이 두개인 샴쌍둥이 까마귀였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나.

뭐 지금같은 시대에 저런게 튀어나왔으면 뭐, 어디서 체르노빌처럼 원자력발전소가 터졌거나 

환경호르몬 과다 오염으로 인한 기형생물의 탄생이라면서, 사회 이슈거리는 못되더라도

전세계 환경론자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을텐데....

 

공해없던 그 시대에 환경론자가 어디있고 환경호르몬 오염은 또 어디 있었겠나.

그저 이상하네 하고 치웠지. 그 시대에 핵은 커녕,

오존층이 황룡사탑 5층인지 무슨 왕궁 5층인지 그 사람들이 뭐 알기나 했겠어?

(설마 핵 만든답시고 요새 한창 난장 떠는 북한에서 저런게 튀어나오진 않겠지? 그러면 난 이 나라에서 못 산다.)

 

[王與臣議, 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 帶素聞之, 驚悔.]

왕은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대답하였다.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이다.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물건인데, 왕(대소)이 얻고선 갖지 않고 우리에게 보냈다. 두 나라의 존망은 아직 알 수 없다.”

대소가 그 말을 듣자 놀라고 후회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3년(AD. 20) 겨울 10월

 


 <바람의 나라 3권 中. 대소왕이 까마귀를 보낸 앞에서 무휼이 화답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선전포고.

전쟁이 곧 역사이고 역사가 곧 전쟁이던 고대 시대에서.

그것은 새로운 역사와 시대를 만들 수 있는 기회이면서,

또한 그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말끔히 지워질수 있는 위기이기도 했다.

그 위기의 순간을 기회로 바꾸고서 새로운 역사와 시대를 만든 자를 가리켜 사람들은 영웅이라고 부른다.

하늘의 명으로 땅 위에 서서 나라와 백성의 존망과 안위를 결정하는 자.

즉 그러한 임무를 띤 왕(王)이 곧 국체(國體)이던 시대.

고대는 그런 시대였다.

 

이미 이렇게 말을 꺼낸 순간 이전부터, 이미 왕은 부여와의 전쟁을 준비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무모한 시도일지도 모를 전쟁을 말이다.

전쟁이란 나라에게 많은 것을 줄수도 있고 또한 많은 것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그런 전쟁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의 과정은,

여섯 개의 리볼버 탄창 중 하나에만 총알을 넣은 것을 아무렇게나 돌린 뒤,

그것을 머리에 갖다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러시안룰렛의 심정과 같다.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

 

그것을 하느냐, 마느냐는 자신이 결정한다.

하지 않아도 좋다.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장담할수 없다.

죽어서 넘어질지, 살아서 자기 간의 크기를 증명할지.

산다면 만인의 찬사와 칭송을 받겠지만, 죽으면 슬퍼할 사람도 애도해줄 사람도 없다.

왕은 그런 도박과도 같은 전쟁에서 자신이 선택한 패를 꺼내 던졌다.

결전(決戰)이라는 패를.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伐扶餘.]

4년(AD. 21) 겨울 12월에 왕은 군사를 내어[出師] 부여를 정벌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부여왕 대소가 강한 것을 믿고 교오(驕傲)하므로,

방비하지 않음을 틈타 대무신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를 쳤다고, 《동사강목》에서는 말한다.

 

하긴 그 무렵만 하더라도 부여는 고구려보다 강했으니까.

유리왕 때만 하더라도 두 번이나 쳐들어왔고 유리왕이 스스로 머리를 숙일 정도였는데,

대무신왕은 유리왕과는 달랐다. 아버지가 고개 숙일 때 고개 들고 부여 사신한테

"쌓아놓은 달걀을 무너뜨리지 말라(혼나기 싫으면 까불지 말고 닥치고 있어라)"는 경고성 멘트를 거침없이 날릴만큼 대담했고,

또 그 자신 역시, 예전 고구려로 쳐들어온 부여군을 학반령에서 거의 궤멸시킨 일도 있지 않은가?

 

부여군과의 전투 및 승전 경험도 있고, 아버지와는 다른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그가

부여 정벌을 결심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 鼎游戱, 就見之, 只有鼎. 使之炊, 不待火, 自熱, 因得作食, 飽一軍.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請負以從.”遂賜姓負鼎氏.]

비류수 가에 다다랐을 때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들고 노는 것 같았는데, 다가가서 보니 솥만 있었다. 그것으로 밥을 짓자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었다. 일군(一軍)이 배부르게 밥을 먹었다. 문득 한 장부가 나타나 말하였다.

“이 솥은 우리 집의 물건입니다. 나의 누이가 잃은 것을 지금 왕께서 찾으셨습니다. 짊어지고 따르겠습니다.”

마침내 그에게 부정(負鼎)이란 성씨를 내려주었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4년(AD.21) 겨울 12월

 


<가마솥>

 

불을 때지 않아도 스스로 밥이 지어지는 솥이라.(무슨 압력밥솥이냐.)

이걸 황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동사강목》에서는 이걸 뺐다.

전기밥솥도 아니고, 어떻게 그 시대에 불을 안 때도 밥이 저절로 지어지는 솥이 있겠나.

(이러니 삼국사가 신뢰성 의심을 받는게 무리도 아니지)

부정(負鼎). 솥을 짊어진다는 뜻이다.

고구려 초기부터, 투항하거나 왕업에 일조한 자, 신하로 삼은 자에게는 항상 성이 내려졌다. 이것을 사성이라 한다.

 

성씨라는 개념 자체가, 지금과는 달리 초기에는 소수 지배계급들이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고자 사용했는데,

성씨가 있다는 것은 곧 그 나라에서 상류 계급임을 의미했다.

동명왕이 자신의 성씨를 고(高)라 칭한 것이나 온조왕이 부여(夫餘)라는 단어를 성씨로 사용한 것도 대개 그런 까닭이다.

 

이번에 부정씨 성을 받은 자 말고도, 동명왕 때에 극재사, 중실무골, 소실묵거 같은 사람들은,

동명왕의 신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성씨를 하사받은 자들이고,

유류왕 때에는 기산에서 만난 날개 달린 남자에게 우(羽)씨 성을 준 이야기가 나온다.

 

대개 그런 사성을 받은 사람들은 나라에 공을 세웠거나 한 사람들인데,

군대에서 솥을 짊어지고 따른다는 건 곧 군량과 관계된 일이며,

이 솥으로 인해 군사들이 배부르게 밥을 먹을수 있었다는 것에서, 이 이야기의 의미를 유추해낼수 있다.

 

저절로 밥이 지어지는 솥의 주인이며, 이때 참전하기를 바랬던 자.

조사해보니 부정씨는 원래 대무신왕이 부여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고구려군에게 군량을 제공했던

그 일대의 상단 세력을 인화[人化]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것 같기도 하고.

 

[抵利勿林宿, 夜聞金聲. 向明使人尋之, 得金璽·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이물림(利勿林)에 이르러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렸다. 밝을 즈음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게 하여, 금인(金印)과 병기 등을 얻었다.

“하늘이 준 것이로다.”

하고 절하고 받았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4년(AD. 21) 겨울 12월

 

신비로워보이는 이 일들이 어쩌면 군사들을 위한 깜짝 이벤트가 아니었을까?

군대에서 기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군사들의 사기라는 점을 아는 장교들은,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갖가지 행동을 벌인다.

일기토(一騎討)라고 해서 삼국지식 맞짱을 떠서 적장의 머리를 베기도 하고.

직접 섶을 베어다 추워하는 병사들을 위해 불을 피워주던지.

자신이 직접 병사들과 함께 무거운 수레를 밀고 앞에서 끌기도 한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길수 있고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런 믿음과 의지를 병사들에게 몇번이고 주지시켜야 한다.

하늘이 도우시니 우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다ㅡ라고.

병사들에게 믿음을 주는 멘트 중에서,

"하늘은 우리 편이다."

라는 말보다 더한 위한과 용기가 되는 것이 또 어디 있었을까.

더욱이 하늘이 곧 신이고 절대자였던 고대시대에.

이물림에서 금인과 병기를 얻었다는 것은

그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방법의 한가지였을다.

(아니면 말고.)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又有人曰, “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 王又許之,]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키는 9척쯤이고 얼굴은 희며 눈에 광채가 있었다. 왕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신은 북명(北溟) 사람 괴유(怪由)입니다. 은밀히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정벌하신다 하니, 신은 따라가서 부여왕의 목을 베고자 합니다.”

왕은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신은 적곡(赤谷) 사람 마로(麻盧)입니다. 긴 창으로 인도하기를 청합니다.”

왕은 또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4년(AD. 21) 겨울 12월

 


<바람의 나라 1권 中 괴유의 첫 등장 씬.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다.>

 

괴유나 마로는 이때 처음 등장하는데, 단지 괴유가 북명 출신이고,

마로는 적곡 사람이라는 것밖에는 별다른 사항이 알려진 것이 없다. 

<바람의 나라>에선 이것에 상상력을 부여하여, 괴유가 원래 부여사람으로

대소왕에게 멸살당한 일족의 후손이라는 설정을 부여해놨다. 

 

하지만 굳이 그런 것이 아니어도, 부여에 대해서 평소 반감을 가지고 있던 무리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니,

단순히 만화에 묘사된 것을 믿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라 말할수 없지만, 

괴유라는 인물을 부여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 인물로 묘사한 김진 작가의 설정은

그런 점에서 무척 매끄러운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부여원정에 참전하여 대무신왕을 도왔고, 그가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데 한몫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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