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2379

장옥정의 파멸, 결국 모든 게 숙종 탓이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첫 번째 이야기
13.04.08 16:40 l 최종 업데이트 13.04.08 16:40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포스터. ⓒ SBS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장옥정(장희빈, 희빈 장씨)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편견의 벽은 여전히 높고 높기만 하다.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장옥정은 악하고 표독해서 파멸을 자초했다'고들 생각하고 있다. 

이런 인식을 심어놓은 장본인 중 하나는 소설 <사씨남정기>를 남긴 김만중(1637~1692년)이다. 장옥정의 전성기에 <사씨남정기>를 창작한 김만중은 이 소설을 통해 '장옥정은 남의 가정을 파탄내고 안방을 차지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 죽을 여자'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김만중이 남인당 집권기간(1689~1694년) 중에 유배됐다가 사망한 서인당 출신 정치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이 소설을 쓴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남인당의 지지를 받는 장옥정의 위상을 깎아내림으로써 남인당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이 소설을 썼던 것이다. 

김만중의 작품은 기득권 세력인 서인당의 권력에 힘입어 마치 실화 소설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것은 장옥정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그의 패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제껏 나온 소설 중에, 일국의 왕후를 이처럼 철저히 저주하고 결과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만 아니라 3백년이 넘도록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은 <사씨남정기> 밖에 없을 것이다.  

<사씨남정기>와 동떨어진 숙종의 실제 모습

하지만, 숙종시대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사씨남정기>가 조장한 허구의 이미지가 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교활하고 악독해서 파멸을 자초한 장옥정의 이미지, 또 여자한테 눈이 멀어 갈팡질팡하다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숙종의 이미지가 진실과 무관하다는 점은 숙종시대 역사를 살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사씨남정기>가 조장한 이미지와 달리, 조선 제19대 주상인 숙종은 상당히 강력한 군주였다. 이 점은 그의 묘호(사당의 칭호)에서도 잘 드러난다. 왕이 죽으면 대신들이 왕의 이미지를 근거로 묘호를 결정했다. 경종 즉위년 6월 15일자(1720년 7월 19일) <경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이 죽은 지 7일 뒤에 2품 이상의 대신들이 회의를 열어 숙종이란 묘호를 결정했다. 

대신들이 종합한 숙종의 이미지는 강덕극취(剛德克就)였다. '강직하고 덕스럽고 이겨내며 나아간다'는 뜻이었다. 대신들은 숙종이 강하고 저돌적이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강덕극취를 한마디로 요약한 게 엄숙할 숙(肅)이다. 숙종(肅宗)이란 묘호는 이렇게 결정됐다. 


▲  숙종과 인현왕후의 무덤인 명릉.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소재. ⓒ 문화재청

이렇게 숙종을 가까이서 겪어본 대신들은 그를 '강하고 저돌적인 인물'로 파악했다. <사씨남정기>가 조장한 이미지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김만중이 숙종의 이미지를 '어딘가 모자란 남편'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교활하고 악독한 장옥정'의 이미지와 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 숙종은 남한테 잘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장옥정한테 휘둘려서 왕실 가정사를 망쳐 놓았으리라고 볼 수 있을까.

숙종시대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숙종뿐 아니라 장옥정의 이미지도 많이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장옥정은 정치적으로 버림받은 희생양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장옥정이 악독해서 파멸한 게 아니라, 숙종한테 이용당하다가 파멸했던 것이다. 악독했기 때문에 패한 게 아니라, 패했기 때문에 악독한 사람으로 폄하됐던 것이다.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당파투쟁 조장한 숙종

숙종 이전의 정치는, 사대부 당파들이 정치를 주도하고 왕은 그것을 따라가는 구도로 전개됐다. 그런데 숙종 때부터는 왕이 당파투쟁을 조정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그만큼 왕권이 강해진 것이다. 

왕권이 강화되는 양상은 조선·청나라·일본 3국에서 똑같이 나타났다. 17·18세기 동아시아 평화에 힘입어 조선의 주상, 청나라의 황제, 일본의 쇼군(무사정권 수반)이 똑같이 강해졌던 것이다. 참고로, 일본 역사에서는 일왕(소위 천황)뿐만 아니라 쇼군과 관련해서도 왕권이란 표현이 사용되는 예가 많다. 

숙종은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단순히 당파투쟁을 '조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당파투쟁을 '조장'하기까지 했다. 특정 당파를 밀어주다가 그쪽이 너무 세지면 반대쪽에 힘을 실어준 뒤 싸움을 붙이곤 했던 것이다. 환국(換局)이라는 급진적 정변이 숙종 때 자주 발생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숙종이 싸움을 부추기는 바람에 당파투쟁이 한층 더 격렬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숙종은 조정의 당파투쟁을 궁중의 여인천하와 연계시키는 방법으로 왕권을 더욱 더 강화했다. 숙종은 집권당을 바꿀 때마다 집권당 출신 여인을 왕비로 책봉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한 당파가 집권당과 중전 자리를 동시에 보유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서인당이 정권을 잡으면 서인당 여인이 왕비가 되고, 남인당이 정권을 잡으면 남인당 여인이 왕비가 됐던 것이다.


▲  장옥정의 무덤인 대빈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소재. ⓒ 김종성

이렇게 되자 각 당파의 목표는 중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됐고, 이것은 왕비 책봉권을 가진 숙종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장옥정, 인현왕후, 최숙빈(숙빈 최씨, 영조의 생모) 같은 여인들의 명암이 엇갈렸다. 서인당 쪽인 인현왕후나 최숙빈처럼 남인당 쪽인 장옥정도 이런 구도의 피해자였다. 숙종시대에 당파투쟁과 여인천하가 연계된 양상을 살펴보면, 이 점을 좀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는 인경왕후였다. 인경왕후는 숙종이 세자 시절에 결혼한 여인이다. 그러므로 당파투쟁과 여인천하가 연계되는 양상은 인경왕후와는 관계가 없었다. 이런 양상이 출현한 것은 인경왕후가 사망하면서부터였다. 

숙종은 남인당이 정권을 잡은 1674년에 왕이 됐다. 그런데 서인당이 경신환국이란 정변으로 권력을 되찾은 1680년에 인경왕후가 사망했다. 서인당이 집권당이 된 상태에서 중전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듬해인 1681년에 서인당 출신인 인현왕후가 두 번째 왕비가 됐다. 

8년 만인 1689년에 기사환국이란 정권교체가 발생하고 남인당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자 바로 그 해에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이듬해에 장옥정이 왕비가 됐다. 하지만, 4년 만인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서인당이 재집권하자, 장옥정이 후궁으로 격하되고 인현왕후가 복귀했다. 

그 후로는 서인당과 그 분파들(노론·소론)이 계속 정권을 잡았고,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는 같은 서인당 출신인 인원왕후가 왕비가 됐다. 인현왕후가 복귀한 뒤로는 서인당의 파워가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에, 서인당의 장기 집권이 숙종의 왕권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사랑보다 권력이 소중했던 숙종, 장옥정을 내버리다

위와 같이 숙종은 당파투쟁의 추이를 보아 가며 왕비를 교체했다. 집권당이 너무 세졌다 싶으면 기존 왕비에 대한 싫증을 표시함으로서 야당에 힘을 실어주고, 야당이 어느 정도 세지면 야당 쪽 여인을 왕비로 만듦과 동시에 집권당도 교체했다. 

이런 과정에서 장옥정도 희생양이었다. 숙종은 장옥정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다른 여인들을 이용하듯 장옥정도 이용하다가 결국 내버렸다. 숙종에게는 사랑보다는 권력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숙종의 버림을 받은 장옥정은 중전 폐위와 사형이라는 연이은 불행을 당했다.  

숙종시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장옥정은 인현왕후·최숙빈과 더불어 이 시대 정치의 피해자이자 희생양이었다. 장옥정은 숙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이용하다가 내버린 여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사씨남정기>라는 문학작품마저 장옥정을 교활하고 악독한 여인으로 만들어놓았다. 숙종은 장옥정을 악용하고 김만중은 장옥정에게 먹칠을 한 셈이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