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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성산성

고려성산성 전경(2006년)

1)학술조사

고려성산성(高麗城山城)은 명청대(明淸代)의 《요동지(遼東志)》와 《전요지(全遼志)》, 1697년 낙운(駱雲)이 편찬한 《개평현지(蓋平縣志)》 등에 ‘석성(石城)’ 또는 ‘고려성(高麗城)’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1920년대 일본인 시마다 코우(島田好)가 답사하였고, 1994년에는 하야시 나오키(林直樹) 등 일본인 학자들이 성을 답사하고 간략한 보고서를 남겼다. 한편, 1950년대 이래 이문신(李文信) 등 중국학자들이 여러 차례 답사․조사하였고, 1963년 9월 30일 요녕성 문물보호단위(遼寧省 文物保護單位)로 공포되었다.

개주 고려성산성 위치도

2)위치와 환경

고려성산성은 개주(蓋州) 동북방 7.5km 거리의 청석령향 고려성촌(靑石嶺鄕 高麗城村) 동쪽 산에 위치하였다. 이 산은 석성산(石城山) 또는 고려성산으로 불린다. 서북 골짜기 입구를 통해 성 내부로 진입할 수 있다. 골짜기 입구의 남북 양측에는 해발 300m 전후의 비교적 높은 노청산(老靑山)과 노경산(老慶山)이 있다. 두 산에서 동쪽으로 기다랗게 뻗은 산줄기가 남북 양쪽에서 타원형을 이루며 산성을 감싸다가, 골짜기 입구 맞은편인 동남쪽에서 약간 낮은 고개를 이루며 만난다. 노경산(老慶山)에서 뻗은 북쪽 산줄기는 일직선으로 그다지 험준하지 않은 반면, 노청산(老靑山)에서 뻗은 남쪽 산줄기는 암벽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험준하다. 내부에는 평탄한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고, 중앙에는 ‘금전산(金殿山)’이라는 언덕산이 있다. 고려성산성은 골짜기 입구를 제외한 사방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에는 평지가 넓게 펼쳐진 천혜의 요새지인 것이다. 

요동지역 전체를 놓고 보면 고려성산성은 천산산맥(千山山脈)에서 요하 하구(遼河 河口)로 길게 뻗은 지맥(支脈)의 끝자락으로서 요동평원과 요동반도를 가르는 경계지대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요동평원(遼東平原)에서 요동반도로 나아가거나, 대청하(大淸河)를 거쳐 벽류하(碧流河) 연안으로 나아갈 경우 고려성산성 남쪽의 청석령(靑石嶺)을 통과하여야 한다. 특히 개주~영구(蓋州~營口)의 염전지대(鹽田地帶)는 본래 갯벌이었을 것이므로 요하하류(遼河河流)에서 육로(陸路)를 통해 요동반도 남단이나 벽류하 유역으로 나아갈 경우에도 고려성산성 일대를 통과하여야 했다. 고려성산성은 요동평원에서 요동반도로 진입하는 길목의 전력적 요충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개주 고려성산성 위치도

3)유적의 현황과 성곽의 구조

산성을 둘러싼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대체로 불규칙하다. 동서(東西) 직경 1.5km, 남북(南北) 직경 1km로서 전체 둘레는 대략 5km 정도이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토축, 토석혼축, 석축 등 다양하게 축조하였으며, 남벽 일부 구간은 수직 암벽을 천연성벽으로 삼기도 하였다. 1994년 고려성산성(高麗城山城)을 답사한 하야시 나오키(林直樹)에 따르면, 서쪽 수구문(水口門)에서 서남모서리의 노청산(老靑山)에 이르는 구간은 니편암계(泥片巖系) 성돌을 가지런히 층층이 쌓아 올린 석벽(石壁)이라고 한다. 그리고 산등성이 바깥쪽에 성벽을 축조하였고, 성벽 안쪽에는 너비 5~6m의 회곽도(廻郭道)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노청산(老靑山)~남문의 남벽 서단은 흙으로 토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특히 경사가 완만한 남문 동측에 흙으로 대형 치성(雉城)을 축조하여 방어상의 취약점을 보완하였다. 남문 부근 성벽 단면에는 9cm 전후의 두께로 층층이 다진 성벽 층위가 잘 남아 있다. 그리고 남벽 동단은 수직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는 한편, 암벽 정상부를 따라 석축성벽을 축조하였다고 한다. 북벽의 서단에서는 토축성벽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서쪽 골짜기 입구와 동쪽 고개에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토축성벽을 축조하였다. 서쪽 골짜기 입구에는 점토질이 혼합된 황갈색 사질토를 9cm 전후로 층층이 다지면서 쌓아 올렸는데, 허물어진 단면에는 횡으로 곁을 이룬 성벽 층위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성벽은 아래 너비 60~100m, 높이 20~30m로서 거대할 뿐 아니라,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좌우 산등성이와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산등성이와 성벽을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한편, 서문(西門)이나 서쪽 수구문(水口門) 부근 성벽 아래쪽에는 돌멩이나 자갈이 흩어져 있다. 특히 서문(西門) 바깥쪽 성벽 아래에는 할석(割石)을 2m 정도 겹겹이 쌓아 올린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토축성벽(土築城壁)을 구축하기에 앞서 자갈, 돌멩이, 할석 등으로 성벽 기초를 다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중앙의 차단벽 - 성벽 중앙의 언덕산 북측 서단과 북쪽 산등성이의 기슭 사이에 길이 30m 너비 10m 정도의 차단벽을 구축하였다. 성 내부 도로에 의해 차단벽 중앙부가 절단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차단벽의 축성방식을 엿볼 수 있다. 북측 단면의 경우, 점토질이 섞인 황토(黃土)를 층층이 다져 둥그스름하게 쌓아 올리고 바깥쪽 하단에 돌을 깔아 기초를 다진 다음, 그 위에 자갈이나 할석이 섞인 흙을 두텁고 높게 성토하였다. 반면, 남측 단면의 경우에는 깬돌과 자갈이 드문드문 섞인 황갈색 사질토를 성토(盛土)하였는데, 중간 부분에 자갈을 12cm 두께로 두 겹 쌓았다. 이처럼 차단벽은 길이 30m에 불과하지만 아주 다양한 축성방식으로 구축하였다.


4)역사적 성격

고려성산성은 군사전략상 요동평원과 요동반도 경계지대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즉 요동평원에서 요동반도로 진입하든가 반대로 요동반도에서 해안가를 따라 요동평원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고려성산성을 거쳐야 했다. 645년 당 장량(唐 張亮)의 진군로(進軍路)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요동평원(遼東平原)에서 천산산맥(千山山脈)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는 본계~봉성로(本溪~鳳城路), 해성~수암로(海城~岫岩路), 개주~장하로(蓋州~莊河路) 등 세 루트가 있는데, 고려성산성은 가장 아래쪽 루트인 개주~장하로(蓋州~莊河路)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고려성산성은 군사전략상으로 요동평원과 요동반도의 경계지대이면서 요동평원~압록강일대 루트의 길목이라는 이중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려성산성은 해성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이나 등탑 백암성(白巖城)과 같은 비슷한 위치의 고구려 산성보다 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추정된다. 더욱이 이들 각 루트에 위치한 성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둔다면 고려성산성은 군사전략적으로 요하 남부지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여겨진다. 

한편, 한대 평곽현(漢代 平郭縣)에 ‘철관(鐵官)’․‘염관(鹽官)’이 설치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려성산성은 지방지배라는 측면에서도 주변의 다른 산성보다 중요하였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총둘레가 5km를 넘는 초대형 산성이면서 내부에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고려성산성 곧 건안성(建安城)은 고구려 시기에도 한대 평곽현(漢代 平郭縣)처럼 철산지․소금산지로서 또는 주변 일대의 소금과 철을 총괄할 정도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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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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