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0>후고려기(後高麗記)(13) - 광인"에서 이정기 관련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8809268


이정기 (2)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으로 당조는 그야말로 피폐해졌다.
 
[寶應元年, 詔以渤海爲國. 進封渤海國王, 授檢校太尉.]
보응 원년(762)에 명하여 발해를 국으로 삼았다. 발해국왕으로 올려 책봉하며 검교태위(檢校太尉)직을 주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문왕
 
당 보응 원년은 발해 문왕 대흥 25년, 간지로는 임인년에 해당한다. 이때부터 발해의 국왕들은 당으로부터 으레 받던 '대장군'이라는 칭호도 없어지고, 작위는 금오위대장군(정3품)에서 태위(정1품)로 승진했는데, 태위란 당의 3공의 하나로서 비록 '검교'라는 타이틀이 앞에 붙기는 했지만 관직의 급수가 상승한 것 자체로 의의가 있다. 당에게는 발해가 필요했다. 발해가 당을 돕기 위해서는 발해의 남쪽에 있는 신라가 발해와 으르렁대지 말아야 했고, 당이 나서서 어떻게든 두 나라 사이의 화해를 주선해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반란군 잔당들이 발해에 도망가서 그들을 획책해 당을 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실제로 안사의 난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사조의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지금의 베이징 일대에 해당하는 유주로 갔다. 그곳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발해로도, 해족이나 거란족의 땅으로도 넘어갈 수 있는 변경지대였고, 지금의 평주 석성현 동북쪽인 온천책에서 해족의 땅으로 도망치려던 사조의는 결국 자신의 수하였던 이회선의 추격병에 쫓겨 763년 1월에 자결하고 만다.
 《자치통감》에 나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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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與希逸同至靑州, 累至折沖將軍. 驍健有勇力.]
그 뒤에 후희일과 함께 청주(靑州)에 이르렀는데, 여러 번 승진하여 절충장군이 되었다. 민첩할 뿐만 아니라 용감하고 힘이 세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사조의가 토벌당하기 1년 전, 평로군은 청주를 공격해 차지했다. 안록산군이 장악하고 있던 청주를 쳐서 빼앗아 평로군의 거점으로 삼자는 이회옥의 제의에 따른 것인데, 공격은 주효하여 마침내 5월에 이르러 청주 함락, 산둥 성 중심지이자 옛날 백제가 차지한 적도 있었던 이곳에 고려인들의 거점이 마련되었다.(이회옥 자신과 그의 나라를 갖고 말하자면 훗날 그의 아들이 세운 평로치청의 수도가 되었다)
 
이 청주 공격은 이회옥 자신과, 나아가 평로번진에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비록 해족들이 차지한 평로 지역에 절도사의 직접통치가 미치지는 못했지만, 당 조정도 비로소 후희일에게 '평로치청절도사'라는 관직을 주어 평로절도사에 치청절도사까지 겸직시키고, 치주와 청주ㆍ제주ㆍ기주ㆍ밀주ㆍ해주의 6주를 맡기며 그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던 것. 아울러 당조 3백년 역사를 통틀어 절도사가 중앙에서 '임명'된 게 아니라 병사들에 의해 '추대'된 최초의 사건이었음이다.(나아가 평로절도사가 치청절도사를 겸직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기도)
 
[寶應中, 衆軍討史朝義, 至鄭州. 回紇方强暴恣橫, 諸節度皆下之. 正己時爲軍候, 獨欲以氣吞之.]
보응 연간(762)에 많은 군사가 사조의를 토벌하고자 정주(鄭州)에 모였다. 위구르[回紇]가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면서 말썽을 부렸지만 절도사들조차 통제하지 못하였다. 정기는 그때 군후(軍侯)로 있었는데 홀로 위구르를 기세로 제압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당 대종 보응 원년(762), 마침내 당의 많은 절도사들이 사조의 타도를 위해 정주로 모여들었을 때, 이회옥 역시 후희일을 따라 정주로 향했다. 이곳 정주는 당시 당의 동도였던 낙양과는 직선거리로 불과 90km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10월에 당군은 섬주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불청객과 맞닥뜨렸다. 위구르족이었다. 
 
지금 중국 신장의 위구르자치구에 사는 종족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낙양과 장안이 함락당했을 때, 선황 숙종이 장안 탈환을 위해 위구르군을 끌어들였다가 이들에게 장안 약탈을 허용하는 바람에 끔찍한 치욕을 당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대종은 이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사조의의 반란을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해 무리수를 두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동투르키스탄'이라는 망명정부의 이름을 내걸고 중국정부에게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항거하다가 결국 수백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고 알 카에다가 '우리가 대신 복수해주마'하고 나서고 하는데, 이 무렵 등리 가한이 이끄는 위구르군은 거만하기가 짝이 없었다. 그들의 힘만 믿고, 당의 장교들까지 끌어다 채찍질을 하는데, 그 와중에 당의 판관이었던 위소화가 얻어맞은 장독으로 죽기까지 했지만 그들의 힘을 빌려 사조의를 토벌해야만 하는 처지였던 당군은 군소리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회옥이 나섰다.
 
[因與其角逐, 衆軍聚觀. 約曰 "後者批之." 既逐而先正己擒其領而批其背, 回紇尿液俱下, 衆軍呼笑. 虜慚, 由是不敢爲暴.]
 위구르 장수와 각축을 벌이는데 여러 군사들이 모여 구경하였다. 약속하기를
"진 사람이 때리기로 하자."
라 하였다. 이윽고 싸움이 시작되매 정기가 먼저 위구르 장수의 옷깃을 움켜쥐고 상대의 등을 내리치니, 얻어맞은 위구르 장수는 오줌을 싸서 구경하던 군사들이 소리쳐 웃었다. 이후 부끄러워 다시는 난폭하게 굴지 못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문득 고려인들의 장기였던 수박(手拍)이 떠오른 것은 나 혼자뿐일까. 고려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당을 괴롭혀왔던 위구르의 군사들 가운데서 자신있게 나온 장수를 이회옥은 맨손으로 단 한 대로 제압해버렸다. 많은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이 일기토에서 이회옥은 그가 가지고 있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지켜보던 모든 군사들의 마음을 한번에 휘어잡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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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의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과 위구르족의 연합군은 사조의에 대한 총공세를 가했고, 사조의는 거란 땅으로 도망치려다 잡혀 죽었다. 이것이 당 광덕 원년(763년) 1월. 그렇게 사조의가 죽음으로서 9년에 걸친 안록산의 난은 종결되었다.
 
이민족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위구르 원군들이 옥신각신하는 동안 당조의 수도였던 낙양, 장안은 황폐해졌다. 성당 시대의 화려하던 문화재들은 대부분 소멸되고, 그와 동시에 여지껏 문화와 정치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척들의 힘이 쇠약해졌다. 반면 난을 평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절도사들은 그들이 지닌 군사력을 토대로 당 조정마저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길러 점차 군사적 지방분권화 현상이 강화되고, 특히 화북 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뿐인가, 군비조달을 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재정이 고갈되자 조정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소금을 전매하기에 이른다. 균전제하에서 운영되던 전통적인 조용조 세법은 토지세인 지세와 인두세인 호세를 여름, 가을 2분기로 나눠서 내는 양세법(兩稅法)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난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던 강남 지역에서는 거꾸로 전란 이전보다 더 큰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각지의 토호(土豪)와 상인들은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중앙정부 대신 지방 번진(藩鎭)의 무력세력과 결탁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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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사촌 후희일에게 그런 이회옥은 골칫덩어리였다. 같은 고려인인데다 자신을 6주절도사로 추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반란군과의 전투에서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며, 당의 군사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위구르 장수에게 본때를 보여준 통쾌한 장면을 연출해보인 이회옥이었지만, 그가 점점 세력이 커지고 병사들까지 하나둘씩 이회옥을 따르게 되면서 후희일은 이회옥을 점차 멀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회옥이 그렇게 위구르 장수와 맞짱까지 떠가면서 병사들에게 신망을 얻어가고 있을 때, 후희일 본인은 절도사랍시고 기껏해야 사냥하러 돌아다닌다던지, 사찰이나 불탑을 건립한다던지 하는 것밖에는 제대로 하는 것도 없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자기가 능력 없는줄 아는 사람들 중엔 저런식으로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해서 그 사람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이 꼭 나오고 그러지.(더구나 이회옥은 자신의 고종사촌 아우이다) 결국 후희일은 이회옥을 병마사직의 자리에서 해직하고, 친위군을 동원해 감옥에 가둬버렸다.
 
절도사인 후희일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이회옥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병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이회옥을 감싼다.
 
[尋構飛語, 侯怒囚之, 將置于法. 懷玉抱冤無訴, 于獄中疊石像佛, 黙祈冥助. 時近臘月, 心慕同儕, 嘆咤而睡。覺有人在頭上語 "李懷玉, 汝富貴時至." 卽驚覺, 顧不見人, 天尙黑. 意甚怪之, 復睡, 又聽人謂曰 "汝看牆上有靑鳥子噪, 卽是富貴時至." 卽驚覺, 復不見人. 有頃天曙, 忽有靑鳥數十, 大如雀, 時集牆上, 俄聞三軍叫呼, 逐出希逸, 壞鎖, 取懷玉, 權知留后.]
 여론이 뒤숭숭해지고 유언비어가 나돌매 절도사 후희일은 격노하여 즉시 정기를 잡아 가두고 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정기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어 옥중에 앉아 돌을 쌓아 불상을 만들고 묵묵히 신의 도움을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는 섣달이 가까워올 무렵이라 정기는 추위 속에서 한탄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이회옥이여, 네가 이제 부귀를 누릴 때가 되었노라."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주위를 감싼 것은 캄캄한 어둠 뿐. 심히 괴이하게 여기며 다시 잠이 든 정기에게 또다시 누군가가 말한다.
 "담 위에서 푸른 까마귀[靑烏子]가 지저귀는 것을 보게 되면 그때가 부귀를 얻을 때임을 알지어다."
 또다시 놀라 잠에서 깨었으나 여전히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지나 날이 밝았는데, 갑자기 수십 마리의 참새만한 푸른 까마귀들이 날아들어 담벼락으로 모여들고, 잠시 후 삼군(三軍)의 고함소리가 울리더니 희일을 내쫓아낸 다음에 자물쇠를 부수고 회옥을 옥에서 나오게 하여 유후(留后)의 자리를 대리하게 하더라.
《유양잡조(酉陽雜俎)》 인용
《태평광기》 권제137, 정응(征應)3, 이정기
 

<조선시대 태평광기 언해본. 태평광기는 북송 초기인 997년 송 태종의 명으로 고대 중국의 역대 설화를 모아 편찬했다.>
 
《구당서》에 보면, 이때 후희일은 무당과 함께 출타해 있어 성을 비운 상태였다고 했다. "거친데다 제정신이 아니었으므로 스스로 제후로 봉해진 땅까지 잃었다"고 평할 정도로, 후희일은 평로군의 군사들에게 신망을 잃고 있었다. 어차피 이판사판. 군사들이 나서서 절도사를 한 번 갈아치웠는데 또 갈아치우지 말라는 법 없지. 평로절도의 고려인 병사들에 의해서 절도사로 추대되었던 후희일은 결국 병사들의 손으로 끌어내려지고, 이회옥은 그 병사들에게 구출되어 자신이 절도사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會軍人逐希逸. 希逸奔走, 遂立正己爲帥.]
군인들이 모여 희일을 내쫓았다. 희일은 도망치고 마침내 회옥을 세워 군수(軍帥)로 삼았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태평광기》에서 말한 '유후'라는 건 원래 임시직이다. 《구당서》에도 보이듯 후희일이 이회옥에게 쫓겨난 뒤, 당 조정에서는 황족이었던 정왕(鄭王) 이막(李邈)을 새로운 평로치청절도사로 삼고, 쿠데타로 자신의 주군이자 고종사촌을 내쫓아버린 이회옥은 그가 올 때까지 평로치청의 일을 임시로 맡을 권지유후사를 맡겼다. 원래는 당 조정에서 새로운 절도사를 임명해 파견하게 되면 유후는 자동으로 자신의 권한을 잃는 시스템이지만... 이미 당 조정이 지방 번진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그딴게 무슨 소용이 있나. 번진에서 절도사 세우고 싶다면 세우는 거지. 이제 와서 지들이 뭐라고. 이회옥이 유후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절도사의 자리를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 말이다.
 
[朝廷因授平盧淄靑節度觀察使, 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 檢校工部尙書ㆍ兼禦史大夫ㆍ靑州刺史, 賜今名.]
조정에서는 이로 인하여 평로치청절도관찰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 겸 어사대부(禦史大夫)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고 지금의 이름을 하사하였다. 얼마 뒤에 검교상서(檢校尙書) 우복야(右僕射)로 올리고 요양군왕(饒陽郡王)에 책봉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구당서》에 기록된 바, 평로치청의 쿠데타는 문왕 대흥 28년(765년) 7월 신묘 초하루에 있었고, 이때의 이회옥의 나이는 33세. 지금까지 쓰던 회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비로소 이정기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한때 백제의 권역에 있었던 산동성 일원의 청주는 물론이고, 자신의 고향이었던 요령성 일대를 아우르는 평로치청번진이 이정기 한 사람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평로군에 속해있던 안동도호부의 옛 고려인들까지 이정기에게 모여들었다. 이정기는 이때부터 사실상의 완전한 독립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 무렵 당은 한창 어지러웠다. 정월부터 소의아장(昭義牙將) 배지청(裴志清)이 그 우두머리 설창(薛摐)을 내쫓고 전승사에게 항복하는가 하면, 전승사는 또 명주(洺州)를 차지하고 또다시 위주(衛州)를 공격해서 자사 설웅(薛雄)을 죽였다. 이때 전승사는 자신이 차지한 땅에다 제멋대로 관리를 두었는데, 하양(河陽)에서는 또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사(城使) 상휴명(常休明)을 동도로 내쫓고 아장(牙將) 왕유공(王惟恭)을 추대하는 등, 전국 시대가 다시 재현된 것이나 진배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가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가 된 것도 《구당서》에는 2월 갑신의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요서와 산동 일대의 해안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신라나 발해와의 모든 공적관계 및 무역권을 관장하는 직책이기도 했다. 거란이 육로를 장악하면서 끊어진 발해와의 무역로가 평로치청절도사에게 이관되면서, 발해는 해로를 통해 당과 교류했다. 산동 지역 그러니까 무왕이 장문휴를 시켜 공격하게 한 등주에는 신라 사신들의 객사인 신라관과 마찬가지로 발해관이라는 발해 사신들의 객사도 마련되어 있었다. 발해 사신들은 압록강에서 바다로 나와서 요동반도 남쪽, 여순 서남쪽 도리진에서 등주로 건너가는 항로(이 길은 섬이 많다)를 통해 당으로 들어왔다.
 
발해나 신라와의 무역은 이정기가 관장하는 평로치청번진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다. 당 조정과의 마찰 없이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가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라는 관직으로 이정기에게 부여되었고, 이정기는 발해와 신라 두 나라와의 무역권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면서 국제무역의 경제적 이득ㅡ즉 많은 돈을 벌어다 들일수 있었다. 이때에 쌓인 재력은 머지않아 그가 만들게 될 새로운 나라의 자립기반이 되어줄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정기의 역할과 역량을 무시할 수 없었던 당 조정은 급기야 그에게 요양군왕이라는 작위까지 내려주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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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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