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626150308157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고구려인 (2)

[고구려사 명장면 99] 

임기환 입력 2020.06.26. 15:03 수정 2020.07.09. 10:54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접견실 서벽 벽화에 그려져 있는 두 사람이 고구려인을 그린 것임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럼 그다음 물음은 당연하다. 왜 고구려인이 그 멀고도 먼 사마르칸트 궁전 벽화에 그려져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둘로 집약된다. 하나는 고구려인이 직접 소그드 왕국의 바르후만 왕을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때까지 온 사신 중에서 가장 먼 동쪽 땅에서 찾아온 사신이었을 것이다. 의당 바르후만은 이들 인물을 자신의 궁전 벽화에 남기고 싶어졌을 게다.


고구려인이 직접 찾아온 것이라면 이들은 왜 이곳에 나타났을까? 소그드 왕 접견실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무역을 위해 찾아온 상인은 아닐 터이고, 아마도 고구려 외교 사절로서 방문했다고 보는 게 옳겠다. 그렇다면 동북아시아의 가장 동쪽에 있는 고구려가 중앙아시아 소그드 왕국과 왜 외교 교섭이 필요했을까? 이곳을 방문한 목적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그 먼 거리를 어떤 경로로 올 수 있었는지가 더 궁금해진다.


두 번째는 고구려 사신이 오지 않았는데, 고구려인에 대한 정보나 도상이 전해져서 벽화로 남게 된 것을 상정할 수 있겠다. 물론 고구려인의 도상이야 전해질 수 있지만, 그러면 한 번도 보지 못한 고구려인 인물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것도 소그드 왕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접견실에 말이다.


이렇게 보면 먼저 바르후만 왕 시절에 고구려에서 소그드 왕국까지 사신이 내왕할 수 있었는지부터 따져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경로가 가능했는지가 탐색되어야 한다. 흔히 지금 몽골고원을 지나는 초원길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말이 좋아 '초원길'이지, 초원이라고 해서 발길 가는 곳이 다 길은 아닐 게다. 그 넒은 초원이야말로 드문드문 사람들이 사는 곳을 점점이 이어서 왔을 터인데, 구체적인 경로가 어떠했는지는 심각하게 따져보아야 하는 과제다. 더구나 두 나라 사이에 지리적 거리가 7000~8000㎞에 이르는 워낙 먼 곳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를 추상적으로 이해하곤 한다. '초원길'이라는 말 한마디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고구려에서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물지만 다행스럽게 국내에서 이재성 교수의 연구가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사신이 사마르칸드까지 가려면 일단 몽골리아의 오르콘강과 셀렝게강 상류 유역의 외튀캔산 지역까지는 가야 한다. 여기까지는 3개 노선이 있는데, 실위(室韋)를 거치는 길, 속말말갈(粟末靺鞨)을 경유하는 길, 아니면 거란(契丹)을 지나는 길이다. 실위, 속말말갈은 고구려 영향권에 있는데, 7세기 이후에 거란의 다수 세력이 고구려 영향권에서 이탈해 갔기 때문에 아마도 사마르칸트까지 가는 사절이 있었다면 앞의 두 노선, 즉 실위나 속말말갈을 경유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오르콘강 상류부터는 소그드인들의 안내를 받아서 소그디아나의 사마르칸드로 향했을 것으로 이성제 교수는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아래의 지도를 참고하여 그 경유 노선을 대략 짚어보시기 바란다. 다만 지도상에 해당 지명을 모두 표시하지 못하였음을 양해 바란다.


오르콘강 상류 초원지대에서 서쪽으로 셀렝게강 상류를 지나 항가이산맥(Khangai Mts.) 북부를 지나고, 알타이산맥을 넘어 준가리아에 들어간다. 준가리아에서는 짐사(Dzimsa, 지금의 신강 길목살이현) 부근을 지나 일리강(Illi R.) 계곡을 통해 발제티수(Zhetysu)에 이르고, 계속 서남쪽으로 나아가 이식쿨(Issyk Kul, 熱海) 혹은 추강(Chu R, 楚河, 碎葉水) 하류를 건너 탈라스(Talas)와 타슈켄트(Tashkent, 石國)를 지나고, 시르다리야(Syr -Daria)강을 건너 사마르칸드에 도착하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650년대 투르크계 북방세력의 분포도 / 이성제 박사 작성(동북아역사논총 56집 수록 논문에서 인용함)


이렇듯 비록 머나먼 길이지만 고구려에서 소그드 왕국까지 교통로가 뚫려 있기 때문에 고구려 사신이 갔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사실 길이 있다고 해서 그 길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오고 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위의 경로 탐색은 고구려 사절이 소그드 왕국에 갔다는 것을 '사실'로 설정하고, 과연 어떤 경로가 가능했을지를 추적해본 것이다. 갈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연구이지, 고구려 사절이 갔음을 논증하는 연구는 아니다.


게다가 오늘날 하이웨이처럼 길이 있다고 내 맘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위에서 살핀 교통로에는 그 길의 주인이 있게 마련이다. 초원길 일대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고 있는 투르크계 주민들이 바로 그 주인들이다. 위 경로는 이들의 영역을 통과하는 길이니 의당 이들의 동의와 허락이 있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연 이들이 고구려 사신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을까 살펴보아야 한다.


고구려 사신들이 단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멀리 소그드 왕국까지 가는 길이 아니라면 어떤 외교적·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은 당시 고구려가 적대적 관계인 당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적 활동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고구려 사절이 소그드 왕국까지 가는 행위 자체가 당의 입장에서는 반당(反唐)적인 행위다. 따라서 그 길을 열어주는 세력들은 그런 반당적 행위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묵인하는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과연 이들이 그러했을까?


전회에도 언급한 바 있듯이 645년 당 태종이 침공할 때에 고구려는 당의 서북쪽에 위치한 설연타와 손을 잡으려고 했으나 당을 두려워한 진주가한의 망설임으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진주가한이 죽고 그 뒤를 이은 다미가한(多彌可汗)은 그해 말에 당의 주력군이 고구려 전선에 나가 있음을 기회로 여기고 당을 공격하였다. 아직 당 태종이 고구려에서 미처 돌아오지 못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앞서 설연타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당군의 반격으로 설연타의 공격은 실패하였고, 오히려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온 당 태종이 설연타 공격에 대군을 투입함으로써 이듬해 646년에 설연타는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그 결과 고비사막 북쪽, 알타이산맥 동쪽의 몽골 초원은 당의 기미 지배 체제 아래로 들어갔다. 고구려가 재물로 유혹했음에도 진주가한이 끝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당의 강성한 전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결과는 진주가한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당의 국력이 강성하고 막북과 서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어느 세력이든 반당(反唐)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설연타가 패망한 뒤에 알타이산맥 서쪽의 서돌궐이 반당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서돌궐의 지도자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는 본래 당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요지도독(瑤池都督)에 임명되었던 인물이었으나 점차 서돌궐 십성(十姓) 부락을 통합하여 천산산맥 서북방의 이리하(伊犁河)와 이식쿨(Issyk -kul)호(湖) 일대를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당 태종이 죽자 651년에는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이라고 칭하면서 당에 반기를 들었다. 천산산맥 동부의 처월부(處月部) 등도 서돌궐에 호응하였다.


당으로서는 서돌궐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652년과 655년 연이어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아사나하로 본거지나 주력 부대를 깨뜨리지는 못했다. 657년 윤1월에 소정방(蘇定方)은 천산산맥 남북의 두 루트로 진격하여 서돌궐 본거지에서 아사나하로 주력 부대를 격파하고, 도주하는 아사나하로를 추격하여 이듬해 2월에 석국(石國)에서 아사나하로를 사로잡고 서돌궐을 궤멸시켰다. 석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위치했던 실크로드상 국가로, 우리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사마르칸트의 소그드 왕국, 즉 강국(康國) 바로 옆이다. 즉 소그드 왕은 당의 군대가 코앞에까지 진격해서 당에 대항한 서돌궐 수장을 포로로 삼는 장면을 목격하였던 것이다. 이후 당은 안서 4진을 설치하여 서역 일대에 대한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따라서 소그드 왕국에 고구려 사절이 나타날 수 있으려면 적어도 반당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서돌궐이 세력을 떨치고 있던 651~657년 기간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인이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면, 이 인물의 존재는 이미 고구려와 서돌궐 간에 교섭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즉 고구려와 서돌궐 사이에 수천 ㎞를 넘어 반당 연합 전선 구축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고구려 사신이 서돌궐과 연결되고, 이들의 도움으로 소그드 왕국까지 갈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가능성에 부정적인 다른 정황도 있다. 앞서 언급한 고구려 사절이 갔음직한 경로상에 위치한 회흘의 태도였다.


설연타가 패망한 이후 알타이 산맥 동쪽 몽골초원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회흘(回紇: 회골), 즉 위구르의 수장 파윤(婆閏)은 당이 서돌궐에 대한 공세를 펼칠 때에 5만 기병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반당적인 서돌궐까지 사절을 보내려고 하여도 그 교통로 중간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회흘의 친당적 태도에 의해 고구려 사절이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수도 있다.


한때 몽골 초원지대와 서역 일대에서 위세를 떨쳤던 설연타와 서돌궐이 당에 대항했다가 순식간에 궤멸하는 과정을 지켜본 당의 주변 나라들은 감히 반당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마르칸트의 소그드 왕국에 고구려 사신이 나타났다면, 그때는 반당적인 서돌궐이 이 지역에 위세를 떨쳤던 651~657년에 가능했겠지만, 고구려에서 사마르칸트까지 그 먼 노정 사이에 친당적인 회흘과 같은 존재나 몽골 초원지대에 뻗어 있는 당의 세력은 고구려 사절의 그 여정을 상정하기 어렵게 한다. 사실은 무엇일까?


다시 아프라시압 궁전의 벽화 속으로 들어가보면 고구려 사절도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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