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1>후고려기(後高麗記)(14)
2009/06/06 02:12

[代宗大曆二年至十年, 或間歲或歲內, 二三遣使朝唐.]
대종 대력 2년(767)부터 10년(775)까지, 어떤 때는 연초 어떤 때는 연말, 두세 번씩 사신을 보내어 당에 입조하였다.
《발해고》
 
《발해고》에서 기록한 내용이다. 대력 2년부터 10년까지라면 문왕 대흥 정미(767)부터 을묘(775). 저자이신 혜풍이 일일이 이 동안 몇 번 사신을 보냈는지, 책장 넘겨가면서 한쪽에 종이 놔두고 적어가며 그걸 일일이 세어보는 모습이 쉽게 연상이 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 기간 동안 발해의 대당 사신파견은 연초와 연말, 그 이외에도 연중으로 해마다 평균 2~3회로 이루어졌던 모양이다.
 
7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였다.
《책부원귀》
 
혜풍이 찾아 정리하신 내용으로 한국고전번역원 《해동역사》번역서비스를 찾아다녔다. 일단 대흥 정미년 7월부터 8월, 9월, 11월, 12월 이렇게 규칙적이진 않지만 거의 매달 사신을 들여보내 당에 조공하게 했다. (《구당서》는 아무리 찾아도 이게 안 나오더라)
 
한편 이듬해 발해 남쪽의 신라에서는 나라를 뒤흔드는 대란이 일어난다. '대공의 난'이 그것이다.
 
[秋七月, 一吉湌大恭與弟阿湌大廉叛. 集衆圍王宮三十三日, 王軍討平之, 誅九族.]
가을 7월에 일길찬 대공(大恭)이 아우 아찬 대렴(大廉)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무리를 모아 33일간 왕궁을 에워쌌다. 왕군(王軍)이 쳐서 평정하고 9족을 처형했다.
《삼국사》 권제9, 신라본기제9, 혜공왕 4년(768)
 
《삼국사》와 《삼국유사》모두에 실려있는 이 대공의 난에서 반란을 주도한 대공은 반란 당시의 벼슬에 대해서 두 책이 서로 다르게 적혀있다. 《삼국사》에 나온 일길찬(을길찬)은 17관위의 제7위인데, 《삼국유사》에서는 그가 제1품 각간(쇠뿔한)이었다고 해서 후자가 더 높다. 아마 관위가 갑자기 강등된 것에 대한 치사한 이유에서 시작된 반란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반란은 신라 전역을 휩쓸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七月三日, 大恭角干賊起. 王都及五道州郡, 幷九十六角干相戰大亂. 大恭角干家亡, 輸其家資寶帛于王宮. 新城長倉火燒, 逆黨之寶穀在沙梁‧牟梁等里中者, 亦輸入王宮. 亂彌三朔乃息, 被賞者頗多, 誅死者無算也.]
7월 3일에 대공 각간이 반란을 일으켰다[賊起]. 서울[王都]과 5도의 주ㆍ군에서 96각간이 서로 싸워 크게 어지러웠다. 대공 각간의 집안이 망하니 그의 재산과 보물들을 왕궁으로 옮겼다. 신성의 장창(長倉)이 불타버려 사량ㆍ모량 등의 리(里) 안에 있던 역당들의 재물과 곡식까지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 달만에 그쳤는데, 포상을 받은 자도 많았지만 처형당해 죽은 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혜공왕
 
혜공왕 시대란 신라 중대(中代)ㅡ김유신의 피가 섞인 하고(下古) 왕계의 마지막 시대였다. 당의 천자에 준할 정도로 왕권을 강화시키려 애썼던 무열왕계는 마침내 유력한 귀척 가문들을 멀리하고 무리할 정도로 강력한 독재왕권을 행사했지만, 그 과정에서 소외된 옛 가야ㆍ고려계 귀척들은 그야말로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뭐든지 자기들 마음대로 다 해먹으려는 사람을 보며 아니꼬워하는 심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똑같지만, 그 강력한 카리스마(라기보다는 온갖 유교적인 법제며 불교적 왕즉불 사상을 끌어들여 합리화한 전제군주로서의 권세)가 조금이라도 느슨해질라치면 언제든지 그걸 갈아엎어버리고 싶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 퍼렁별 지구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따위 답답한 세상에서 숨막혀 살기 싫거든. 다들 아시는 바지만 신라 골품제가 여간 폐쇄적이어야 말이지.
 
대공의 난이 아니어도 '혼란'의 전조는 신라 전역에서 목격되고 있었다. 범이 대궐 안에 들어오고, 반란을 일으키기 전의 대공 각간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들이 떼거지로 날아와 앉고, 월성 왕궁 화장실과 신충봉성사 소속의 밭 한가운데서 연꽃이 피어나는, 《안국병법》에서 말한 '천하대병란(天下大兵亂)'의 징조를 보면서 신라 사람들은 어쩌면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일본에서 그 '병란'의 근원을 찾으려 했을 지도 모르겠다. 자신들 안에 그 근원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채, 김유신 장군이 자기 후손 죽었다고 무덤에서 통곡을 하든 (실제로도 그랬었다는 기록이 《삼국사》에도 남아있다) 아흔 여섯 명이나 되는 각간(여기서의 각간은 지방 토호들을 포섭하기 위해 내려준 칭호이기도 하다)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든 말든 니들은 싸워라 우리는 논다 하면서 딩가딩가 처놀고 처먹고 하면 맞아야 돼요, 안 맞아야 돼요? 하고 할매가 나서서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마는 아무튼지간에 이 '대공의 난'으로 신라의 민심은 갈수록 극악해져갔다.
 
3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대흥 33년 기유(769)에도 발해는 또다시 당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때는 3월과 12월로 《발해고》에서 말한 '연초와 연말' 두 번으로 국한되어 있다. 발해에서 당에 사신을 보내기 한 달 전인 겨울 11월, 치악현(雉岳縣)에서 쥐 80여 마리가 평양을 향해서 무리지어 이동했다는 목격담이 《삼국사》에 확인된다. 침몰 직전의 배에서는 쥐나 벌레를 찾아볼 수 없다는데 전국 각지에서 누가 잘났네 어쩌네 들고 일어나는 이 신라보다는 차라리 발해가 더 평화롭고 살기 좋다는 것을 쥐들도 알았을까.
 
한편 일본에서는 770년, 간지로는 태세 경술에 해당하는 대흥 34년에 쇼토쿠 여제의 뒤를 이어 예순이 넘은 시라카베왕(白璧王)이 신료들의 추대로 덴노가 되었다. 고닌(光仁) 덴노였다.
 
[壬午, 渤海國使靑綬大夫壹萬福等三百廿五人, 駕船十七隻, 着出羽國賊地野代湊. 於常陸國安置供給.]
임오(27일)에 발해국의 사신 청수대부(靑綬大夫) 일만복(壹萬福) 등 325인이 배 17척을 타고 데와노쿠니(出羽國)의 적지(賊地) 노시로노미나토(野代湊)에 도착하였다. 히타치노쿠니(常陸國)에 안치하고 양식을 공급하였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1, 호키(寶龜) 2년(771) 6월
 
일만복은 청수대부. 왕신복보다는 1급 정도 낮은 문산관이었다. 이 무렵의 발해견일본사들은 752년에 일본에 온 모시몽 일행(75명)이 가장 많았고 그 밖에는 대체로 20여 명 수준. 이들이 타고 온 배가 몇 척인지까지도 《쇼쿠니혼키》는 상세하게 기록했다. 
 
[丙寅, 徴渤海國使靑綬大夫壹萬福已下■人, 令會賀正.]
병인(14일)에 발해국의 사신 청수대부 일만복 이하 40인을 불러, 모여서 賀正하게 하였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1, 호키(寶龜) 2년(771) 10월
 
배 한 척당 평균승선인원은 20명 정도로 잡고 17척이 타고 왔으면 사신단의 총숫자는 340명 정도인데 일행 가운데 40명만 정월 신년하례를 위해 헤이죠쿄로 불려갔고 나머지는 그대로 히타치에 머무른다. 그리고 12월 계유(21일)에 일만복 일행이 헤이죠쿄로 입성했다고 《쇼쿠니혼키》는 전한다.
 
[三年春正月壬午朔, 天皇御大極殿, 受朝. 文武百官, 渤海蕃客, 陸奧出羽蝦夷, 各依儀拜賀. 宴次侍從已上於內裏, 賜物有差.]
3년(772) 봄 정월 임오 초하루에 덴노가 다이쿄쿠덴(大極殿)에 행차하여 조례를 받았다. 문무백관과 발해의 번객, 무츠(陸奧)와 데와(出羽)의 에미시(蝦夷)가 각자 예에 따라서 배하하였다. 시종 이상에게 다이리(內裏)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물품을 내리되 차등이 있었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그래. 이때까지는 분위기 좋았다.

[甲申, 天皇臨軒. 渤海國使靑綬大夫壹萬福等貢方物.]
갑신(3일)에 덴노가 대(臺)에 나와 앉았다[臨軒]. 발해국의 사신 청수대부 일만복 등이 방물을 바쳤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정월
 
보통 방물과 함께 전달되는 것이 국서다. 쉽게 말해서 외교문서. 여기에는 발해라는 나라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에게
어떤 것을 주장하거나 설명하고, 또는 요청하는 내용이 담기는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소한 단어 하나만 갖고도 문제가 생길수 있으니 국서를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에돌려 말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丁酉, 先是, 責問渤海王表無礼於壹萬福. 是日, 告壹萬福等曰, "萬福等, 實是渤海王使者. 所上之表, 豈違例无礼乎? 由茲不收其表, 萬福等言 '夫爲臣之道, 不違君命. 是以不誤封函. 輙用奉進' 今爲違例. 返却表函." 萬福等實深憂慄. 仍再拜據地而泣更申. "君者彼此一也. 臣等歸國必應有罪. 今已參渡在於聖朝. 罪之輕重无敢所避."]
정유(16일), 앞서 일만복에게 발해왕의 표문이 무례하다며 따져 물었다. 이 날에 일만복 등에게 고하여 말했다. 
“만복 등은 실로 발해왕의 사자이다. 표문을 올린 바가 어찌 법식을 어기고 무례한가. 이에 그 표문을 거두지도 않고, 만복 등은 ‘무릇 신하된 자의 도리는 임금의 명을 어기지 않는다. 이에 봉함(封函)을 어기지 않고 輙用하여 받들어 올렸다'고 하였다. 지금 법식을 어겼다. 표함은 도로 가져가라.”
만복 등은 실로 깊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인하여 다시 절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재차 고쳤다.
“임금[君者]은 피차간에 마찬가지입니다. 신 등은 귀국하여 반드시 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미 參渡하여 성조(聖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죄의 경중(輕重)은 감히 피할 수 없습니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정월
 
임금은 피차간에 마찬가지라. 조선 통신사들도 에도에 왔을 때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조사해보니까 조선 통신사들은 일본이라는 '미개국'에 무슨 세례라도 내려주러 가는 선교사처럼 으스댔고, 일본쪽에서는 일본 나름대로 조선 통신사들을 '번국의 사신', 즉 천자국인 일본에 조공하러 온 제후국의 사신 쯤으로 조선 통신사를 대우했고, 쇼군을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조선 국왕에게 하듯이 예를 갖추라고 했다나. 조선 사신들이야 자기들은 조선왕의 신하로 번국에 불과한 일본의 쇼군에게 국왕의 예를 갖출수 없다고 했지만, 그때 일본쪽에서 나온 대답이 이러했다. 
"신하는 어딜 가나 다 똑같이 신하지 뭘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일본 바쿠후에서 오만해도 이렇게 오만할 수가 없다 싶은데, 그네들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긴 한 것이 암만 저쪽에서 천자니 황제니, 세상의 지배자니 행세를 해도 그 밑에 끼어서 변변찮은 자리나 누리면서 하는 것도 없는 말단관리에게까지 굽실거릴 수는 없다는 거다. 사장한테 '사장님'하고 깍듯이 존대말 쓴다고 그 어린 아들한테까지 '사장 아들님' 이렇게 존댓말을 쓸 수는 없잖아.
 
발해국의 사신 일만복은 어떻게든 발해와 일본 두 나라 사이에서 이 문제를 조율해보려고 애썼지만, 사흘 뒤인 19일에 일본 조정이 발해국 사신이 신물(信物)로 가져온 물건을 도로 반환하면서 사태는 더 커진다. 결국 엿새가 지난 정월 병오(25일).
 
[渤海使壹萬福等改修表文代王申謝]
발해의 사신 일만복 등이 표문을 고쳐서 왕을 대신해 사죄하였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정월 병오(25일)
 
국서를 어떻게 고쳤는지는 모르지만 사실 일개 사신인 그가 어떻게 국서를 고칠수 있을지, 그게 발각되면 그에게 갈 불이익은 없는 것인지의 자잘한 문제들을 짚어봐야 한다. 정말 그랬는지 어땠는지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발해 조정을 모욕한 이적행위이고 명백한 반역행위인 것이다. 통치자의 뜻을, 그것도 외압에 못이겨 어쩔수 없이 그러했다고 해도 말이다.
 
[是日, 饗五位已上及渤海蕃客於朝堂, 賜三種之樂. 萬福等入欲就座言上曰 "所上表文縁乖常例, 返却表函并信物訖. 而聖朝厚恩垂矜, 萬福等預於客例, 加賜爵祿. 不勝慶躍, 謹奉拜闕庭." 授大使壹萬福從三位, 副使正四位下, 大判官正五位上, 少判官正五位下, 録事并譯語並從五位下. 着緑品官已下各有差. 賜國王美濃■卅疋, 絹卅疋, 絲二百■, 調綿三百屯. 大使壹萬福已下亦各有差.]
이 날에 5위 이상 및 발해의 번객(蕃客)에게 조당(朝堂)에서 잔치를 열어주고[饗], 삼중지악(三種之樂)을 연주해 주었다. 만복 등이 들어와 자리에 나아가 앉고자[就座] 아뢰었다.
"올렸던 표문이 상례(常例)에 어긋난 까닭에 표함에 신물까지 내쳐지기에[返却] 이르렀습니다. 허나 성조(聖朝)는 두터운 은혜로 용서하시고[垂矜](?) 만복 등을 객례(客例)로 대우하시어[預] 작록(爵祿)를 더해주셨습니다. 경사스러운 마음[慶躍]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궐정(闕庭)에 봉배(奉拜)하나이다."
대사 일만복에게 종3위를, 부사에게는 정4위하, 대판관에게는 정5위상, 소판관에게는 정5위하, 녹사(録事)와 역어(譯語)에게는 나란히 종5위하를 주었다. 착록품관(着緑品官) 이하에게는 각기 차등이 있었다. 국왕에게는 미노(美濃)의 시(■) 서른 필, 견(絹) 서른 필, 실 2백 꾸러미, 조면(調綿) 3백 뭉치를 주었다. 대사 일만복 이하에게도 역시 차등이 있었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2월 임자 초하루 계축(2일)
 
아무튼지간에 일만복은 전번의 발해대사 왕신복이 받았던 정3품보다는 낮은 종3위를 받고, 부사 모창록도 발해부사 이능본의 정4위상보다 낮은 정4위하를 받았는데, 발해 본국에서의 왕신복과 일만복 두 사람이 가진 작위의 차이에서 온 것일수도 있겠지만 발해 조정에 대한 일본 조정의 섭섭함도 나름 담겨 있는 것 같다.
 
발해가 이런 식으로 일본을 자극할 만한 자극적인 국서ㅡ자칫 일본과의 국교단절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 내용을 아무렇지도 않게 국서에 담아 보낸 것은 그만큼 발해국 안에서 일본이라는 나라와의 외교에 그리 목숨 걸 정도는 아니게 될 만큼 온화되었다는 분위기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당과의 외교마찰로 나라가 세워진지 거의 백년이 다 되도록 '국왕'이 아닌 '군왕'에 일개 '대장군' 정도로 치부되던 발해가 안록산의 난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된 당조로부터 정식으로 '국왕'으로서 인정받고 국제적인 지위향상을 이루어냈던 시기였다. 8세기 후반은. 고려를 무너뜨린 원수의 나라이자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가상적국'인 당과 한창 대치하던 옛날과는 상황이 완전히 반전된 것이다. 
 
신라와의 관계에서 뭔가 개선점이 마련된 것일수도 있겠다. 전통적으로 왜와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 중시하지 않던 고려가 6세기부터 왜에 사신을 보내며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은 백제와 왜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는다는 것도 있었지만, 일단은 왜와 가장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라를 견제하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 더 컸으니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신라가 혹시라도 발해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발해는 일본을 움직여서 신라의 후방을 견제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무왕이 등주를 공격했을 때 당이 신라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己夘, 賜渤海王書云 "天皇敬問高麗國王. 朕繼體承基臨馭區宇, 思覃徳澤, 寧濟蒼生, 然則率土之濱, 化有輯於同軌. 普天之下, 恩無隔於殊隣. 昔高麗全盛時, 其王高武, 祖宗奕世, 介居瀛表, 親如兄弟, 義若君臣. 帆海梯山, 朝貢相續. 逮乎季歳, 高氏淪亡, 自尓以來, 音問寂絶, 爰■神龜四年, 王之先考左金吾衛大將軍渤海郡王遣使來朝, 始修職貢, 先朝嘉其丹款, 寵待優隆. 王襲遺風, 纂修前業, 獻誠述職, 不墜家聲. 今省來書, 頓改父道. 日下不注官品姓名, 書尾虚陳天孫僣号. 遠度王意豈有是乎? 近慮事勢疑似錯誤. 故仰有司, 停其賓禮. 但使人萬福等, 深悔前咎, 代王申謝. 朕矜遠來, 聽其悛改. 王悉此意, 永念良圖. 又高氏之世, 兵乱無休, 爲假朝威, 彼稱兄弟, 方今大氏曾無事. 故妄稱舅甥, 於禮失矣. 後歳之使, 不可更然. 若能改往自新, 寔乃繼好無窮耳, 春景漸和, 想王佳也. 今因廻使, 指此示懷. 并贈物如別."]
기묘(28일)에 발해왕에게 글을 내렸다.
"미카도는 공경히 고려국왕에게 묻소. 짐은 왕업을 잇고 기틀을 이어받아[繼體承基] 이 땅[區宇]을 臨馭하였소. 뜻을 펼친 덕택으로 창생(蒼生)을 寧濟하였고, 그렇게 짐의 땅[率土之濱]은 화목함을 이루게 되었고[輯於同軌] 온 하늘 아래에[普天之下] 은혜로움이 특별한 이웃과 거리를 두지 않았소. 옛날 고려가 전성하던 때에 그 왕 고무(高武)가 대대로[祖宗奕世] 우리 영토와 가까이 인접해 있어[介居瀛表]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왔다지만 의(義)는 군신(君臣)의 그것이었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帆海梯山] 항상 조공하였소. 逮乎 말년[季歲]에 고씨가 멸망하여[淪亡]한 이래로 안부가[音問] 끊어졌다가[寂絶] 爰■ 진키(神龜) 4년에 왕의 부군[先考]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 발해군왕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고 처음으로 직공(職貢)을 닦을 때에 선조(先朝)께서는 그 단심[丹款]을 기쁘게 여기셨고 총애하심이 극진하였소[寵待優隆]. 왕은 유풍을 이어받아 전조(前朝)의 왕업[前業]을 찬수(纂修)하고 정성을 다하여 조공을 닦아[獻誠述職](?)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아야[不墜家聲] 하였소. 지금 성(省)에서 보내온 글은 아비의 뜻[父道]을 짓밟아버린[頓改] 처사요. 날짜 밑에 관품(官品)과 성명(姓名)을 적지도 않고 국서의 끄트머리에는 함부로 천손(天孫)이라는 참람된 호칭을 썼소. 멀리서 보내온 왕의 뜻이 어찌 이러한가? 일의 형세[事勢]를 따져보니[近慮] 근소한[疑似] 착오였을 것이오. 때문에 유사(有司)에서 맞이하여 그 빈례(賓禮)로 대하였소[停]. 다만 사인(使人) 만복 등은 앞서의 咎를 깊이 반성하고 왕을 대신하여 사죄[申謝]하였소. 짐은 멀리서 온 것이 불쌍해서 그 회개[悛改](?)를 받아주었소. 왕은 이 의미를 悉하여. 유념하고[永念] 계획을 똑바로 세워 추진하시길[良圖]. 또한 고씨의 때에는 병란이 그칠 날이 없어 거짓으로 조정의 위엄을 빌리려(?) 형제라 칭했다지만, 方히 지금의 대씨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소. 때문에 제멋대로[妄] 삼촌과 조카 관계[舅甥]라고 칭함은 예에 어긋난 것. 다음에 사신이 올 때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오. 만약 능히 개과천선한다면[改往自新] 우호를 지속함이[繼好] 실로 무궁할 것이니, 봄날[春景]이 차츰 무르익을 때[漸和] 왕의 아름다운 마음[王佳]이 길이 기억될 것이라. 때문에 지금 사신을 돌려보내고 이 품은 뜻[懷]를 지시하오. 아울러 내리는 물건은 별지와 같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2월
 
여기서 말한 고려왕 고무(高武)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겠다. 보장왕의 이름이 고장이고, 영류왕의 이름이 고건무, 영양왕의 이름은 고원, 평원왕의 이름이 고평성. 영류왕 때에 고려에서 일본에 얼마나 사신을 보냈었는지 《니혼쇼키》를 다시 들여다봐야 되나.
 
일본 쪽에서 분개한 발해 국서의 '오만한' 점은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발해 가독부(황제)와 일본 덴노의 사이를 삼촌(발해)과 조카(일본)의 관계로 규정한 것, 다른 하나는 덴노 앞에서 건방지게(?) 발해 가독부를 '천손(天孫)'이라 칭한 것. 천손이라는 것은 발해 이전 고려에서 이미 사용했던, 자신들의 태왕을 가리키는 칭호였다. 중국의 '천자'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제자(天帝子)의 아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천손이라는 호칭의 유래인데, 천자나 덴노(天皇)와 마찬가지로 자국 왕의 혈통을 하늘에서 찾으려 했던 고대 신앙의 편린이다. 문왕은 자신의 아버지 무왕과 할아버지 고왕도 고려의 태조 추모왕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천제자의 아들에서 비롯된 성스러운 혈통이라 강조하고자, 대씨 왕통을 '천손'이자 '성왕(聖王)'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일본 조정에까지 과시하려 한 것이다.

[庚辰, 渤海蕃客歸郷.]
경진(29일)에 발해의 번객이 귀향하였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2월
 
여기서 말하는 '귀향'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해봤는데, 처음 일만복 일행이 수도로 들어오기 전에 발해에서부터 바다에 정박했던 곳ㅡ히타치노쿠니를 말하는 것 같다. 《쇼쿠니혼키》는 발해 번객이 '귀향'한 것이 2월이었고, 송발해객사로 임명된 타케후노무라지 도리모리 등이 출항한 것이 9월이라고 했으니 그 사이의 일곱 달이 헤이죠에서 히타치노쿠니까지 가는 기간이었거나, 아니면 무슨 사정이 있어서 히타치노쿠니에 머무른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바다로 들어가기 위해서 풍랑이 잠잠해지는 계절이 오기를 기다린 것은 아닐지.
 
[送渤海客使武生鳥守等解纜入海. 忽遭暴風, 漂著能登國. 客主僅得免死, 便於福良津安置.]
송발해객사(送渤海客使) 타케후노 도리모리(武生鳥守) 등이 배를 띄워서[解纜] 바다로 들어갔다. 난데없이 폭풍을 만나 노토노쿠니(能登國)에 표착하였다. 객주(客主)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하여 편히 후쿠라노츠(福良津)에 안치하였다.
《쇼쿠니혼키(續日本紀)》 권제32, 호키(寶龜) 3년(772) 9월 무술(21일)
 
《쇼쿠니혼키》에 보면, 이 날에 오와리노쿠니(尾張國)에서 식량이 없어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다고 한다.
 
12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구당서》에 기록된바 이 날은 12월 계유, 이때 발해 사신과 함께 말갈ㆍ실위(室韋)ㆍ거란ㆍ해족ㆍ장가(牂柯)같은 여러 이민족들, 여기에 위구르와 티벳,대식(아라비아)과 사마르칸드[康國]ㆍ타슈겐트[石國] 같은 이민족들도 같이 장안에 있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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