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goguryeo.com , http://blog.naver.com/simhopp/10077032892

요동성총 

평안남도(平安南道) 순천군(順川郡) 용봉리(龍鳳里) 방촌부락의 북쪽 강변에 있는 봉토석실분으로 석실 내부에 그림이 있는 벽화고분이다. 1934년에 처음 조사 되었고, 1953년에 다시 내부가 조사되었다. 석실의 내부구조는 동서로 긴 전실과 이 전실의 좌우에 측실, 전실 남벽 좌우에 마련된 현실모양의 묘도, 그리고 전실 북면에 4개의 서로 분리된 장방형으로 된 널을 놓았던 널받침이 마련된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무덤은 크기가 다른 편마암석재를 사용하여 쌓아 올리면서 틈새는 진흙과 회를 섞어 때웠고, 그 위 벽 전면에 회를 바르고 그림을 그렸다. 바닥에는 돌을 갈고 흙과 회를 섞어 단단히 다졌다. 연도는 서쪽의 경우 너비 1.5m, 길이 1.14m, 높이 1.54m이며, 방형에 가까운 천장은 한단의 평행받침으로 좁히고 그 위에 한 장의 판돌을 올려 마감했고, 입구는 두 개의 판돌로 막았다. 동쪽의 경우는 너비 1.28m, 길이 1.03m, 높이 1.5m로 서쪽보다 약간 작은 편이며 입구는 잡석을 쌓아 막았다. 전실은 가로 7.35m, 세로 1.28m, 중앙 전창 높이는 2.25m로 동서로 가늘고 긴 형태이며 남벽 좌우에 연도로 통하는 출입구가 있으나 문은 없다. 북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4개의 현실 입구가 마련되어 있고, 현실 사이의 벽은 모를 죽인 기둥같이 했다. 전실의 중앙 천장은 4단의 평행층단받침으로 좁혔다. 또 서쪽의 측실은 밑바닥을 32cm 높게 하고, 동측의 측실 앞에는 8각 형태의 기둥을 부러진 곳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축조 과정에서 보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기둥 높이 1.24m, 접시받침 높이 9.5cm, 주두 높이 14cm이다. 현실은 널하나만 놓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바닥을 전실보다 18cm가량 높게 했다. 

현실의 크기는 모두 같지 않으나 가로 0.8~1.12cm, 세로 2.88~3m, 북벽 높이 1.41~1.5m, 천장 높이 1.72~1.82m이다. 이 중 서쪽의 것이 가장 크나 대부분 비슷한 규모이다. 북벽은 위로 향할수록 약간 휘어지도록 쌓았다. 천장은 모두 4단 평행층단받침으로 되었으나 동쪽의 경우만 5단 받침으로 한 후 판돌을 올려 마감했다. 

벽화는 전실(前室) 전벽(前壁)에 성곽도(城廓圖), 측실(側室)에는 사신(四神), 주방, 그리고 묘실에는 인물(人物)을 그리고, 천정에 운문(雲文) 등을 그린 것이 남아있다. 도굴로 인하여 유물은 없어졌으나 수습된 것으로는 길이 10~12cm 철제관못 20개, 낚시바늘 형태의 이형철기 2점, 토기 조각 1점이 있다. 

이 무덤에 널길이 두 개 있는 것은 전실이 좁아서 안에서 널을 돌릴 수 없기 때문에, 동·서쪽에서 각각 쉽게 넣기 위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전실의 남벽 좌우에 마련된 널길 사이에 성곽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 내부에 해서(楷書)로 ‘요동성’(遼東城)이라고 씌어져 있어 무덤의 이름이 요동성총(遼東城塚)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무덤은 4개의 현실, 측실과 두 개의 널길이 달린 전실 등 중국 요양삼도호고분(遼陽三道壕古墳)과 같은 모습으로 이 무덤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으로 판단되고, 더구나 요동성(遼東城)이라고 씌어져 있는 것은 이 무덤과 요동성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말해 주는 것으로 요동성을 지켰던 고구려 장군(將軍)가족이거나 아니면 요동에서 귀화해 온 중국계 무장(武將)이거나 나아가 고구려의 세력이 요동까지 미쳤던 이후의 무덤일 것으로 여겨져 4세기경에 축조된 가장 이른 시기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요동성총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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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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