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남북정상회담 발췌본’ 자의적 평가 넣어 작성
등록 : 2013.06.21 19:47 수정 : 2013.06.21 22:23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21일 오전 대구 수성구 국정원 대구지부 앞에서 국가정보원 대선 여론조작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국정원 여직원 분장을 한 여성에게 꽃을 나눠주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대구/뉴시스

‘월간조선, 보고서 문건 보도’ 뜯어보니 원세훈 원장때인 2009년 5월 작성 
“서해평화지대 큰그림 그리자” 발언, ‘북한 NLL 무력화 빌미제공’ 해석 등 의도 따라 일부분만 발췌 인용한 듯
새누리당 무단 열람 문건과 다른듯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관련 발언을 자의적으로 인용·평가한 뒤, 이를 “대내외에 전파해 북한·좌파의 정상회담 선언 전면이행 주장을 제압해 나가겠다”는 문건이 21일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이를 인터넷에 공개한 <월간조선>은 해당 문건이 국가정보원에서 청와대 보고용으로 작성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대선을 두달여 앞둔 지난해 10월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통일비서관 출신인 새누리당 정문헌 의원은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 대통령이 엔엘엘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고, 새누리당도 이를 활용한 정치공세를 편 바 있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검토’라는 제목의 A4 용지 10쪽 분량의 이 대외비 보고서에 대해 <월간조선>은 “이명박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비밀리에 준비하던 2009년 5월에 작성됐으며, 문건을 만든 곳은 국정원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밝혔다. 문건이 작성됐다는 시기는 정 의원이 청와대에 근무하던 시점(2009~2011년)과 겹친다.

그러나 이 문건이 지난 20일 새누리당 의원들이 무단 열람·공개한 것과 같은 문건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대화록’을 열람한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국정원이 가져온 발췌본에는 분석이나 평가는 따로 없었다”고 말했다. 최소한 자신들이 본 문건과 월간조선이 보도한 자료는 다르다는 것이다. 하경준 국정원 대변인은 해당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된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월간조선>이 공개한 문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6·15 남북정상회담과, 노 전 대통령의 10·4 남북정상회담에 나온 발언, 북한 쪽 회담 당사자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으로 구성돼 있다. 문건은 앞뒤 맥락 없이 잘라낸 전직 두 대통령의 발언을, ①편향적·감성적 대북인식 ②국가원수로서 안보의식 결여 ③대못박기·협상입지 약화 자초 등 국익 저해 ④북한의 대외인식에 동조·외교적 문제 야기 소지 ⑤김정일에 대한 지나친 저자세로 국가 품위 손상이라는 제목이 달린 항목들로 다시 분류했다. 문건에 등장하는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7건, 노 전 대통령 발언은 24건에 불과하다. 장시간 진행되는 남북정상회담에 비춰볼 때, 문건 작성자의 ‘의도’에 따라 대화의 극히 일부분만이 발췌·인용된 것으로 보인다.

논란이 되고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 발언을 두고, 해당 문건은 노 전 대통령이 했다는 단 2건의 발언만을 소개하고 있다. “NLL 문제, 그것이 국제법적인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은 것인데… 남측에서는 이걸 영토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헌법 문제라고 나오고 있는데 헌법 문제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내가 맞서 나갈 수 있습니다”, “안보군사 지도 위에다가 평화경제 지도를 덮어 그려 서해평화협력지대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자는 것입니다”라는 발언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여러 차례 밝혔던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이라는 큰 틀을 설명하면서 나올 수 있는 발언들이다. 그러나 해당 문건은 이 발언에 대해 “형식적인 남북관계에 집착, 북한에 끌려다니기식 회담. 남북기본합의서 등을 통해 남북이 서해경계선으로 확인한 NLL을 무시. 북한의 NLL 무력화 빌미를 제공”했다고 임의의 해석을 갖다붙였다.

문건은 “이 같은 6·15 및 10·4 선언 문제점을 대내외에 전파해, 북한·좌파의 선언 전면이행 주장을 제압하고, 우리 대북정책의 정당성을 부각해 나가겠다”며 작성 의도와 활용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국정원이 만들어 청와대에 보고한 문건이 맞다면, 노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을 포기했다는 새누리당 주장의 ‘뿌리’에 해당하는 문건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한겨레>는 정문헌 의원에게 청와대 시절 이 문건을 봤는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 문건이 담고 있는 평가는 노 전 대통령과 당시 청와대의 공식 설명과도 큰 차이가 난다. 실제로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7년 11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참석한 노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할 때) 엔엘엘, 안 건드리고 왔다. 덜컥 ‘엔엘엘을 다시 그읍시다’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우리 형편이 아니다.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합의 못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10월 청와대 국정브리핑도 “‘엔엘엘은 정전협정 이후 남북간에 유지되어 온 실질적 해상 경계선으로서,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 과정에서 새로운 해상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확고히 준수해 나간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 문건에 등장하는 나머지 평가들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인 마찬가지다. “자주가 고립이 아니라 진짜 자주가 될 수 있도록…”이라는 발언(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는 “북한의 용어 혼란 전술 사례인 ‘자주’를 무비판 수용”했다며 “편향적·감성적 대북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설’했다. 또 전직 대통령들의 발언에 대해 ‘종북좌파적 시각’, ‘국가안보 소홀’, ‘위험한 안보관 표출’ 등의 평가를 달았다. 노 전 대통령이 경박한 단어를 사용하고 “위원장님”이라는 호칭을 3회,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낮추는 “저”라는 표현을 1회 사용해 “국가원수로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말실수도 빈번했다”는 터무니없는 분석까지 붙여놓았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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