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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南北國時代)

한국사를 시대구분할 때 통일신라와 발해가 병존한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의 시기. 일반적으로 발해가 건국된 지역과 발해국의 주민구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발해를 건국한 고구려의 구장(舊將) 대조영(大祖榮) 집단의 출자문제, 더 나아가서는 발해문화 담당자의 민족적 귀속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발해사를 보는 각국의 입장 차이는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발해사 연구의 기본 사료인 《구당서》 발해말갈전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별종”이라는 기록과, 《신당서》 발해전의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附)한 자”라는 기록이 논란의 근거가 되었던 셈이다. 발해인 스스로가 남긴 발해사에 관한 문헌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발해사에 대한 인식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검토해 보는 것도 문제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발해기사를 단편적으로 전해주는 최치원(崔致遠)의 《최문창후전집》과 《삼국사기》 등에서는 발해를 지칭하는 ‘북국(北國)’이라는 용어가 상대적으로 신라를 ‘남국(南國)’으로 인식한 동일 역사체 의식의 소산인지, 아니면 단순히 ‘북쪽의 나라’라는 위치상의 개념에 불과한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중국측 자료를 인용해서는 말갈계 국가로, 신라고기 등을 통해서는 고구려계가 건국했다는 사실만을 전했을 뿐 찬자(撰者) 나름의 견해는 찾아볼 수 없다. 

발해사를 한국 역사로서 인식한 것은 이승휴(李承休)가 《제왕운기(帝王韻記)》에서 고구려의 구장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했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직 통일신라와 병립시켜 ‘남북국’이라는 발상을 하지는 않았다. 이는 우리 민족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조선 후기, 즉 1784년(정조 8)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에 와서야 가능하였다. 유득공은 그 서문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통일신라·발해가 공존한 시기는 남북국시대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1864년(고종 1)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도 발해가 고구려의 옛 땅을 이어받아 신라와 함께 200년간 남북국을 이루었다고 보았다. 

일제강점기에 장도빈·안확·권덕규 등도 이 시기를 남북국 또는 남북조라고 지칭하였다. 8·15 광복 후 북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박시형·주영헌 등이 발해사를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입장에서 연구했으나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은 데 반하여, 70년대 남한의 이우성에 의하여 남북국시대론이 적극 제기되어, 현재는 많은 개설서를 비롯, 국정교과서까지도 이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남북국시대론의 근거는 무엇이며 과연 타당성을 갖는 것인가? 발해는 대외적인 팽창과 대내적인 체제정비를 시행하면서 당(唐)·신라와 외교관계를 가졌다. 신라가 721년(성덕왕 20) 발해의 급속한 영토 팽창에 대비하여 북쪽 경계에 장성을 쌓았고, 732~733년 무왕의 당나라의 등주 공격 때 신라가 당나라 편에 가담했다는 것을 근거로 발해와 신라의 관계를 종래에는 대립의 시각에서만 보았다. 그러나 757년(경덕왕 16) 간헐적으로 이용된 신라도로를 상설적인 교통로로 삼았다든가, 790년(원성왕 6)과 812년(헌덕왕 4) 2회에 걸쳐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9세기 중반 등주에 신라관·발해관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던 사실로 볼 때, 그들 사이에는 대립만이 아니라 상호교류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897년 신라와 발해 사신 사이의 쟁장(爭長)사건, 906년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서의 등제서열에 관한 문제도 적대의식의 발로라기보다는 당을 매개로 한 문화적인 경쟁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더욱이 거란이 압박을 가하자 발해와 신라 사이에 비밀협상이 시도되었고, 925년 거란이 발해를 멸할 때 신라군이 일부 참전했다는 사실은 발해와 신라 사이에 동질성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당시 당나라에 있던 신라인도 고구려 후예가 발해를 건국했다고 인식하였으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인도 발해 유민을 원래의 땅, 즉 고구려의 땅이던 요양(遼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727년 발해 무왕이 일본과 주고받은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터전을 회복’했다든가, ‘고구려 국왕’이라 칭한 사실에서 발해 왕실이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였고 일본에서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해 멸망 후 고려로 귀부(歸附)해온 고구려 계통의 일부 지배층에 대해 고려 태조가 후히 대접하고, 발해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했던 것도 동족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근거에도 불구하고 남북국시대론의 문제점은 여전히 남는다.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구성함으로써 발해의 제도와 문화에서 고구려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지만,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층이 말갈족인 상황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일정한 이질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거란의 침입시 발해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데서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신라와 발해의 일반민 사이에서 동일 역사체의식, 즉 민족의식이 어느 정도 공유되었을지도 의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대부분 지배층에 한정된 자료이므로 일반민의 인식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양국 일반민 사이에 동일한 역사의식을 공유한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남북국시대라는 용어 자체가 사회구성체론에 근거한 시대구분이 아니고 왕조 중심의 시대구분이 가지는 결함을 내포하였지만,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일정한 의미를 가진 용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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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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