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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한의 성립 : 마한의 원류는 발해만 일대 고조선인 디아스포라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2020년 01월 15일(수) 00:00  


중국 ‘삼국지’에 첫 기록

기원전 3세기초 아산만 일대 태동, 전라·경기·충청이 마한 영역

화순 유물, 요녕 고조선 문화와 연관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유물.


◇ 마한에 대한 첫 문헌기록


마한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에 처음 보인다. 3세기 후엽 서진 역사가 진수가 편찬한 이 책에는 마한이 한(韓)에 속하며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을 구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 사서에서 고조선 다음에 등장하면서 삼국시대에 앞선 역사적 실체이다. 집단 상호간에 구별하는 호칭은 선사시대에도 있었을 것이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명칭이 없기 때문에 막연하게 암사동문화, 송국리문화 등으로 불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기록된 내용보다는 기록되지 못한 내용들이 훨씬 더 많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와같은 궁금증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겨 놓은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남아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많지 않아 속 시원하게 밝혀내기는 쉽지 않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 문헌에서 확인되는 마한의 성립 시기


마한은 역사적 실체이므로 성립에 대한 문제는 문헌 기록에서부터 풀어 나가야 한다. 남아있는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하는 것은 위만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다. ‘위략’에는 연나라에서 활동하였던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한 다음, 한나라가 침공하니 막아야 한다고 준왕을 속이고 정권을 탈취하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는 이를 인용하면서 준왕이 바다를 통해 한(韓) 지역으로 망명하여 한왕을 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194년에 일어났던 사건인데 당시 한이라는 역사적 실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조선 준왕이 남하하였던 시기의 한은 아직 마한으로 불리지 않았다. 나중에 진한과 변한이 분화된 다음에 서로 구별하기 위해 마한이라 불린 것이다. 이때의 마한은 말과는 무관하다. 아마도 ‘말한’, ‘몰한’ 등으로 불린 것이 ‘말 마’자를 차용하여 표기되었을 것이다. ‘말’, ‘몰’ 등은 크고 으뜸이 된다는 뜻이므로 그렇게 불러 새로 생긴 진한이나 변한과 구분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고종에 의해 이름 지어진 ‘대한제국’의 ‘대한’ 역시 ‘큰 한’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한의 성립 시기는 진한이나 변한과 구분되기 시작하였던 시기로 보아야할까? 그렇게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기원전 2세기말을 마한의 성립 겸 삼한의 성립 시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한은 진변한이 성립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한과 동일한 것이므로 한의 성립이 곧 마한의 성립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194년 이전의 한에 대한 기록은 없기 때문에 고고학 자료로 접근해 볼 수 밖에 없다.


청동기 유물(국보 제143호)이 다량 출토된 화순군 대곡리 유적. 이 유적은 지석강을 축으로 펼쳐진 드넓은 충적평야를 조망하는 빼어난 입지 때문에 마한 소국의 수장층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 마한과 그 주변 세력들


고조선 준왕이 망명하였을 때의 한은 비파형동검으로 대표되었던 청동기사회가 세형동검과 철기를 사용하는 새로운 사회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는 주조철부와 같은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청동기시대와 구분하여 흔히 초기철기시대라고 부르지만 이는 적절한 명칭은 아니다. 초기철기시대는 1853년 덴마크 톰센이 문헌기록이 없는 북유럽 선사시대의 발전 과정을 도구의 재료에 따라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구분한 것에 따른 것이다.


이와같은 시대구분은 문헌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에 국한되는 것이고, 문헌기록이 존재하는 시기부터는 역사적 명칭을 사용하여야 한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에 해당하는 철기시대는 물론이고 그동안 설화로 인식되었던 하(夏)의 실체가 고고학적으로 밝혀져 나감에 따라 더 이상 청동기시대라는 명칭마저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이후에는 하, 상, 주, 춘추전국, 진, 한 등 역사적 명칭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마한은 진한, 변한과 함께 삼한을 이루었음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삼한시대라고 부르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당시 주변지역에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이 공존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마한 관련 기록이 있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고학에서 본 마한의 성립 시기


문헌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마한의 성립 시기를 고고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고조선 준왕이 망명하였던 시기에 해당하는 한의 유적, 유물들이 언제부터 기존의 유적, 유물들과 구분되기 시작하였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지석묘나 석관묘와 관련되었던 청동기시대의 비파형동검문화가 목관묘와 관련된 세형동검문화로 바뀌면서 철기문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연속적인 발전이 아니라 단절적인 대변혁으로서 기원전 3세기초에 해당한다. 바로 이 시기를 역사적인 한의 성립 시기로 볼 수 있으며 경기, 충청, 전라 등 서남지역을 그 공간 범위로 설정할 수 있다.


‘삼국지’를 보면 진한과 변한은 중국 진나라 노역을 피해 온 유민들이 마한의 동쪽 땅을 얻어 정착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기원전 2세기말부터 서북지역의 고조선 문화와 직결되는 새로운 문물이 영남지역에 파급되고 있다. 고조선 말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고조선 주민들이 동남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진한과 변한이 성립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때부터 한은 진한이나 변한과 구분되어 마한이라 칭해졌던 것이다.


◇고고학에서 본 마한의 기원


그렇다면 마한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던 것일까? 마한의 성립과 직결된 기원전 3세기초의 새로운 문화는 어디가 기원이었으며, 어떤 이유로, 어느 지역으로 파급되었던 것일까? 고고학 자료를 보면 이 새로운 문화는 요녕지역이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은 고조선의 영역이었는데 기원전 3세기초 연나라 장수 진개가 침입하여 서쪽 2천여리를 빼앗았던 사실이 ‘위략’에 실려 있다. 이때 고조선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을 가능성이 높은데 일부 주민들은 배를 타고 남하하여 아산만 지역을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충남 아산 남성리와 예산 동서리 유적이 대표적인데 요녕지역 고조선 유적과 상통한다. 광주·전남지역에서는 화순 대곡리나 함평 초포리 유적이 초기에 속하는데 아산만 지역보다 약간 늦은 기원전 2세기에 해당한다.


마한의 성립을 알려주는 문헌기록은 없지만 남겨진 유적과 유물을 통해 궁금한 점들이 하나하나 밝혀져 나가고 있다. 성립 시기는 기원전 3세기초이고, 성립 지역은 아산만 일대였으며, 성립 배경은 발해만 지역의 고조선이 연나라의 침략을 받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당시 고조선인들의 선택은 다양하였으며 일부는 바닷길을 따라 서남지역으로 이주하여 청동기인들을 규합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마한은 발해만 일대 고조선인의 디아스포라에 의해 성립되었던 것이다.


   

(왼쪽) 위서 동이전 마한 기록.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라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오른쪽) 위서 동이전 준왕 관련 기록.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임영진 교수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부터 전남대에서 마한·백제고고학을 중심으로 동아시아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다. ‘백제의 영역변천’, ‘전남지역 마한 소국과 백제’(공저), ‘중국 양직공도 마한 제국’(공저) 등을 저술했다. 호남고고학회 회장과 백제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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