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국책 사업, 그 후 ① > 경인운하, 웃나? 우나? (上)   대형 국책사업, 그 후
2013/06/29 20:40 에코시네 

경인운하, 경제성 없어 수백 년간 수 없이 백지화, 그럼에도 왜 추진했을까? 


지난 5월 25일, 인천시 시천동에서 서울 개화동을 잇는 인공 수로인 경인 아라 뱃길이 개통 1년을 맞았다. 2조 3456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세금이 들어간 이 뱃길은 총 연장 18킬로미터, 폭 80미터, 수심 6미터로 되어 있다. 개통 1년이 됐지만, 이 사업에 대한 사회적 비난 여론이 거세다. 보수 언론 논설위원마저 “토건족이 주도했다”면서 “‘참 아름답고 거대한’ 오시범(誤示範) 사례”라고 꼬집을 정도다. 그러나 경인 아라 뱃길을 추진한 수자원공사(이하 수공)의 홍보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수공은 자신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전문가들을 동원해 경인 아라 뱃길이 필요한 사업이었으며, 발전 가능성이 높다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고 있다. 
 
경인 아라 뱃길은 경인운하의 새로운 명칭이다. 2009년 수공은 명칭 공모를 통해 ‘아리랑’ 후렴구 ‘아라리’에서 ‘아라’를 빌려 우리민족의 정서와 문화가 담긴 뱃길이자 천년의 숙원을 표현하고자 선정했다고 밝혔다. 불행히도 ‘경인 아라 뱃길’이란 이름에서 한반도 대운하를 ‘4대강 살리기’라 이름 짓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천년의 숙원이란 표현도 정확히 살피자면 민족 전체의 숙원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 땅 곳곳에 깊은 상처를 만들어낸 토건족의 숙원 사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인 아라 뱃길이란 명칭은 토건 세력의 욕망을 숨기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 
 
경인운하 논란의 핵심은 경제성이다. 경인운하는 2008년 이명박 정권시절 확정돼 완공됐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수 백 여 년 동안 경인운하는 경제성이 없다는 결정적 하자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울과 인천을 물길로 이으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초창기 도로가 덜 발달된 상황에서 대규모 물량을 서울로 바로 이동시킬 수 있는 운하 계획은 물류비 절감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기반 시설 조성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도로가 발달된 상황에서는 투자대비 효과가 더욱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경인운하는 경제성, 환경파괴, 지역 공동체 훼손 등에 대한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정부 개발부처가 호언장담한 수익성은 여전히 현실 가능성에 의문을 들게 만들고 있다. 경인운하는 왜 시작됐을까? 그리고 이 사업의 현재는 어떤 상태이며, 미래는 어찌 될 것인가? <대형국책 사업, 그 후> 시리즈의 첫 번째는 경인운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는 우선 1990년 대 말까지 경인운하의 과거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토건족이 왜 경인운하에 목을 맸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 조선조 민초들의 고통을 민족의 염원이라고? 
 
경인운하를 운영하고 있는 수공은 경인운하를 두고 ‘천년의 약속’, ‘민족의 염원’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그 이유가 고려 시대부터 운하를 시도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시기 지방에서 올라온 공물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만조 때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좁은 수로인 손돌목(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일대)을 거쳐야 하는데,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숙련된 뱃사람들조차 공포를 느낄 정도로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고자 인공수로를 통해 안전하게 공물을 운송하고자 운하 공사를 한 것이다. 현재 인천시 부평구와 부천시, 김포시, 서울 강서구를 흐르는 하천은 굴포천(掘浦川)이다. 여기에 한자 ‘팔 굴(掘)’이 있는 것은 인공적으로 수로를 내고자 했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고려시대, 조선시대 운하를 만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부천시 등의 자료를 보면 인천시 지하철 1호선 동수역 인근의 바위산을 뚫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굴착용 기계장비와 다이너마이트 등이 없던 시절 인력으로만 공사를 해야 했기에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굴포천 공사는 무신정권의 최우(뒤에 최이로 개명)가 주도했는데, 이때는 몽고의 침입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탓에 완공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김안로가 주도한 굴포천 공사는 400미터의 돌산을 넘지 못해 완공을 못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왕족의 안녕과 연관된 풍수지리로 해석해 왕이 중지시켰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고, 기술력 부족이라 지적하는 이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투자대비 효과가 부족한 탓이다. 조선 영조시대 청계천은 홍수 방비 등을 위해 준설 공사를 했는데, 약 두 달여간 연인원 20만 명에 3만 5천 냥, 쌀 2,300석을 투입했다. 상대적으로 쉬운 준설 공사에 많은 비용이 소용되는데, 맨땅을 파내고 돌산을 깎아 내는 사업에는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야 했겠는가? 굴포천 공사 당시, 이 사업이 정말 필요한 사업이었다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라도 했었을 것이다. 굴포천 공사를 중단한 것은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운하 건설이 정책의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며, 경제성이 맞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배층을 위한 운한 건설에 동원돼 온갖 고초를 겪었을 민초들 입장에서, 대규모 운하공사는 마뜩잖은 일이었을 것이다. 수공이 경인운하를 민초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민족의 염원이라 표현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도 경인운하 계획이 나왔었다. 1926년 5월 7일 동아일보는 <환상의 도시계획>이라 제목의 기사에서 ‘경인운하’라는 용어를 처음 보도했다. 당시 경성부(일제 강점기 서울의 명칭)는 인천과 서울에 운하를 중심으로 도시계획을 수립한다. 경성은 상업도시, 인천은 공업도시로 구상한다는 이 계획은 당시 금액으로 2억 5천만 원(圓)이 예상됐다. 당시 2억 5천만 원이 대략 어느 정도의 금액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에서 여주인공 복녀가 죽었을 때, 남편은 보상금 20원을 받고 모른 체 한다. 20원은 당시의 쌀 한가마니의 가격이었는데, 최근 쌀 한가마니 가격을 대략 17만 원(2012년 기준)과 비교해 단순 계산할 때 일제 강점기 2억 5천만 원은 현재 약 2조1천2백5십억 원에 해당한다. 현재 기준으로도 매우 큰 금액인데, 이는 조선총독부의 한 해 실행예산(1929년 2억3천6백만 원)보다 크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1934년 5월 경인운하를 재정곤란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는 입장을 밝히게 된다. 
 
해방이후 숱한 백지화 및 재추진 
 
경인운하는 1945년 해방이후에도 끊임없이 논란 거리였다. 첫 시작은 경성을 동양의 중심으로 뉴욕과 런던과 같은 도시로 만들자는 구상으로 당시 인천항이 국제무역 교역의 창구인 만큼 서울로 전기열차와 경인운하를 연결하자는 것이다. 6.25 전쟁 이후 국가 재건 사업을 위한 원조 항목에도 인천과 서울 밤섬까지의 경인운하가 포함됐다. 하지만 정부부처 내에서 경인운하 건설에 필요한 환화 142억 환(1953년에 환폐단위는 ‘원圓’에서 ‘환圜’으로 변경)과 외자 525만 달러의 구할 수 있는 방안이 없다는 지적에 나왔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경인운하는 경인지역 종합 개발 계획에 포함돼 1965년 대통령 공고 1호로 추진됐다. 이 시기 운하는 남한강 전체를 대상으로 계획 됐다. 경인운하는 1967년 당시 재선을 노리는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의 주요 공약 중에 하나였기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역시 경제성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취소된다. 1970년 3월 2일 국토종합개발 공청회에서 한 언론인은 “기술의 진보는 운하 없이 컨테이너 등 대량수송수단의 발달을 가져와 수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서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토계획을 미래예측과 기술 진보에 대한 고려를 소홀히 했다며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정확했다. 교통발달사를 보면 19세기까지는 운하의 시대였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자동차가 시대를 이어 받았다. 컨테이너는 운하가 아니어도 충분히 수송 가능했다. 
 
하지만 경인운하는 1971년 물류혁신 논리에 이어 홍수 방지를 빙자해서 다시 추진돼, 1977년 4월에 건설부는 경인운하 구간을 고시(행정기관의 결정사항을 알리는 명령적 성격)하게 된다. 경인운하는 그러게 추진되는 듯 했으나, 1980년대 들어 다시 운하의 경제성 등에 의문이 제기 된다. 더욱이 이때부터 서울의 생활하수와 공장폐수가 운하로 유입돼 인천항의 수질이 나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81년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 경인운하는 후순위로 빠졌다. 한강에서 단양까지 221Km의 남한강 운하가 더 경제성이 있어, 이를 1991년에 완공한 이후에 경인운하를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88올림픽을 대비해 한강을 정비하면서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1985년 2월 서울시는 경인운하 계획으로 도시계획시설로 묶여 있던 강서구 일대를 해제했고, 1986년에는 인천시에서도 경인운하 예정구간을 50미터 도로로 만드는 도시계획재정비계획을 확정했다. 경인운하는 또 다시 사망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시기 동안 경인운하는 6번째 백지화 된 것이다.  
 
경인운하가 다시 추진된 것은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89년이었다. 이번에는 다가오는 서해안 시대를 대비한다는 논리하에 경제성과 해양 레포츠를 살릴 수 있다고 홍보됐다. 또한 이때부터 경인운하 추진 세력은 굴포천 유역(부천시와 김포시)의 상습 침수 피해 방지를 위해 운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주창했다. 당시 경제기획원 등에서는 경제성 등 예산 문제 등으로 운하 건설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면서, 정부 부처 간의 보이지 않는 논쟁에 돌입했다. 그러한 과정으로 1992년 3월 27일 인천시는 길이 15.5킬로미터, 폭 55미터의 굴포천 방수로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를 두고 해석이 양분된다. 한쪽에서는 경인운하가 사실상 방수로로 대체돼 백지화됐다 보고 있지만, 건설부 등은 방수로 공사를 경인운하 건설의 1단계로 해석하고 있었다. 
 
 
경인운하 추진의 최전성기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0년 대 중반이었다. 1994년 1월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자유치촉진법’이 재정돼, 재벌들이 앞다퉈 SOC(사회간접자본) 사업 참여를 선언했고, 서울시, 인천시 등은 경인운하와 연계한 민자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이 시기 경인운하는 민자를 유치해 ▲ 굴포천 유역의 상습적인 홍수피해 예방 ▲ 서울 ∼ 인천 간 화물의 경제적 수송과 만성적인 내륙의 교통난을 해소 ▲ 건설 예정인 영종도 신공항과 연계해 내륙수송 수단 활용 ▲ 운하 주변 정비로 외국인의 관광명소 ▲ 87년 대선 공약 해소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건교부는 경인운하와 한강 주운과 연계한 낙동강 주운을 검토했으며, 수공은 성남시 탄천과 오산시 안성천을 잇는 서울∼평택간 운하건설(경평운하)도 검토하기까지 했다. 정부는 1996년 7월 경인운하 사업을 고시했고, 그해 말에는 국토개발연구원에서 2차 수도권정비계획안에 경인운하를 포함시켰다. 정치인들은 앞다퉈 경인운하 조기 건설을 선거 공약화 했으며, 건교부는 1997년 수자원심의관실 산하에 ‘경인운하과’를 신설해 과장직급 및 직원 8명을 발령했다. 특정 사업을 중앙부처가 업무를 전담하는 경우는 있지만, 부서 명칭 자체를 특정 사업에 맞추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이는 당시 건교부가 경인운하 추진에 적지 않게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인운하는 내륙운하 개발의 도미노 
 
해방 이후 토건세력이 경인운하에 이렇게 강력하게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운하로 화물선을 띄우고 있는 외국의 사례를 봤을 때, 단거리 운하는 결코 경제성이 있을 수 없다. 즉 장거리로 대량으로 화물을 운송해야 경제성이 나올 수 있는데, 경인운하 18킬로미터로는 수지타산이 맞을 수 없었다. 이는 이 사업을 추진한 토건세력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90년 대 중후반 민자사업으로 현대건설 등의 재벌 건설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경인운하 공사를 추진할 때, 민간건설업체들은 정부에게 경인운하의 수익성이 모호하다는 이유를 들어 더 많은 지원을 요구했다. 
 
1996년 경인운하 사업 구간에 대한 고시 이후 건설업체들과의 협상은 2년 6개월이나 걸렸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세금으로 운하 구간 매입비와 교량 설치비 등 약 4천 억 원 이상을 부담 하는 것으로 결정했고, 건설사들은 운하통행료 등을 40년 동안 마음대로 관장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주변 개발 사업 및 부대사업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인천환경운동연합에서 10 여 년 동안 경인운하 백지화 활동을 벌였던 조강희 전 사무처장은 이를 두고 “건설사들이 절대 손해 보지 않는 구조였다”며 잘라 말한다. 이는 민자유치 사업의 기본을 흔드는 것으로 특혜 시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경인운하를 추진했던 이들의 속내는 경인운하에만 머무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한강·낙동강운하를 제안한바 있는 세종연구원은 ▲ 경평운하 (탄천~오산천 연장 92킬로미터), ▲ 광평운하( 팔당댐 ~ 평택 연장 67킬로미터), ▲ 경수운하 (서울 강서구 염창교 ~수원시 서탄면 연장 62킬로미터) ▲ 수안운하 (용인시~ 시화간척지간 연장 42.6킬로미터) ▲ 경전운하(중랑천 ~ 한탄강 연장 68.1킬로미터) ▲ 경춘운하 (청평·가평 ~ 서울 연장 74.4킬로미터) 등 전국을 운하화 할 것은 제안하기도 했다. 실제 건교부는 최소한 남한강 운하(인천에서 영월까지)를 검토했고, 수공 등도 전국적으로 운하 추진 여부를 고려하고 있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운하를 통해 끊임없는 토목 공사의 창조였다. 운하는 단순히 뱃길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륙 항만 및 관광지 개발 등과 같은 주변 토지 개발 계획과 같이 갈 수밖에 없다. MB 정권의 4대강 사업의 화룡정점이 수변 지역을 개발할 수 있는 ‘친수구역 활용에 관한 특별법’이라 불리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이러한 거대한 개발 사업을 통해 개발부처는 부처의 인력과 예산과 확보할 수 있고, 건설업체들은 해외 토목공사 물량 감소에 따른 내수시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정치인들은 ‘개발이 곧 발전’이라는 그릇된 환상을 통해 표를 얻고자 했다. 결국 경인운하는 ‘내륙주운의 시금석’, 즉 운하 개발의 도미노였던 것이다. 경인운하를 통해 토건세력은 웃었을 것이고, 서민들은 고려시대, 조선시대 민초들처럼 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인운하는 화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토건세력의 욕망이 흐르고 있다. <대형국책 사업, 그 후> 시리즈 경인운하 (下)편에서는 10년 넘게 경인운하 백지화 활동을 벌였던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2000년 이후의 경인운하 백지화 활동의 현황과 현재의 경인운하 상황을 짚어보면서, 앞으로 경인운하를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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