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rus-vladivostok.mofa.go.kr/webmodule/htsboard/template/read/korboardread.jsp?typeID=15&boardid=2416&seqno=629138

연해주 발해유적(하산지역)

블라디보스톡은 해삼위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1860년 1월에 군사기지로 출발하여 1880년에 하나의 도시로 형성된 곳이다. 1917년에 이르러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이곳까지 연결되었다. 블라디보스톡이란 말에는 “동방(vostok)을 지배한다(vladet)"는 의미가 담겨져 있으니, 러시아들이 동방 진출의 발판으로 이 도시를 얼마나 중요시하였나를 가늠해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으로부터 남서쪽으로 280km 정도 떨어져 있는 하산지역의 끄라스끼노(Kraskino)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원래는 노보끼예프스크(Novokievsk)라 불렸는데 1938년 장고봉 분쟁 사건에서 전사한 소련군 장교 끄라스낀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2~3km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발해 염주의 소재지였던 끄라스끼노 성터가 있다. 추까노프까(Chukanovka) 강을 따라 가면 다다르게 된다.(얼마전까지도 얀치헤(Ianchikhe) 강으로 불렸음). 얀치헤란 염주하라는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것이므로, 이를 통하여 이 성터가 염주의 소재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끄라스끼노 마을이 청나라 때에 옌추 또는 예춘이라고 하였고 일제시대에 조선인들이 연추라고 불렀던 것도 역시 발해 시대 염주의 발음이 변한 것이다. 염주는 발해 때에 동경용원부에 속하였던 주 이름이다. 당시에 소금이 이곳에서 생산되었기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1864년경에 조선인들이 이곳에 처음 이주할 적에 중국인들이 자염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전통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끄라스끼노 성터는 남쪽 벽이 직선에 가깝고 다른 3면은 둥그스름하게 되어 있어 마치 비스듬한 타원형을 반으로 자른듯한 모습이다. 성벽높이는 1.5~2m 정도로 그리 높지 않고, 성문은 동,서,남벽에 하나씩 모두 세 개가 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성벽의 전체 윤곽과 함께 옹성에 둘러싸인 성문 자리가 뚜렷하게 누에 들어온다.

성 주변에는 고분으로 보이는 둔덕들이 여기저기 불룩불룩 튀어나온 채 들어차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지역이 늪지대로 변해 있기 때문에 답사하기는 힘들다. 한번 블라디보스톡 역사연구소에서 이 고분들을 발굴하였는데, 물이 솟아나서 중심 부분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 중단하였다고 한다.

끄라스끼노 성터를 처음으로 확인한 사람은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와 있던 빨라디 까파로프(Palladii Kafarov)이다. 지리학회의 의뢰로 1870년에 연해주를 답사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는 이 성이 발해 때에 항만을 방비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는 견해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탐험만이라는 뜻을 가진 엑스빼디찌야(Ekspeditsiia) 만에서 할구 유적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발해시기에 속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힌 사람을 1960년ㅔ 이 성을 답사하였던 샤프꾸노프이다. 이 때 비로소 성 안에서 발해시기에 해당하는 여러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빨라디 까파로프가 발견하였다고 하는 항구란 발해 시대에 일본으로 배가 왕래하던 곳이다. 발해에는 외국과 통하는 다섯 개의 주요 교통로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일본도이다. 중구 훈춘에 있던 동경용원부는 이 일본도의 출발점이기도 하면서 신라로 향하는 신라도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행차하던 사신들은 이곳에서 두만강을 통하여 바다로 나간 것이 아니고, 육로로 염주에까지 와서 배를 탔었다.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는 것보다 염주를 통하는 길이 거리상으로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발해 때에 일본과 빈번히 왕래하였으니, 발해에서 일본에 35차례, 일본에서 발해에 13차례 사신을 보냈다. 사신단 규모가 보통 105명 정도였으므로 이 항구에는 비교적 큰 배가 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샤이긴 성터에서 발견된 금나라 때의 도기에 돛을 단 범선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는데, 아마 발해에서도 이러한 배를 이용하였을 것이다. 

성 안에서는 최근에 절터와 기와 가마터가 발굴되었다. 돌을 쌓아 만든 가마는 분석 결과 한 번에 2천 내지 3천 장의 기와를 구울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여기서 구운 기와를 가지고 부근에 절을 지었다. 절은 돌로 측대를 쌓은 11.8× 10.4m 크기의 인공 대지 위에 건축되었다. 주춧돌은 6개씩 5열로 배열되어 있었고 정면은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절터에서는 대량의 기와 외에 지붕에 달았던 철제 풍탁 3점, 완형 금동불 1점, 일부가 파손된 석불 1점 그리고 불교의식에 사용되었던 그릇들이 발견되었다.

금동 불상은 아랫부분에 작은 막대가 달려 있어 제단에 꽂도록 되어 있다. 발해 불상들이 일반적으로 고식을 띠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노란색 사암에 조각된 석불 상은  광배가 달린 좌상으로서, 다른 발해 불상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샤프꾸노프 박사는 이 불상이 신라와의 교류 과정에서 그곳으로부터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발해와 신라와의 문화적 교류를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성터에서 발견된 이들 유물들은 모두 역사연구소에 전시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성터에서 1km 정도 떨어진 도축장 부근에서 청동상이 하나 발견된 적도 있다. 이것은 현재 블라디보스톡 박불관에 진열되어 있다. 관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손에는 서류 두루마리 같은 둥근 막대를 든 채 근엄하게 서 있는 모양이라고 하여 현지에서는 발해 관리의 모습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머리는 작은 리본으로 엮어서 양쪽에 두 개의 작은 상투를 틀고 있어 요즈음 어린아이의 머리 모습이 연상된다. 국내에서 발해 복식을 연구한 석사논문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이를 남자 관리상이 아니고 악기 또는 무녀와 같은 여인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아무튼 이것은 정효공주 무덤에 그려진 벽화 인물들, 그리고 상경성 출토의 벼루에 새겨진 인물상과 함께 발해인의 모습을 대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한편 엑스뻬디찌야만 건너 쪽에서는 1950년대에 빗살무늬 토기가 발견되어 <<조선원시고고학>>(평양, 1961)에서 중요하게 다룬 적이 있는 신석기 시대의 그라드까야(Gladkaia) 유적이 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자이사노프까(Zaisanovka) 유적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부근의 뽀시에뜨(Post'et) 항구 근처에서는 수렵과 해산물을 채취할 때에 일시적인 은신처로 삼았던 발해 때의 동굴 유적이 발견되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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