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seoulpost.co.kr/paper/news/view.php?newsno=9785

백제를 창업한 '온조'
임동주 서울대 겸임교수 (발행일: 2009/04/30 21:09:19)

백제의 시조 온조는 고구려 주몽왕과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다. 온조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유리가 아버지 주몽을 찾아오고 태자가 되자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복형제이니 장차 목숨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어머니 소서노 왕후와 근신들과의 회의 끝에 아리수(한강)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자는 결론을 내린다. 어차피 왕위를 갖고 싸울 바에는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는 것이 현명한 결론이었다. 

온조는 인천(미추홀)과 한강유역을 놓고 형인 비류와 논쟁을 펼쳤다. 

온조가 한강에 도읍을 정하자고 설득해도 바다에 미련이 있었던 비류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비류는 미추홀로 떠나고 온조는 남은 신하들과 백제를 건국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북쪽에서 내려온 온조 일행을 넙죽 받아주는 사람들은 없었다. 특히 이웃나라인 낙랑국과 마한의 텃세가 심했다. 시시콜콜 방해하고 딴죽을 걸었다. 

기원전 6년 온조는 한산 밑에 성을 쌓고 한성(漢城)이라 했다. 내친김에 온조는 웅천(지금의 공주)에 목책을 세웠다. 충남 직산에 위치한 마한(馬韓)의 목지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마한왕이 신하들과 상의 끝에 백제에 사신을 보내 따졌다. 

“그대들이 처음에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붙일 땅이 없기에 불쌍히 여겨 나는 동북의 100여리 땅을 양보 했소. 그 뒤로도 그대를 왕으로 예우하기에 결례가 없었소. 하지만 보답은커녕 도리어 우리 도읍과 지척인 웅천에 성책을 짓다니. 이제 우리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이오? 당장 목책을 破하시오. 아니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온조는 고민에 휩싸였다. 목책을 파하자니 우스운 꼴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대국 마한의 진노를 사서 크게 공격을 받을 판이었다. 당시 마한은 지금의 경기 충청 전라도에 위치한 54개국이 모인 연맹체 나라였다. 신하들도 갑론을박이었다. 결국 온조는 고심 끝에 결론을 내렸다. 

“목책을 파하라.” 
 
그의 육성은 심하게 젖어 있었다. 누가 영토를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무모한 행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작은 일을 참으면 나중에 화(禍)를 면한다는 말이 있다. 다음의 기회를 노리면 되는 것이다. 온통 주위에 적들로 둘러싸인 백제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일로 마한은 백제를 공격할 명분을 잃었다. 

사업의 경영도 매 한가지이다. 경쟁자가 강하게 나가면 잠시 물러서는 것도 한 가지 훌륭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오래된 얘기지만 모택동의 전술도 들 수 있겠다. 적이 공격해오면 잠시 후퇴하고, 적이 가만히 있으면 같이 다가가고, 적이 후퇴하면 공격한다는 이 전술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 

이듬해 백제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치는가 하면 민가에서는 말이 송아지를 낳았는데 머리는 하나요 몸은 둘이었다. 온조대왕은 일관(日官, 점치는 신하)을 물렀다. 

“무슨 징조인가?” 

“우물이 넘친다는 것은 왕실이 번창한다는 것입니다. 또 송아지의 몸이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것은 곧 이웃나라를 합병하신다는 징조이옵니다.” 

그 후, 온조는 와신상담 마한을 경략할 기회를 갖게 된다. 마한의 54개 국가 중의 하나인 초리국의 달서왕이 마한왕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마한의 首將격인 목지국을 공격했다. 마한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온조가 아니었다. 온조는 군사를 파견해서 두 마리의 새를 움켜잡았다. 마한을 삼킨 것이었다. 그야말로 백제는 황새와 조개 싸움에서 이익을 보는 어부였다. 

현대의 기업 경영도 같다. 기업을 물려받을 아들들끼리 난이 일어나면 경쟁자들은 내심 좋아한다. 나라도 그렇다. 우리나라에 6.25 동족상쟁의 비극이 일어나자 이웃 일본은 폐허에서 눈부시게 일어났다. 또 월남전 참전을 기화로 우리 경제는 크게 비약할 수 있었다. 

▣ 서울대학교 겸임교수, 도서출판 마야 대표 (임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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