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개 글에서 소고구려 또는 고려후국 내용을 가져왔습니다.


고려후국, 소고구려

고려후국 - 대륙연구소
북한의 《발해사》 해제 - 대륙연구소
http://210.110.162.98/palhae/bukbal1.htm , http://tadream.tistory.com/6706

북한이 발해사 연구에서 새롭게 제기한 것 중의 하나는 이른바 고려후국(高麗侯國)이다. 발해국이 있던 시기에 사료상에 나타나는 '고려(高麗)' 즉 고구려는 발해 황제국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 일본의 히노[日野開三郞]가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이라 주장하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장국종 등이 발해사적 시각에서 재구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려후국]은 발해국에서 고구려적 성격을 가장 많이 띤 지역으로 발해시대에도 고구려 문화를 가장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 지역 문화를 고구려 시대의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실은 [고려후국] 문화였다고 한다. [고려후국]의 역사상이 밝혀짐으로 인해, 지금까지 당나라 지역으로도 오해되고 있던 평안도를 비롯한 한반도 서북지역과 요동지역이 발해 지역이었음이 보다 확실하게 밝혀졌다는 것이다. [고려후국]은 구체적으로 수도를 평안남도 성천(成川)의 흘골성(紇骨城; 졸본성)에서 평안북도 의주(義州) 야일포(野日浦) 지방의 국내성으로 옮기며 발전하였고, 영역은 북쪽으로 안원부(安遠府)를 접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동북쪽으로는 서경압록부(西京鴨 府)와 접하였다고 한다.


소고구려과 고려후국 - 대륙연구소
북한의 발해사 인식 - 대륙연구소 - 4. 연구 동향 - (2) 지리 고증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4.htm , http://tadream.tistory.com/6668

발해의 서변과 관련된 것은 이른바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설이다. 즉, 소고구려국이 발해와 당사이에 있었다는 히노[日野開三郞]의 생각은 중국측 기록으로만 볼 것 같으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당나라가 발해건국과 함께 발해 견제와 고구려유민의 부흥을 막기 위해 친당적 소고구려를 건국하게 하였고, 이들은 일정하게 자주적 외교활동도 하였다는 것이다. 당나라가 699년에 보장왕(寶臧王)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임명하여 다른 고구려유민들을 통치케하였고, 그 이후 당의 기록에서 고구려(고려)가 등장한다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698년에 이미 안동도호부가 없어진 상황이었기에 고덕무는 그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보장받게 된 셈이었고, 이른바 친당적 소고구려가 발해와 함께 세워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노태돈은 소고구려를 인정하면서도, 그 건국시기가 고덕무의 안동도독 임명시기가 아니라, 당에서 안사의 난(755-763)이 일어나고 안 이후였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북한의 장국종은 소고구려를 고려후국이라 표현하고, 고덕무가 다스리던 지역은 없었으며, 고려후국의 중심지는 평남의 성천(成川)과 평북의 신의주(新義州)였다고 하며, 후루하타[古畑徹]는 고구려유민들의 요동거주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이것의 국가적 기능에 대해서는 부정한다.

아무튼, 소고구려국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여기서의 한가지 공통되는 견해는 적어도 요동반도는 당시에 당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소고구려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을 당의 기미주로 생각하여 당 영역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손영종도 고려후국과 같은 고려국의 존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곳의 위치는 요동반도 남단과 평안북도 일대였다는 것이다. 요동반도의 발해 서변설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그는 발해 건국 초창기에 이미 발해는 요동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한다. 발해가 고구려 본토를 완전히 수복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손영종의 생각은 장국종이 내놓은 고려후국의 성천과 신의주설로 이어지고 있다.
 

고려후국 : 등주 공격을 지원한 해상 세력은? - 박현배
발해의 뛰어난 해상 능력을 보여준 사례는 732년 9월에 진행된 등주 공격이다. 당나라 북방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이자 군사적 요새였던 그 지역을 발해가 수군을 동원해서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던 것이다. 

등주성을 손쉽게 함락 시켰다는 것은 많은 발해 군사와 함선이 투입 되었다는 의미이다. 8세기 초에 수군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해상 상륙을 강행한 것은 발해 건국을 전후하여 발해 서쪽 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해상 세력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해상세력의 실체를 밝혀낸다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서해 지역의 발해인의 활동을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서해 지역에서 해상 세력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필자는 '고려후국'이라고 생각한다. 발해 시대에 한반도 북부와 요동 지역에 존재하던 '고려후국'이 발해에 귀속한 뒤에도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당회요나 책부원귀, 요사와 같은 사료에 고려와 관련된 기사가 8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 나오고 있다. 이 당시의 고려는 이전 존재했던 고구려와 10세기 초 왕건에 의해서 건국된 고려와도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고려후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고구려 시대부터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던 서해 해상 세력들은 고.당 전쟁을 통해서 몰락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일단락된 후 평화로운 시기가 이어지고 당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힘의 공백 상태에 이르자 그 세력들이 다시 규합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다고 본다. 

발해가 건국한 후 급속히 세력이 확대 되자 해상 세력이 포함된 '고려후국'은 자연스레 발해에 귀속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귀속과 더불어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제번(諸藩)의 상정은 말갈 뿐만 아니라 '고려후국'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발해가 내부적으로 황제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은 송기호 교수의 '황제 칭호와 관련된 발해 사료들' 논문에서 살펴 볼 수 있다) 

발해 시대에 존재했던 '고려후국'의 수도를 살펴보자. '고려후국'의 수도는 성천의 홀골성과 신의주의 국내성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국내성은 고려사, 세종실록에 나오는 기사 및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참조하여 당시의 국내성은 집안의 국내성이 아니라 신의주에 있던 국내성으로 북한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북한의 '장학종' 교수는 '고려후국'이 성천의 홀골성에서 신의주의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성천의 홀골성은 궁궐터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졸본성이 도성으로서도 완비되지 못한 점을 보면 이 곳에 수도를 정하고 있은 시기는 몇 해 또는 10여 년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1) 그렇다면 8세기 초 '고려후국'의 수도는 신의주의 국내성일 것이다. 

등주 공격은 발해의 주도 하에 '고려후국'이 협력했다고 본다. '윤명철' 교수는 '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의 저서에서 발해 수군이 박작성을 출발(사실, 발해 수군이 박작성을 출발했다는 내용은 사료에서 보지 못했다)하여 당을 공격했다고 하였다. 

필자는 '고려후국'의 수도이던 신의주의 국내성이 발해 수군 및 해상 세력의 중심지가 아닐까 싶다. 이미 박작성은 수.당의 전쟁을 거치면서 피해가 컸기에 그 맞은편이던 신의주의 '고려후국'의 수도인 국내성이 그 역할을 대신했을 것이다. 대규모의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서라도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집단이 필요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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