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03/h2011032518554486330.htm

언문, 백성 억울함 풀어주고 부녀자 소일거리 만들어줬다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입력 2011.03.25 18:57 | 수정 2011.03.25 21:39


조선언문실록/정주리 시정곤 지음/고즈윈 발행ㆍ240쪽ㆍ1만1,800원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담배 썰기’ . 담배가게 풍경을 담은 그림에는 바닥에 책을 펼쳐 놓고 부채를 든 채 흥을 내 책을 읽어 주는 사람이 등장한다.


16세기 언문 소설 인기 급등
비녀·팔찌 팔아 빌리기 일쑤
'쾌가'란 책 대여점도 생겨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한글로만 지은 교서(敎書ㆍ왕의 명령을 담은 문서)를 여러 차례 내렸다. 조선 시대 교서는 당연히 한문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었다. 더러 언문 번역본을 함께 반포한 경우도 있지만 교서 전체를 언문으로 내린 예는 없었다. 선조가 유난히 한글을 아꼈기 때문일까. 

우리말 교양서를 꾸준히 출간해온 정주 리(동서울대) 시정곤(카이스트) 교수의 공저 <조선언문실록>은 조선 시대 한글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흥미롭게 전한다. 제목에 드러나듯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실부터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한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추려 엮었다. 

선조의 언문 교서에는 시대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592년 4월 선조가 피란길에 오른 뒤 관군의 투항과 수령들의 줄행랑이 줄 잇는 가운데 천대받던 노비와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항거했다. 믿을 것은 백성뿐이라고 여긴 선조는 언문 교서를 통해 동요하는 민심을 달래고 의병 참여를 독려하기에 이른다. 그해 9월 방방곡곡에 뿌려진 교서 내용은 이렇다. '진실로 손에 침을 바르고 일어나서 우리 조종의 남아 있는 은덕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내 관작을 아끼지 않겠다. 살아서는 아름다운 칭송을 받고 자손까지도 그 은택이 유전되리니 이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을쏘냐.' 훈민정음 창제 후 150년, 언문이 백성의 중요한 소통도구로 자리잡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사대부들도 아녀자와 소통할 때는 한글을 썼다. 자서전 출간으로 다시 화제에 오른 신정아씨와 변양균씨의 불륜 관계는 신씨의 학력위조 사건 수사 당시 검찰이 뒤진 이메일을 통해 드러났는데 그 옛날에는 언문 편지가 범죄 수사의 단서가 되기도 했다. 연산군 2년 지방군수 유인홍은 첩에게 살해된 딸이 자살한 것으로 꾸몄다가 첩과 주고받은 편지가 발각돼 유배형에 처해졌다. 

백성들에게 언문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광해군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홍로의 처는 그런 사정을 적어 언문 상소를 올렸다. 당시만 해도 언문으로, 더구나 아녀자가 상소를 올리는 것은 금기였다. 의금부 관리들은 이를 왕에게 고했다가 물의를 빚자 자신들의 우매한 행위를 벌해 달라고 청했으나 광해군은 "대신과 관계된 일이므로 법규에 구애받을 수 없다"며 대죄를 물리는 유연함을 보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언문 상소는 빈번해지고 사연도 다양해진다. 

16세기 이후에는 언문 소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채제공은 아녀자들이 언문 소설에 빠져 "식견도 없이 비녀와 팔찌를 팔거나 동전을 빚내서까지 다투어 빌려다가 긴 날의 소일거리로 삼는다"('여사서서' <번암집>)고 개탄하기도 했다. 이런 유행을 타고 '쾌가'라 불리는 책 대여점이 성행하고, 사람들을 모아놓고 유명 소설을 읽어 주는 '전기수(傳奇叟)'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그런 언문이 정식으로 국문 지위에 오른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그러나 책에 소개된 수많은 사연은 언문이 결코 천대받는 글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저자들은 풍부한 사례를 들어 "언문이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의 공용 문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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