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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터진 수(隋)나라와의 전쟁은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을 낳았다. 살수대첩의 지휘관 을지문덕(乙支文德)이다. 문덕은 침착하고 굳센 성격에다 글 짓는 솜씨도 비범하였다. 큰 나라의 군대 200만 명을 맞이하면서도 전혀 겁내지 않았고, 힘만으로 무찌를 수 없음을 알아 온갖 작전을 동원하였다. 나아갈 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이 의연한 기상을 신채호는 ‘을지문덕주의’라고 이름 붙였다. 오직 그 이름과 살수대첩의 전공만이 이제까지 전해오는 을지문덕. 우리는 그의 역사에서 용기와 지혜를 배운다.
 
 
신채호가 규정한 을지문덕주의

을지문덕이 [삼국사기]의 열전에서 두 번째 인물로 등장하는 것은 뜻깊다. 첫 번째 인물이 김유신인 것과 견주어, 신라의 김유신이라면 고구려의 을지문덕이라 판단한 김부식의 생각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유신만큼 많은 양을 할애하지 않았고, 내용 또한 살수대첩 하나에 국한한 것이므로, 열전으로서의 모든 요소를 갖추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여기에는 을지문덕의 생몰연대조차 적혀 있지 않고, ‘그 조상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말로 그 집안에 대한 정보 또한 생략하고 말았다. 그러나 ‘침착하고 굳센 성격에다 지략이 있고 글 짓는 법까지 알았다.’라고 해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를 섭섭하게 하지 않았다.
 
“양제(煬帝)의 요동 전쟁은 출동 병력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컸다. 고구려는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이다. 그런데도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文德) 한 사람의 힘이었다. 춘추 좌전에서,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라고 했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삼국사기] 열전에서)
 
을지문덕전의 마지막 대목이다. 김부식의 종합적인 인물평인데, [춘추 좌전]의 말을 빌려와 문덕을 군자로 추켜세우고 있다. 이만하면 극찬이라 말해 지나치지 않지만, 김부식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을지문덕의 생애와 그 공적을 찬양한 이가 신채호였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모퉁이에서, 어떻게 하든 나라의 기둥이 쓰러지지 않도록 애쓴 신채호는 우리 역사상의 뛰어난 인물을 널리 알리려 애썼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을지문덕이었다. 1908년에 간행된 [을지문덕]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자료에서 을지문덕 시대의 정황과 그의 활동을 세밀히 쓴 점 말고도 진정 신채호가 규정한 을지문덕 생애에 대한 한마디 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을지문덕주의’이다. 
 
“을지문덕주의는 적이 커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고, 적이 강해도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적이 사납든지 용맹하든지 간에 우리는 반드시 나아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식은땀으로 등이 젖고, 털끝만큼이라도 양보하면 입으로 피를 토하면서 이로써 자신을 독려하고, 이로써 동료를 고무하며, 이로써 전국 국민을 흥기 시켜, 그 삶을 조선으로서 하며 그 한 번 숨 쉬고 한 번 먹는 것을 반드시 조선으로서 한 결과, 마침내 여진 부락을 다 우리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중국의 천자를 우리 손으로 거의 사로잡을 뻔했던 것이다.” (신채호, [을지문덕]에서) 
 
을지문덕주의의 핵심은 한마디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 식은땀이 나고 피를 토해 마땅하다. 다분히 풍전등화의 조국에서 신채호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을지문덕에게 투영해 보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신채호에게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만 을지문덕주의는 절실했었는가.


북한이 2003년에 발행한 을지문덕 기념주화. 북한이 운영하는 조선 부강주화회사 사이트에 올라있다.
 
 
고구려 영양왕의 시대, 어지러운 동북아시아 정세

을지문덕이 살았던 시대는 고구려 제25대 영양왕(嬰陽王) 때였다. 평원왕의 맏아들로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부른 영양왕은 565년(평원왕 7년) 태자로 세워지고, 590년에 즉위하여 2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흐름으로 보면 5세기 전성기를 지나, 이 무렵부터 고구려는 피로한 모습을 보였다. 이는 특히 중국의 새로운 왕조 수나라와의 엇갈린 관계 때문이었다.
 
581년에 건국한 수나라는 589년 남조의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후한(後漢) 이후 400여 년을 지속한 혼란의 끝이었다. 영양왕은 즉위 이후 8년(597년)까지는 수나라와 평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끝내 두 나라가 호의적인 사이로 남아있지 못할 요인이 있었다. 요동과 요서 지방을 두고 변방의 나라들이 벌이는 각축전과 신경전은 새로운 통일 왕조 수나라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물론 그 핵심은 고구려였다. 때로 사신을 보내 조문하며 신하인 척하였지만, 실로 고구려는 독립국으로서 위상을 결코 떨어뜨리려 하지 않았다.
 
드디어 영양왕 9년(598년)에 고구려는 요서지방 공격을 단행했다. 여기는 수나라의 코밑이었다. 고구려가 독립국의 의지를 보이며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러자 수나라의 창업주 문제(文帝)는 영양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6월에 수륙 30만 명을 동원하여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석 달 후인 9월에 돌아갈 때 수나라의 군사는 열의 한두 명도 남지 않았다. 고구려의 완승으로 끝난, 수와의 질기고 질긴 전쟁의 첫 판이었다.
 
여기에 변수로 작용하는 나라가 돌궐이었다. 돌궐은 투르크(Türk)의 음을 따서 한자로 만든 말이다. 지금 이 나라는 투르크메니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카자흐스탄과 이란 사이에 있는데, 1865년 제정 러시아에 병합되었다가 1991년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하였다. 이들이 5~6세기경 번성할 때는 동쪽으로 중국 요동과 요서에서 서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걸쳐 있었다. 그러다 583년 종족 간의 다툼으로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수나라가 세워질 무렵이었다.
 
영양왕은 동돌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왕 18년(607년), 고구려는 동돌궐의 왕 계민가한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이 천막궁전에 도착해 있는데, 마침 수나라 양제(煬帝)가 그곳을 방문했다. 문제를 이어 604년에 즉위한 양제는 고구려를 견제하자면 동돌궐과 모종의 약속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고구려가 먼저 선수를 친 셈이었다. 태자 시절인 10여 년 전, 고구려에 한판 진 경험을 가진 양제는 이제 주변 나라와의 외교전에서도 밀리는가 싶었다. 이를 역사학에서는 고구려의 초원 정치라 부른다. 양제가 고구려와 국운을 건 전쟁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은 이 초원의 장막에서 이루어졌다.
 
영양왕은 신라와 백제에 대해서도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 나라는 수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영양왕 14년(603년)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18년(607년)에는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했다. 신라의 진평왕이 다급한 목소리로 수나라에 군사를 청한 것이 608년이었다.
 
드디어 612년 곧 영양왕 23년 여름에 수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수나라 병력이 1백13만 3천8백 명이라 적고 있다. 물경 2백만 명 대군이었다.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양제는 시시콜콜히 그의 조서에서 밝혔다. 첫째, 고구려는 보잘것없는 나라이고 공손하지 않다. 둘째, 수나라의 말을 듣지 않고 조회에 참가하지도 않는다. 셋째, 고구려가 수나라에서 도망간 역도들을 받아들였고 변경을 괴롭혀 치안이 불안하다. 넷째, 요서를 공격하였다. 다섯째, 다른 나라들이 수나라에 조공 드는 것을 방해한다. 여섯째, 고구려의 법령이 가혹하고 지도자는 부패하다.
 
전쟁을 일으키는 명분이라고는 하나 사실 이는 고구려가 독립국임을 수나라에서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00년 혼란의 역사를 종식한 제국 수나라가 2백만의 군대를 동원해 벌이는 전쟁. 그것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얼마나 부담스러운 존재로 보고 있었는지 반증한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우리의 영웅 을지문덕의 활약상이 펼쳐진다.  
 
 
을지문덕이라는 영웅의 탄생

생몰년에 집안까지 알 수 없는데다, 을지문덕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조에서 ‘대신(大臣)’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이는 일반적인 호칭일 뿐이다. 문득 등장하는 을지문덕. 그러나 전쟁 수행에 관한 거의 전권을 가진 그이이기에, 생략된 전후의 사정을 상상에 맡긴다면, 벌써 영양왕 9년의 전쟁부터 그의 솜씨 아님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영양왕 즉위 이후 모든 전쟁의 기획은 그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 열전의 을지문덕전은 200만 수나라 군대와의 전쟁을 자세히 일러준다.
 
수나라군의 우문술(于文述)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와, 9군(九軍)과 더불어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은 왕명을 받들고 그들의 진영에 가서 항복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작전이었다. 사실은 저들의 실상을 살펴보려 거짓으로 한 행동이었다.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은 만약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이 오거든 잡아두라는 밀지를 받아 놓고 있었다. 그래서 억류해 두려 하였는데, 상서우승 유사룡(劉士龍)이 굳이 말리는 것이었다. 결국 문덕을 돌려보냈다. 적진을 살피고 김을 빼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은 성공했다.
 
을지문덕을 놓아 보낸 문술과 중문이 깊이 후회하였다는 데서 기선을 제압한 문덕의 작전이 빛을 발한다. 문술과 중문이 사람을 보내 문덕을 꾀었지만, 문덕은 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본국으로 와버렸다. 중문은 후회를 넘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돌아가려 하였다. 사실 원정군의 가장 큰 고민은 보급이다. 일거에 대군을 쏟아 부어 전장의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만, 덩치가 크면 클수록 보급의 고민 또한 큰 법이다. 문술은 그런 면에서 현실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문은 정예부대를 시켜 문덕을 쫓으면 성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문술은 이를 말리는 자중지란이 수나라 병영에서 일어났다. 을지문덕이 노린 거짓 항복의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컸다. 마침내 중문은 화를 내며,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조그마한 적을 부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뵌단 말이오.”라고 꾸짖었다.
 
문술은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압록강을 건너 쫓아갔다. 여기서 문덕의 두 번째 작전이 펼쳐졌다. 수나라 군대가 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고, 더욱 피곤함에 지치게 하도록, 싸우면 바로 패하며 달아났다. 그러기를 일곱 번 거듭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권투에서도 때리다가 지친다는 말이 있다. 일방적으로 주먹을 쓰다 보면 상대를 깔보게 되고 그러는 동안 자신이 지쳐가는 것을 모른다. 중문과 문술이 그런 모양새였다. 져주는 군대를 쫓아 평양성 30리 밖에까지 달려온 것이 잘못이었다.
 
여기서 문덕의 강력한 잽이 중문에게 날아간다. 저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脩將于仲文詩)’가 그것이다.
 
신비로운 계책은 하늘의 흐름을 알아서 하고               神策究天文
기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다 알아서 하는 게지             妙算窮地理
싸움에서 이긴 공 높을 수밖에 없겠네                        戰勝功旣高
그만하면 족하니 이제 그치는 게 어떠한지                  知足願云止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멋진 시이다. 이 시를 보고 중문이 답서를 보냈다고 하나 어떤 내용인지 전해지지 않는다. 문덕의 마지막 작전은 이 시에 이어 나왔다. 다시 항복을 가장하고,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인사드리겠다.”라고 하였다. 이미 수나라의 군사는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는 싸울 수 없었다. 더욱이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바로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하였다.
 
여기서 드디어 문덕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여름에 출정한 전쟁이 어느덧 가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수나라군의 힘이란 힘은 다 빠져 있었다. 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드디어 살수에 이르고 거기는 수나라 군사의 수장처(水葬處)가 되었다. 살수는 지금 평안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강이며, 낭림산에서 발원해 서해로 들어간다. 이 강은 구조적으로 거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데, 강물로 뛰어드는 군사가 한눈에 보여 아주 쉬운 공격목표가 되었다. 중문과 문술이 끌고 온 군대는 30만 5천 명, 그러나 그들이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을지문덕의 이름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해군 소속의 3,000톤급 구축함, 을지문덕함
 
 
을지문덕은 어디로 갔을까 

대참패를 당한 수나라가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613년 봄 두 번째 동원령을 내려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이때는 고구려의 안쪽 깊숙이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수나라 내부에서 보급의 핵심을 맡고 있던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심각한 균열의 조짐마저 보였다. 614년의 3차 침공 준비는 더 싱겁게 끝나고 말았는데, 명예회복에 안달이 난 양제가 615년 동돌궐 군대에 사로잡힐 뻔한 일까지 벌어지자 마침내 전쟁을 포기하였다. 이때 양제는 많은 포상을 지급할 것을 약속하며 구원병을 모집하는데, 여기에 나중 당나라 태종이 되는 16세의 이세민도 달려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스러운 일은 613년부터 을지문덕의 이름이 더는 어디서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별한 전공이 없어서 굳이 쓸 까닭이 없었던 것인지, 어떤 몹쓸 음모에 말려 쓸쓸히 죽었던 것인지, 안타깝지만 아무리 상상을 동원해도 그 최후를 알 수 없다. 이 전쟁을 고비로 고구려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영양왕의 시대가 굵직한 전쟁에 휘말려, 비록 을지문덕 같은 영웅의 활약으로 자기의 시대는 보전했으나, 그들에게 입혀진 상처 또한 만만하지 않아 고스란히 그 짐은 후대에 전해졌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의 전공은 상처뿐인 영광이었을까.
 
전쟁을 그만두기로 한 3년 뒤, 곧 618년 3월에 나라 안에 정변이 일어 양제는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것은 수나라의 최후나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이세민의 당나라가 섰다. 그래서 신채호는 말하였다. “을지문덕이 갈아놓은 밭에서 이세민이 수확을 거두어들였으며, 을지문덕이 애를 쓴 덕에 이세민이 그 복을 누렸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 최대의 전쟁을 수행하였던 고구려의 영양왕도 수양제가 죽은 6개월 뒤인 9월에 세상을 떴다.   
 

: 고운기 /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미지 : 연합뉴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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