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science/12177.html

[고구려인] 당신도 고구려인일 수 있다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명가문의 조건5 - 고구려인]
멸망 뒤 당나라 · 통일신라에 몸을 맡기거나 일본 · 돌궐로 이동… 한 · 중 · 일 곳곳에서 ‘족보’도 나와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2004.09.30 제528호]

700여년 동안 동아시아에 군림하던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주역이던 고구려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중국의 오(吳)나라나 진(秦)나라처럼 고구려도 성씨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형태로 자신의 생명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구려인의 얼굴. 안악 3호분에 나타난 귀족 부부의 얼굴은 가장 고구려적인 얼굴로 꼽힌다. 남편은 정면을 바라본 채 양쪽 사람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부인은 남편을 향해 비스듬히 앉았다. 머리에는 장식이 여럿 꽂혔다.


고선지 장군, 서역 정벌로 이름 남겨

고구려는 멸망 뒤에도 처절한 진통을 거듭했다. 평양성 함락 뒤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혀 중국의 오지로 끌려갔는가 하면 당나라에 대해 무장투쟁을 벌이다 남쪽의 통일신라에 몸을 맡겨야 했다. 트로이 멸망 뒤의 유민처럼 바다 건너 일본으로 신천지를 찾아나선 이도 있었다. 역사를 종합하면 고구려 후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흩어져갔다고 할 수 있다.

1. 마지막 임금 보장왕과 함께 19만~27만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2. 고구려 옛 땅에 그대로 남아 살았다.
3. 신라와 함께 당나라 축출 투쟁을 벌인 뒤 통일신라로 흡수됐다.
4. 말갈족과 함께 발해를 세웠다.
5. 일본이나 돌궐 등 주변국가로 망명·귀화했다.

고구려 사람들의 운명은 어떠했는지 하나하나 역사를 추적해보자. 맨 먼저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을 보자.

“서기 668년 9월 말 고구려가 멸망한 뒤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당나라 총사령관 이세적은 당나라로 개선하면서 보장왕 등 수많은 고구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고구려 멸망 6개월 뒤 고구려 포로 3만8300호(약 19만명)는 회수의 남쪽과 양자강의 남쪽(오늘날의 장쑤성·저장성 일대) 그리고 산남 경서의 여러 주(오늘날의 간쑤성 일대) 허허벌판으로 끌려갔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진나라의 천하통일 이후 적대적인 국가를 멸망시킨 뒤 그 주민들을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점령 정책은 상대적으로 이주의 규모가 훨씬 크고 가혹했다. 백제의 경우 패망 뒤 의자왕과 태자 왕자 및 대신 88명, 백성 1만2807명을 당나라로 잡아갔다. 패망 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69만호 약 350만명이었다(남한쪽에서는 당시 고구려의 호당 인구를 약 5명으로, 북한에서는 7명으로 잡는다. 북한식에 따르면 당시 인구는 490만명, 멸망 뒤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약 27만명이 된다). 백제가 망할 때 76만호보다 인구가 적다. 수나라, 당나라의 거듭된 침략과 기근 등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약화된 결과이다.

살수대첩과 안시성 대첩에 이어 당 고종 때에 이르러서만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모두 9차례에 이른다.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은 일부 탈출자나 망명자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구려의 중추 세력이었다. 그런 이들이 중국의 남방과 서역의 오지와 미개척 황무지로 잡혀가 농노나 군인으로 일해야 했던 것이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서역 정벌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고선지 장군이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고선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유격장군이 됐다. 그는 유능하고 용맹스러운 장군으로 안서부도호로 원정군을 이끌고 파미르고원의 빙하언덕을 넘어 소발률국을 정벌하는 등 72개국을 항복시켰다. 이어 제2차 원정 때는 석국(타슈켄트) 등도 정벌했다.”


» 안악 3호분에 그려진 활을 멘 병사들. 가장 많은 고구려인의 얼굴이 그려진 회화 가운데 하나다.
 
수십만명이 끌려가고 또 끌려오고…

이 원정은 전술사적 측면에서 대단히 기록될 만한 전격전의 사례로 꼽힌다. 이어 그는 탈라스 전투에서 압바스 왕조의 정예군과 서역국가의 연합군과 싸우다가 패배한다. 고구려 멸망 80년 뒤의 일이다. 탈라스 전투는 한편으로 당나라 세력의 이슬람권 서역으로의 진출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권의 동방 진출도 이 지역에서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이 전투는 중국쪽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문명사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탈라스 전투 뒤 그는 어림군대장군으로 승진한다(바로 이 때문에 탈라스 전투의 성격에 대해 지금껏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수만명을 잃는 ‘패전’을 했는데도 그는 승진하고, 패전했다고는 하지만 조금도 영토를 잃은 것도 아니고, 고선지 자신도 이 전투 뒤 바로 반격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는 사실 등 때문에 사실상 패전이 아니라는 견해가 나오는 것이다).

고선지는 그 뒤 안녹산의 난 때 정토군 부원수로서 반란군을 막다 누명을 쓰고 황제의 칙명으로 참수된다. 이때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되면서 고선지는 묻는다. “퇴각한 것은 죄이기에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다. 하지만 군량을 훔치고 관고 안의 물자를 사사로이 썼다는 것은 모략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제군들이여, 내가 죄가 없다면 그렇게 외쳐라!” 모든 병사들이 외쳤다. “죄가 없습니다!” <신당서>는 “그 소리가 크고 우렁차 땅을 진동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3분의 2가량은 나중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다시 고구려 지역으로 환원 조치됐다. 검모잠과 안승 등의 부흥운동으로 당나라는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당나라 세력이 밀리게 되자 당나라 지도부는 공부상서로 앉혀서 예우하던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 고장(高藏)을 ‘요동주도독 겸 조선왕’으로 임명해 요동으로 보냈다. 그와 함께 중국으로 끌고 간 고구려 유민 가운데 2만8000호(약 14만명)를 다시 요동 지역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고구려에 대한 향수와 보장왕에 대한 충성을 통해 옛 고구려 지역의 부흥운동을 잠재우려는 의도에서다. 그러나 비밀리에 말갈족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기도가 발각돼 보장왕은 다시 당나라로 소환돼 공주로 유배를 갔다. 당은 보장왕을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지역으로 소환했던 이 유민들을 다시 중국으로 끌고 가 하남과 실크로드 일대로 보내버렸다. 나라가 망한 뒤 수십만명이 무더기로 당나라 오지에까지 끌려갔다가 다시 끌려오고 또다시 끌려가는 일대 수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두 번째, 고구려 땅에 남겨진 사람들은 비록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옛 고구려 지역은 당나라에 대한 저항과 고구려 부흥운동의 근거지였으므로 당나라는 크게 곤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유민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보장왕의 후손들을 잇따라 ‘조선군왕’ ‘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 ‘안동도독’ 등으로 임명했다. 고구려왕의 후손들을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로 만들어 반란과 부흥운동의 흐름을 막으려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역사가 지나며 많은 사람들은 한족으로 동화됐다. 그러나 일부 왕족의 후손들은 주몽(고주몽)과 장수왕(고련)의 성인 ‘고씨’로 자기 자신들의 정체성을 일체화하며 1300여년 동안 존속해오는 것으로 확인된다.


고구려의 대당전쟁.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그려진 기록화 앞에서 방문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곽윤섭 기자)
 
발해, 고구려 정통 후계 국가로

세 번째, 주요 세력의 하나가 통일신라로 흡수됐다. 대표적인 것이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로 알려지는 안승이다. 그는 4천여호의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신라 땅으로 들어갔다. 신라의 협조로 황해도의 사야도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그는 고구려의 대형을 지낸 장군 검모잠에 의해 고구려국의 왕으로 추대됐다. 그들은 새 나라가 신라의 ‘번방’이 되겠다며 지원을 요청해 신라 문무왕의 동의를 얻는다. 안승 세력은 구월산의 장수산성 등을 근거지로 삼아 옛 고구려 각지에서 일어나는 부흥운동과 연계해 당군에 대한 공격을 벌여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내분을 일으켜 결국 당나라의 토벌군에게 패해 신라로 달아난다. 이와 달리 고구려가 망할 때 포로로 잡혀 신라에 들어간 사람들이 7천여명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고구려 멸망으로부터 당나라 세력의 축출 때까지 신라에 복속해 들어간 고구려 유민은 1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네 번째, 고구려 지역 곳곳에서 펼쳐진 부흥운동과 신라의 삼국통일 완성의 결과 당나라 세력은 요동 이서로 급격히 영향력이 후퇴해갔다. 이처럼 고양된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고구려 지역의 유민들은 자신들에 동조하는 말갈족의 한 갈래와 연합해 대조영을 수장으로 한 발해를 세운다. 고구려의 정통 후계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부 유민들은 일본과 돌궐 등으로 이동해갔다. 현재 일본에 있는 고구려 후손으로는 고려신사(高麗神祀·일본명=고마진자)가 가장 유명하다(역사상 고구려는 중국과 일본에서 ‘고려’로 알려지거나 사용된 예가 적지 않다). 고구려 멸망 직전 일본에 사신으로 간 고구려 고관의 후손으로 알려진 이들은 1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다. 당연히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고구려=중국계’라는 등식에 대해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한편 민속학적으로 이 고려신사의 장승도 북방계형을 띠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700년 대제국이 무너진 뒤 유민들은 각처로 흩어졌다. 그 뒤 1300여년, 한국·중국·일본 등 곳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임을 확인하는 족보 등이 공개되고 있다. 횡성 고씨는 “고구려 보장왕의 둘째아들 인승(仁勝)의 20세 손인 고휴(高烋)가 시조로 되어 있는” 족보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 랴오양의 고씨 집성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20대 왕 장수왕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고씨가보’(遼陽高氏家譜)를 공개하고 있다. 또 일본 고려신사의 당주도 고구려 후손을 나타내는 족보가 전승돼오고 있다고 확인한다. 고구려는 죽지 않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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