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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당국 “궁전터만 봐도 고구려 건축 위용 느껴” 
‘好太王 청동방울’은 빼어난 유물로 평가 
東晋製청자 발굴돼 中왕조와 교류 확인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입력 : 2004.05.31 05:50 55' / 수정 : 2004.05.31 07:12 36

“환도산성 궁전터의 현존하는 건축 기초만 보아도 당시 고구려 건축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태왕릉(광개토대왕릉)에서 발굴된 금동제 유물들은 고구려인들의 빼어난 미의식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중국 문화재당국이 지난 2003년 중국 지린성 지안에서 발굴된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내린 총평이다. 

국내학계에도 그동안 환도산성 궁전터가 발굴됐다는 것이나, ‘호태왕 청동방울’ 발굴 사실은 알려져 왔지만 사진이 소개된 적은 없었다. 


중국 당국은 이곳에서 발굴된 ‘辛卯年 好太王’(신묘년 호태왕) 글자를 새긴 청동방울을 지난 해 발굴된 고구려 유물 중 최고로 꼽았다. 광개토대왕비나 경주 호우총 출토 유물에서도 드러났듯, 호태왕(好太王)이라는 명칭은 광개토대왕에게만 사용했던 존칭이다. 

함께 발굴된 금 도금을 한 관(冠) 장식이나 역시 금 도금을 한 등자(鐙子, 말을 잘 탈 수 있도록 발을 고정시켜 주는 것), 책상의 다리 등은 고구려인들의 세련된 미의식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 환도산성의 將臺고구려 초기 왕성인 환도산성에서 발굴된 장대(將臺). 국내학자의 환도산성 내부 입장은 금지돼 있는데, 산성아래서 찍은 사진이 공개된 적은 있었다. 

궁전터는 지형에 맞춰 3단으로 대지를 구획해 건축물을 세웠는데, 모두 서향(西向)이다. 

여기서는 고구려의 고위 관직인 ‘소형’(小兄·족장급에 해당)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와 귀신 얼굴을 조각한 귀면와(鬼面瓦) 등도 대량 발굴됐다. 환도산성 남부의 산 구릉 위에 있는 장대(將臺·산성 주변을 살피기 위해 높은 지역에 돌 등을 쌓아 마련한 대)도 발굴됐는데, 모서리를 원형으로 만든 직사각형 형태로 장대 정상에는 목조 건축물을 세웠던 것으로 조사 결과 드러났다. 


▲ 관직이름 새긴 기와 小兄(소형·족장급)이라는 고구려 관직 이름을 새긴 기와. 환도산성 궁전터에서 출토됐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소형과 관련된 건축물의 지붕을 덮은 기와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궁전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던 지안시정부 건물과 체육관, 성벽 북쪽 등을 발굴했으나 기대했던 궁전터는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체육관 부지에서는 동진제 청자가 여러 점 발굴돼 서기 4세기 고구려와 중국 대륙 분열기에 중원을 장악했던 중국 왕조와의 교류를 엿보게 한다. 

왕릉급 유적으로 추정되는 임강묘(臨江墓)에서는 전사의 얼굴을 조각한 굴대비녀(수레바퀴와 차축을 연결시키기 위해 꽂는 쇠)가 출토돼 눈길을 끈다. 부리부리한 눈매 등 이국적인 모습이 이채롭다. 

권오영 한신대교수는 “신묘년 호태왕 청동방울은 앞으로 신묘년을 광개토대왕의 즉위 연도인 서기 391년으로 볼 것이냐, 장수왕대인 서기 451년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고 지적했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환도산성의 구조가 자세히 밝혀지면 고구려의 도성 체계에 대한 이해가 훨씬 깊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출처 :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405/200405310013.html (삭제)


국내성은 평상시 王城… 환도산성은 戰時用 
입력 : 2004.05.31 05:51 25' 

학계는 고구려의 왕성을 이성(二城)체제로 이해한다. 평소에는 평지에 쌓은 성에서 왕이 거주하다가 강한 적이 침입하면 산성으로 옮겨 적을 방어했다. 

둘레 2.7㎞ 정도의 국내성은 평지성이며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 떨어진 환도산성은 둘레 7㎞의 산성이다. 국내성이 평시용이라면 환도산성은 전시용인 셈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2대 국왕인 유리왕은 서기 3년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 반면 환도산성은 이보다 근(近) 200년 뒤인 서기 198년, 고구려 10대왕인 산상왕이 쌓았다. 

산상왕은 재위 13년인 서기 209년, 환도산성으로 도읍을 옮기지만 다음 임금인 동천왕 20년(서기 246년)에 위(魏)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산성이 함락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고구려의 지배계층이 갈라져 나와 나라를 세운 백제 역시 이성(二城)체제를 받아들였으며 초기 백제의 왕성으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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