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bc8937.pe.ne.kr/WEFH67489SDFffgtr/read.cgi?board=pds2&y_number=579
* 글 앞부분 명칭과 발전과정과 정치 등의 내용인 뒷부분을 가져왔습니다.

발해국은 제국이다  
서병국(대진대학교 사학과)

        발해국은 제국이다 : 성립 과정, 발해제국의 고구려 유민 통합  http://tadream.tistory.com/7299
        발해국은 제국이다 : 제국으로서의 면모, 발해국은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다  
http://tadream.tistory.com/7312

제국으로서의 면모

발해국 관련 문헌과 금석문에 따르면 발해국의 군주는 자신을 황제라고 하였다. 이는 대조영이 맏아들 대무예(大武藝)에게 계루군왕桂婁郡王이란 칭호를 준 사실로 알 수 있다. 『책부원구』(권1000)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발해국왕 무예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그의 아버지 조영이 동쪽에서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 자립하여 진국왕이 되었는데 무예를 계루군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같은 책(권964) 당나라 현종 개원 8년(720) 8월 초의 기사를 보면 현종이 대무예의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을 계루군왕에 책봉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군왕이란 무엇인가. 보통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왕에, 손자나 조카를 군왕에 책봉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면 대조영은 맏아들 무예를 계루군왕이 아니고 계루왕에 책봉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대무예의 계루군왕 책봉은 계루왕 책봉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책부원구』는 왜 대무예를 계루군왕에 책봉하였다고 했을까. 당나라의 관료들은 발해국을 황제국으로 부르기를 몹시 꺼려하여, 대무예가 아버지 대조영으로부터 계루왕의 책봉을 받았건만 이를 계루군왕으로 격하시켰다고 하겠다. 따라서 대무예의 계루왕 책봉은 대도리행의 계루군왕 책봉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대무예가 아버지 대조영으로부터 계루왕의 책봉을 받았음은 발해국이 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면 또 다른 근거는 없을까. 『협계태씨족보』의 「선조세계」를 보면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渤)이 검교태위(檢校太尉) 반안군왕(盤安君王)이 되었다는 기사를 만날 수 있다. 그도 발해국왕으로부터 왕의 책봉을 받은 것이다. 대무예나 대야발이 작은 왕이듯이 고려후국의 왕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발해국의 최고 통치자는 작은 왕들을 거느린 대왕, 즉 황제였음을 알 수 있다.

발해국이 제국이었음은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효공주 묘비는 발해국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다. 그런 면에서 발해사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임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중국의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발견된 묘비에는 728자로 씌어진 문장이 새겨져 있다. 비문을 보면 공주의 부왕과 조상들은 보통 임금이 아니고 대왕, 즉 황제와 같은 급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공주도 덕행과 미색 면에서 제왕의 딸들과 똑같은 찬양을 받고 있다.

발해국이 제국임을 보여주는 비문의 몇 구절을 살펴보자. 먼저 비문의 앞부분을 장식한 “규예강제녀지빈(汭降帝女之濱)”이란 구절부터 보자. 풀이해보면 정효공주를 시집보낸 것을 중국의 전설적인 요임금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란 딸들을 규예강가에 내려 보내 순임금에게 시집보낸 것과 견주었다. 이로써 정효공주의 아버지인 문왕과 그 가문의 격을 중국 최고의 임금인 요임금과 그 가문의 수준으로 높이 받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배중화이방하우 도은탕이도주문(配重華而旁夏禹 陶殷湯而韜周文)”이란 구절을 풀이하면, 정효공주의 조상은 중화(순임금)와 견줄 만하고, 하나라의 우임금과 비슷하며, 은나라 탕왕의 지혜를 따라가고, 주나라 문왕의 계략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발해국의 임금들을 고대 중국의 가장 우뚝 솟은 황제들과 대등하다고 찬양하였음을 직시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묘비에는 공주의 조상들을 3황 5제 등 주나라의 성왕과 강왕 등에 비유한 내용들이 많다. 이로써 발해국은 어엿한 제국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발해국의 관제 중에는 제국에서만 나타나는 3사(司)·3공(公)제와 작호(爵號)제 등이 있었다. 『요사(遼史)』(본기2)에 보면 발해국이 멸망한 다음 해인 927년 거란은 발해국의 사도(司徒)였던 대소현(大素賢)을 동란국(東丹國)의 좌차상(左次相) 벼슬에 임명한 기록이 있다. 사도는 태위(太尉)·사공(司公)과 함께 3공(公)의 하나로서, 3공제가 발해국에 있었음을 여기서 알 수 있다. 보통 3공제는 3사제와 병존하는 만큼 3사(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輔)제 역시 발해국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국왕에게 스승의 대우를 받는 3사는 최고의 벼슬로서 국왕에게 충고를 하며, 3공은 모든 관청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제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제후적 존재가 발해국에 있었다는 것은 발해국이 제국으로서의 제도와 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인 군주 밑에 작은 왕들이 제후로서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제 발해국의 봉작(封爵) 제도에 대해 알아보자. 이에 대한 자료는 구체적이지 않으나 단편적인 자료들은 적지 않다. 대개 봉작 제도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작(男爵)의 5등급으로 되어 있다. 발해국에서 그 실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발해 대사 보국대장군 겸 장군 행목저주자사 겸 병서소정 ‘개국공’ 양승경 이하 23명이 다모리를 따라 내조하였다[渤海大使 輔國大將軍兼將軍 行木底州刺史兼兵署小正開國公楊承慶已下 二十三人 隨田守來朝]. -『속일본기(續日本記)』 권21, 순인 천평보자 2년(758) 9월 정해

● 그 나라 사신 자수대부 행정당좌윤 ‘개국남’ 왕신복 이하 23명이 내조하였다[其國使紫綬大夫 行政堂左允 開國男王新福已下 二十三人 來朝]. -『속일본기』 권21, 순인 천평보자 6년(762) 10월 병오

● 발해국이 헌가대부 사빈소령 ‘개국남’ 사도몽 등 187명을 파견하여 나의 즉위를 축하하였다[渤海國遺獻可大夫 司賓小令開國男史都蒙等 一百八十七人 賀我卽位]. -『속일본기』 권34, 광인 보구 7년(776) 12월 을자

이 외에 759년 일본에 온 발해 사신 고남신(高南新,개국공), 798년 일본에 온 발해 사신 대창태(大昌泰,개국자), 926년 발해국 멸망 직후 고려에 온 박어(朴漁,개국남) 등도 모두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써 발해국에 봉작 제도가 있었으며 이러한 봉작 제도를 가진 발해국은 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국으로서 발해국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연호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신당서』 「발해전」을 보면 발해국은 연호를 일관되게 사용하였는데 확인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

인안(仁安)  ●●●●●▶   무왕(720~737)
대흥(大興)  ●●●●●▶   문왕(738~793)
중흥(中興)  ●●●●●▶   성왕(794)
정력(正曆)  ●●●●●▶   강왕(795~809)
영덕(永德)  ●●●●●▶   정왕(810~812)
주작(朱雀)  ●●●●●▶   희왕(813~817)
태시(太始)  ●●●●●▶   간왕(818)
건흥(建興)  ●●●●●▶   선왕(819~830)
함화(咸和)  ●●●●●▶   쭕왕(831~857)

문왕은 774년 연호를 보력(寶歷)으로 고쳤다가 다시 대흥으로 하였는데 보력 연호를 언제까지 사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발해국의 연호는 보력을 포함하여 10개이지만 발해국의 군주 15명이 모두 연호를 제정, 사용한 걸로 본다. 『협계태씨족보』를 보면 고왕 때의 연호로 천통(天統)이란 것도 보인다.

아무튼 연호가 사용된 걸로 보아 발해국이 제국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렇듯 발해국이 제국으로서의 체제와 면모를 갖추었음은 발해국이 주권 국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중국인들은 발해국이 당나라의 지방 정권 또는 속주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그러나 발해국은 당나라의 책봉을 받고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자주 국가였다.

발해국이 당나라의 외교적 승인을 받지 않고 건국된 만큼 자주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음은 누구보다 당나라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713년 당나라가 발해국왕을 홀한주도독·발해군왕에 책봉한 것을 발해국이 받아들였다고 해서 발해국이 당나라의 속국이었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듯이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책봉과 조공이 외교 관행처럼 통용되고 있었다.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대등한 형식의 대외 무역보다 상하의 질서를 바탕으로 한 예물 교환 형식의 무역만을 인정하여 이를 다른 나라들에게 요구하였다. 중국의 역대 정권은 무역상 물자의 손실을 보면서도 조공 형식의 무역을 통해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적인 무역 관행에 따라준 국가를 속국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적인 표현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역사상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외교적 문제이다.

중국식의 표현대로라면 흉노에 막대한 양의 조공을 해마다 바친 한나라, 그리고 요나라와 금나라에 적지 않은 양의 조공을 바친 송나라도 모두 속국이 분명하다. 그러나 중국인 중에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발해국이 당나라와 무역 거래를 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발해국을 당나라의 지방 정권 또는 속국이었다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사리에 맞지 않다. 발해국이 당나라의 속국이었다면 대외 정책을 독자적으로 집행할 수 없다. 그러나 발해국은 당나라의 군사적 강압에 굴복하거나 맹종한 일이 없다. 오히려 발해국은 당나라의 강압적 태도에 맞섰으며 필요할 땐 단호하게 무력을 행사했다.

당나라가 말갈 부족 중 가장 호전적인 흑수말갈을 끌어들여 발해국을 외교·군사적으로 고립시키려 했을 때 발해국은 즉각 당나라와 흑수말갈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역사상 유명한 대장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국의 서해 지역 수비 해군이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를 기습하고, 요서 지방의 마도산에 머물고 있는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거나 흑수말갈을 원정한 것은 발해국이 자주 국가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렇듯 발해국이 당나라의 부당한 태도에 징벌로 맞선 것은 과거 중국의 침략 세력을 물리친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발해국은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다

발해국의 역사 문헌 인멸로 그 역사의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다. 그중 최대의 난제는 과연 발해국은 어떤 종족의 주도하에 세워졌는가 하는 것이다. 발해국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라마다 국익 차원에서 고구려계다 말갈계다 하는 식으로 주장하다 보니 이 문제는 시간이 흘러도 풀리지 않고 있다.

관련 당사국들은 하나같이 아전인수격으로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을 뿐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 않다. 필자는 과거의 그 같은 민족 감정적인 연구 태도는 이 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라 상대방의 이해를 구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연구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필자는 발해국의 역사 문헌을 섭렵하는 과정에 발해국의 건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두 종족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발해국이 이 두 종족의 협력으로 계속 발전해나가는 것이 아니고 건국 이후 일정 기간에만 그러했다는 것이다. 두 종족의 협력이 말기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은 낙후한 문화를 가진 말갈계가 고구려계의 문화에 흡수·동화됨으로써 결국 말갈계는 계속 남지 못하고 고구려계의 옷으로 갈아 입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말갈계가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고구려계에 흡수됨으로써 발해국의 성격은 고구려계와 말갈계의 양면성에서 고구려계의 단일성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그 성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발해국은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발해국 관련 중국의 역사 문헌에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혼재(混在)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은 많다. 이들 역사 문헌을 연구한 결과 발해국이 고려처럼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알 수 있다. 발해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많은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한 것이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다. 그런데 유민들은 고려만을 망명처로 정한 것이 아니고 여진 사회로도 망명하였다. 그러므로 발해국 유민의 고려 망명 사건은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고 하기에는 증거가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통전』을 보면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내용상 발해국의 땅이 과거 속말말갈의 옛 땅임을 말하는 동시에 대조영의 선조가 속말말갈부의 사람으로서 속말말갈의 옛 땅에 거주한 사실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대조영의 선조를 속말말갈족으로 보아도 좋은가.

중국의 발해국 관련 역사 문헌이 거의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조영의 선조를 속말말갈족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대조영과 그의 선조는 고구려계의 사람으로 한때 속말말갈의 옛 땅에 거주한 사실이 있는 그런 가계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대조영의 가계 사람들이 고구려계가 아니고 진정 속말말갈계의 사람이었다면 이처럼 종족상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한 역사 기록이 있는가 하면 아예 발해국 자체를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다룬 기사들도 있다(『당회요』·『문헌통고』·『송사』·『송회요』). 대조영의 종족별 가계 또는 발해국의 종족이 고구려의 별종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발해국이 고구려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는 필자의 견해에 도움이 될 만하나 미진하다.

이처럼 중국의 발해국 관련 기록들이 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발해국을 보는 관점이 일치하지 않아서이다. 『무경총요』(前集, 16 下)를 보면 발해국은 부여의 별종이며 예맥의 옛 땅이 발해국의 땅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속말말갈의 속말은 지금의 송화강을 말하는 속말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여족의 부여라는 국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송화강 일대였다. 부여가 망한 이후 부여족이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으나 송화강 일대에서는 여전히 거주하였을 가망성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발해국은 부여의 별종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발해국의 종족 문제와 관련하여 견해를 달리한 역사 기록들은 중국 측의 것이다. 발해국의 멸망으로 그 역사 문헌이 인멸하여 부득이 중국 측의 기록에 기대게 되었다. 한편 눈을 일본으로 돌리면 발해국 관련 역사 기록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중국 측의 문헌들은 발해국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였으나 일본 측의 기록들은 하나의 관점을 유지하였음이 우선 주목된다. 이를 결론적으로 보면 발해국을 옛 고구려와 완전히 동일시하였다는 것이다. 729년 발해국의 수령 고제덕 등 8명이 첫 사신으로 일본에 들어갔는데, 이때 일본인은 발해국을 옛 고(구)려국과 동일시하였다(『속일본기』 10).

『일본일사日本逸史』는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라고 하였다. 표현이 좀 어색하여 이를 달리 풀어보면, ‘발해국의 영토는 옛 고구려의 땅과 같다’거나 ‘발해국은 옛 고구려의 땅에 세워졌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두 가지 표현으로 보면 발해국을 세운 사람은 고구려의 유민이며 발해국의 영토는 옛 고구려의 영토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발해국 사신의 입국으로 고구려의 멸망 아래 고구려와 일본의 단절된 외교 관계가 복구되었음을 직접 확인한 셈이다. 『일본일사』에서 고구려와 일본의 대외 관계를 보면,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치면 일본은 조공을 받는 그런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데 발해국 사신의 입경入京으로 끊어진 조공이 재개된 것으로 여겼다.

고구려와 일본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일본 측의 오만한 태도에서 빚어졌으므로 길게 탓할 바가 아니나 이 기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당시 일본에서는 발해국을 고구려의 후신(계승 국가)으로 단정 짓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일본은 발해국을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단정 지은 만큼 입경한 발해국의 사신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려고 하였다.

중국적인 조공 개념에 비추면 일본은 발해국의 사신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은 조공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입경 사신이 일본에 선진 문물을 소개·보급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공을 받겠다는 일본의 태도는 오만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국익 차원에서 발해국을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일본이 발해국을 고구려의 후신으로 본 것은 발해국의 사신이 휴대한 발해국왕의 국서 내용을 직접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발해국 사신이라고 표현할 경우에도 으레 고(구)려 사신이라고 칭하였다. 일본이 입경하는 발해국의 사신 위에 군림하려 한 것은 사실이나 발해국을 고구려와 동일시하거나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본 것은 틀림없다.

일본은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당나라에 대해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아 당나라의 발해관에 구애를 받지 않고 사실에 입각한 발해관을 소신 있게 견지하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한반도의 고려는 자의적인 발해관을 견지하지 못하였다. 『고려사』(세가)에서 발해국을 속말말갈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고려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금·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그러면서도 발해국을 세운 대조영을 종족상 고구려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이 점은 고려가 자의적인 발해관을 견지하지 못하였으나 결국 발해국이 고구려적인 문화 요소를 많이 지닌 국가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발해국에 문자·예악·관부 제도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만약 발해국이 말갈족 위주의 국가였다면 이런 문화 요소를 가지지 못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런 문화적 요소야말로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보여주는 문화적 설명이다. 말갈인들에게 문화 요소가 있었는지 여부는 뒤에서 상세히 논할 예정이므로 여기서는 접어두지만 한마디만 하면 말갈인들에게서는 고구려적인 문화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가 자의적인 발해관을 견지하지 못하도록 견제한 것으로 보이는 금나라의 역사책인 『금사』를 보면 발해국에 대한 설명은 발해전이 아니고 고려전에 실려 있다. 금나라는 말갈족의 후예인 여진족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발해국이 고구려계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금기시하여 고려는 자의적인 발해관을 견지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금나라는 고려가 발해국에 대해 동족 관념을 갖지 못하도록 막았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는 여진과 발해인의 뿌리가 같다고 일찍이 공언한 바가 있다. 그러면 『금사』는 발해국 기사를 세가편에서나 아니면 부록편에서라도 다루어야 마땅한데 고려전에다 실었다. 금나라는 여진과 발해의 동족 관념을 인위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하여 발해와 고려의 동족 관념을 철저하게 금기시하였다. 『금사』 고려전에 기록되어서는 안 될 발해국의 기사가 결국 고려전에 실리게 된 것은 과오라고 하겠으나 고려와 발해의 동족 관념을 끝까지 숨길 수 없었음을 자인한 셈이다.

지금까지 발해국과 동시대인 당나라 때 만들어진 『통전』, 역시 같은 시대에 한반도의 고려 역사를 엮은 『고려사』 또는 같은 시대 일본의 역사를 대표하는 『속일본기』·『일본일사』 그리고 발해국의 유민들이 살았던 금나라의 역사책인 『금사』에 실린 발해국 관련 기사를 검토한 결과, 발해국은 고구려의 문화 요소를 고스란히 보유한 고구려의 계승 국가였다.

그러면 발해국에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포함된 발해국을 과연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아보자. 발해국에 복속해 있던 흑수말갈(발해국과 북쪽으로 접함)은 발해국과 동돌궐의 친교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흑수말갈은 당나라와 교류할 때도 발해국에 길을 빌렸듯이 당나라에 벼슬을 요청할 때에는 으레 먼저 발해국에 알리거나 발해국 사람과 함께 동돌궐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흑수말갈은 발해국과 동돌궐의 친교 관계가 해체되었음을 알고부터 발해국의 영토를 통과하여 당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청하고도 이를 발해국에 알리지 않는 등 종전과 다르게 행동하였다.

당나라가 흑수말갈의 추장에게 벼슬을 준 것은 고구려 유민의 반당 기지였던 영주(營州) 땅을 당나라가 회복한 지 5년 후인 722년(무왕 인안 3)이었으며 흑수말갈을 자국의 예속 밑에 두려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략은 725년에 더욱 본격화되어 발해국과 동돌궐의 관계가 해체된 직후, 당나라에 들어간 흑수말갈의 추장이 사전 통고 없이 벼슬을 청했다. 이에 무왕은 발해국에 대한 배반으로 판단하여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세력 연합 더 나아가 발해국에 대한 양면 침공 행위라 단정하고, 먼저 흑수말갈을 치고 당나라까지 치려고 하였다.

마침 당나라에 인질로 있다가 돌아온 문예(무왕의 동생)는 당나라의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당나라의 침공을 반대하였다. 당나라를 침공하는 것은 멸망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판단한 그는 전쟁터에서도 대(對)당 투쟁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나 무왕이 그를 죽이려 하자 당나라에 망명하였다. 무왕이 구상하는 당나라 침공은 영토를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국에 대한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견제를 사전에 분쇄시키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것 말고 혹 다른 의도는 없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책부원구』(권 999, 請求)를 보면 931년(후당의 명종 장흥 2) 흑수와 와아부(瓦兒部)가 산동반도의 등주에 와서 말을 팔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발해국이 망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흑수말갈이 후당의 등주에 와서 말을 팔았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로 보아 발해국이 당나라의 등주를 침공한 것은 흑수말갈과 당나라의 발해국에 대한 견제를 분쇄하는 외에 등주가 당시에도 흑수말갈이 당나라에 말을 파는 교역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말은 전쟁 때에 기마의 목적 외에 교통·운반 수단으로서 역할을 하였음을 감안하면 발해국이 이러한 등주를 침공함으로써 당나라의 말 구입에 적지 않은 경제적 손실을 입혔을 것이다.

발해국의 당나라 침공과 관련하여 문예가 침공을 반대한 글 가운데서 주목할 것은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결과를 거론하고 있는 점이다. 즉 당나라의 군사력은 막강하고 병력은 발해국보다 만 배나 많으므로 발해국이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면 멸망을 자초한다는 우려에서 당나라 침공을 그토록 반대하였던 것이다.

문예는 침공 반대를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고구려와 당나라의 병력을 비교 설명하기도 하였다. 즉 고구려는 전성기에 30여만의 병력을 보유하였으나 당나라와 전쟁을 함으로써 멸망을 자초하였음을 상기하고, 지금 발해국이 보유한 병력은 고구려에 비해 수배나 적으므로 당나라와의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예의 전쟁 반대 이유를 통해 밝혀진 것이 있다. 그것은 국세가 강한 무왕 시대의 발해국이 병력면에서 전성기의 고구려보다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왕의 강경한 태도로 732년(무왕 인안 13) 장문휴(張文休)가 이끄는 발해국의 해군은 산동반도의 등주를 기습하여 당나라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말의 구입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을 것은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발해국이 당나라에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 아니고 문예가 당나라 침공이 감행될 경우 발해국이 입을 손실이 자명하다고 보아 발해국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보유한 고구려도 당나라에 의해 패망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거론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문예가 발해국의 병력을 고구려의 그것과 비교한 것은 당나라가 고구려와 발해국 모두의 숙적이라기보다 발해국이 고구려의 문화 요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등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자인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와 발해국의 입장에서 당나라는 두 나라의 숙적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문예는 발해국을 고구려와 비교하였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고구려와 발해국의 관계는 혈연상 조상과 후손의 혈연 관계임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발해국이 혈연상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문예가 고구려와 발해국의 세력을 비교한 것은 단순 비교에 지나지 않는다. 문예가 취한 비교는 단순 비교를 넘어 조상의 과오를 후손이 피해야 한다는 그런 취지의 비교이다. 고구려의 전성기에 병력이 30만 명이었다는 문예의 지적은 역사 기록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이 아니고 고구려의 멸망으로부터 64년이란 시간이 흐른 가운데 조상의 구전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문예의 전쟁 반대 이유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는 것이다.

역사상 조상은 후손의 장래를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후손들은 조상의 과거를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훤히 뚫어보고 있다. 발해국의 후손들이 조상인 고구려의 대당 항전을 알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문예는 건국된 지 얼마 안 되는 조국 발해국의 안위를 염려하여 발해국의 병력을 고구려의 그것과 비교하였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위에서 발해국은 고구려의 계승 국가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무엇을 계승하려는 것인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과거 고구려에 의해 이루어진 맥족의 영광 시대를 재현함을 뜻한다. 이에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발해국은 한반도를 넘어 만주 땅에 세워진 국가이므로 한반도 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것이 영토상 급선무이다. 발해국의 한반도에로의 진출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도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고려는 한반도의 허리인 중부 지방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려면 만주 대륙으로 진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리하여 고려에서 내건 정책 중에 하나가 북진 정책인데 이는 만주 대륙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정책이다.

문예가 발해국과 당나라의 전쟁을 막으려고 한 것은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확실히 성장하지도 못하고 중도에 주저앉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불행하게 발해국이 당나라와 전쟁을 함으로써 무너진다면 발해국은 고구려의 계승 국가가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할 수도 없게 된다. 결국 무왕이 당나라 침공을 감행한 것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고하였기 때문이다. 무왕의 대당 강경 태도로 말미암아 오히려 발해국은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한 것은 물론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무왕이 고구려의 영광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 아버지 대조영을 통해서라고 판단된다. 대조영은 고구려에 대해 다양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헌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유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구려와 동돌궐이 친교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대조영이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조영은 갖은 역경 끝에 발해국을 세우자마자 첫 사신을 동돌궐에 파견한다.

그러면 대조영은 왜 첫 사신을 하필이면 동돌궐에 파견하게 되었는가. 그럴 만한 까닭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대조영은 탁월한 전략가여서 건국 초기에 부족한 병력을 강화하는 데 부심한 듯하다. 이 점은 그가 신라에 와서 대아찬 벼슬을 받았다는 사정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병력을 강화하려는 노력의 하나가 동돌궐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다. 대조영으로서는 당나라의 추격을 집요하게 받은 경험이 있으므로 동돌궐의 침공으로 고전을 하고 있는 당나라와 분쟁을 일으킬 이유도 없었다. 대조영이 사신을 동돌궐에 파견한 것은 두 가지 목적에서이다. 건국을 알림과 동시에 발해국을 분쇄하려는 당나라의 제2차 침공을 막는 데 필요한 병력을 강화하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건국 이후에도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 사람들이 계속 발해국으로 들어와 발해국은 10여만 호에다 수만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돌궐의 강성으로 형성된 완충 지대가 갑자기 무너지면 당나라의 제2차 침공이 일어나리라고 대조영은 예상하였을 것이다. 과거 동돌궐은 고구려와 친교 관계를 맺은 바 있고, 또 당시 그곳에는 망명해온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돌궐은 발해국을 침공해올 염려는 없다 하겠으나 당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대조영은 병력을 강화할 뜻에 따라 사신을 동돌궐에 파견하였다.

발해국의 첫 사신이 동돌궐을 다녀온 후 동돌궐 내의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국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없다. 발해국으로 들어오기를 마다할 그럴 만한 까닭이라도 있었는가. 이들 유민들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동돌궐에 망명하여 30년 이상 생활하는 동안 어느 정도 경제적 생활 기반을 쌓아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대조영이 고구려를 계승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쌓아온 안정된 생활 터전을 버리고 다시 발해국에서 생활 기반을 닦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들은 끝내 발해국으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유민들의 귀환 거부로 대조영의 희망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동돌궐의 군사 면에서 이들 유민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어떠했는지 대조영이 모를 리 없다. 유민들이 동돌궐에 망명하기 이전만 해도 동돌궐은 당나라의 영향 밑에 있었다. 이들의 망명을 계기로 갑자기 막강해진 동돌궐은 거란족과 해족을 제압한 데 이어 거란족을 부추겨 당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이처럼 유민들이 동돌궐의 군사력 강화에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므로 대조영이 이들 유민들을 발해국으로 데려오려 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유추하면 동돌궐이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조영은 이러한 동돌궐에 사신을 파견한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사실은 그보다도 대조영이 고구려와 동돌궐의 기존 우호 관계를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사신을 파견할 마음을 먹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조영으로서는 동돌궐에 사신을 파견할 명분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대조영이 보낸 사신이 동돌궐에서 활약한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앞에서는 여기에 살고 있는 고구려 유민들의 발해국 귀환 문제를 가상의제로 제기하기도 하였으나 사신은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공식적으로 통고하였을 것이다. 이는 마치 처음 일본에 들어간 발해국의 사신이 발해국의 건국 및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알린 것과 동일하다. 동돌궐에 들어간 사신이 동돌궐에 고구려 유민의 송환 문제를 거론하였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문예가 발해국의 당나라 침공을 반대한 것이나 대조영이 첫 사신을 동돌궐에 파견한 것은 모두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서 자처하였음을 말해준다. 무왕이 일본에 보낸 사신은 발해국의 건국과 발해국이 고구려의 계승 국가임을 국서를 통해 일본의 천황에게 알렸듯이 대조영이 보낸 사신도 동돌궐의 황제에게 같은 내용을 알렸음에 틀림없다. 대조영이 동돌궐의 황제에게 소식을 알린 수단은 역시 국왕의 친서, 즉 국서가 분명하다. 일본에 전달된 국서는 동아시아의 국제 공용 문자인 한문으로 작성되었는데 동돌궐에 전해진 국서 역시 한문으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대조영과 무왕이 발해국의 국가적 위상을 다지기 위하여 대외적으로 노력, 활약하였음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 점을 중시한다면 발해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은 고구려계였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발해국이 동돌궐과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국서를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계의 사람들이 문자와 서기를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발해국의 역사 관련 문헌에 발해국에 문자와 서기가 있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발해국에서 고구려계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구려계 사람들이 발해국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이들만이 문자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국에서 고구려계 사람들이 말갈계 사람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하여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 절대 아니다. 고구려 시대에도 발해국이 세워진 속말말갈의 땅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곳의 고구려 사람들도 정치적으로 동요하여 전보다 감소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발해국의 건국 초기 고구려계와 말갈계 사람들의 거주 분포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이 『유취국사』에 있다. 이를 보면 곳곳에 산재하고 있는 촌리村里의 부락은 모두 말갈부락이며 여기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연 말갈 사람이 많고 고구려계 사람들은 매우 적으며 촌장은 모두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발해사 연구자는 이 『유취국사』의 기사에 근거하여 발해국에서 말갈계가 고구려계 사람보다 훨씬 많은 걸로 여겨왔다. 그러나 북한의 발해사 연구자는 이 기사가 고구려계의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변경지방의 종족 분포를 말해주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변경지방이 아닌 중앙에는 고구려계의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고 봄으로써 결과적으로 발해국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고구려계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리가 없어 보이는 견해라고 본다.

아무튼 말갈계보다 수적으로 적은 고구려계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변경지방에서도 고구려계의 사람을 촌장으로 삼은 것은 이들 고구려계 사람들만이 문자를 자유자재로 이해하고 있어서였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문자가 문맹을 지배하였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고구려계 사람들이 말갈계 사람을 다스리는 등 발해국을 주도한 것은 이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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