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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7>후고려기(後高麗記)(20)
2009/10/01 23:58 광인

단재 선생의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에 보면 고대 삼한 즉 마한ㆍ진한ㆍ변한은 마한을 주(主)로 진한과 변한이 종(從)이 된 삼두정치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나온다. 마한과 진한과 변한 세 한의 삼두정(트로이카) 체제가 옛 고조선의 막조선ㆍ진조선ㆍ번조선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감탄할 일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시기 한(韓)의 이름을 걸고 나선 세 종족의 왕국ㅡ한반도 남부의 신라 김씨와 북부 및 만주와 연해주를 아우르는 발해 대씨, 그리고 고려 유민으로서 산동반도에 고려인의 나라를 세운 제조(齊朝) 이씨. 이 세 나라가 서로 동맹을 맺어 삼두정체제를 되살렸다면 향후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역사라는 것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금기라지만 너무도 달콤한 상상이라서 내 머릿속에서만 남겨둘 수는 없었다. 이상과 현실은 서로 다른 것. 이상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잔혹하다. 대부분이 그러했다.
 
[癸酉, 平盧淄靑節度使、檢校司徒、平章事李納卒.]
계유에 평로치청절도사 검교사공 평장사 이납이 졸하였다.
《구당서》 본기제13, 덕종 하(下) 정원 8년(792) 5월
 
하여튼 목숨복은 지지리도 없는 이씨 집안이었다. 정원 8년(792) 5월 같으면 그 달 초하루가 을묘니까 계유면 19일. 5월 19일이 납왕의 기일 되시겠다. 농서군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그를 위해서 당조에서는 제후의 예에 준하여 사흘 동안 정사를 폐했다. 《자치통감》에서는 그의 죽음을 표현하되 '졸(卒)'이 아닌 '훙(薨)'으로 기록했으니, 그가 '제'라는 한 나라의 당당한 국왕이었으며 앞서 덕종이 봉천에서 내린 '성신문무의 조'에서 약속했던 '옛 관직과 작위를 모두 인정한다'는 조항을 당조에서 지켜준 것이다.
 
그리고 이 해에 발해에서는 정효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굴된 것은 1980년의 일이다.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용수공사 용해대대 용두산 위. 남북향 170도의 장축을 지니고 있으며, 벽돌과 판석을 써서 만들었는데 정혜공주의 것과는 달리 당조의 '벽돌'무덤 양식을 도입해서 무덤을 만들었고, 묘도ㆍ묘문ㆍ연도ㆍ묘실과 함께 무덤 위에다 벽돌로 또 '탑'을 만들었다는 것이 고려와 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발해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지하로 파내려간 다음에 벽돌과 돌로 무덤의 묘실 즉 '안칸'을 만들었는데, 남북으로 긴 장방형 모양으로 동서너비가 2.1에 남북길이가 3.1m이고 벽의 높이는 서로 다르지만 동서가 1.4m에 남쪽이 1.66m이고 북쪽은 1.6m. 벽과 3단평행고임을 모두 '벽돌'로 쌓아서 그 위에 큰 판돌을 덮었으며, 안에 남북 2.4m 동서 1.45m 높이 약 0.4m의 관대를 놓았다.(시신은 이 관대 위에 놓여 있었다)
 
안칸 입구를 돌문으로 막고 바깥문에서부터 지표면까지 마치 계단처럼 수평거리 7.1m의 바깥길을 냈다.(아마 이 문도 원래는 막혀 있었겠지만....) 무덤 위에 세워진 탑은 지금 탑신은 붕괴되고 기단부만 남았는데, 기단 평면이 남북으로 5.65m에 동서 5.5m이고 크기는 가로세로 2.7m * 2.6m, 남아있는 높이는 0.48m로 터무니없이 작다. 이 무덤도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부장품 같은 것은 흙으로 만든 인형조각이나 금동장식, 목관에 장식했을 금동못과 쇠못, 쇠조각, 그리고 칠기조각이며 토기파편 같은 것이 나오긴 했지만 이미 도굴당해서 별 재미는 못 봤다나. 그나마 무덤의 주인을 밝혀줄 '묘지명'이 발견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夫緬覽唐書, 嬀汭降帝女之濱, 愽詳丘傳, 魯舘開王姬之筵. 豈非婦德昭昭, 譽名期於有後? 母儀穆穆, 餘慶集於無疆? 襲祉之稱, 其斯之謂也.]
무릇 오래 전에 읽었던 《상서[唐書]》를 돌이켜보면 규수(嬀水)의 물굽이는 제녀(帝女)를 내려보낸 물가터요,  널리 《좌전[丘傳]》을 상세히 보면 노관(魯館)은 왕희(王姬)를 시집보낸 혼례터라[開王姬之筵]. 아내로서 덕이 환하고 뚜렷할지면[昭昭] 명예로운 이름[譽名]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인가. 어머니로서 규범이 단정하고 공경스러울지면[穆穆] 선대가 쌓은 은혜[餘慶]가 어찌 무궁하게 전해지지 않을 것인가. 조상들의 복을 물려받음[襲祉]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효공주묘지명』 병서(幷序)
 
뭐야, 뭐 이런 게 다있어? 사람만 다르지 내용은 거의 똑같잖아? 
 
[公主, 稟靈氣於巫岳, 感神仙於洛川. 生於深宮, 幼聞婉嫕. 瓌姿稀遇, 曄似瓊樹之叢花, 瑞質絕倫溫, 如崑峯之片玉. 早受女師之敎, 克比思齊, 每慕曹家之風, 敦詩悅禮. 辨慧獨步, 雅性自然. ▨▨好仇, 嫁于君子. 摽同車之義, 叶家人之永貞. 柔恭且都, 履愼謙謙. 簫樓之上, 韻調雙鳳之聲, 鏡臺之中, 舞狀兩鸞之影. 動響環珮, 留情組紃. 黼藻至言, 琢磨潔節. 繼敬武於勝里, 擬魯元於豪門. 琴瑟之和, 蓀蕙之馥.]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神仙)에 감응받았다.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왔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고 하였고[思齊], 매번 한(漢) 반소[曹家]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거니와 우아한 품성은 타고난 것이었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고[雙鳳之聲],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兩鸞之影]가 춤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단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의 띠를 조심하였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漢)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왔다.
『정효공주묘지명』
 
정혜공주가 그러했듯, 정효공주도 개인적인 삶이 화목하지 못했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황녀라고 다 행복한 삶만 사는 것은 아님을 동서고금을 통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태어난 날 빠르다고 죽는 날까지 빠르란 법 없고, 왕후장상이나 천한 백정놈이나 다 한번 태어나면 한번은 죽는 것이고... 어차피 태어나서 결국 죽게 되어있다면 그래도 죽는 날까지 나름 편안하고 즐겁게 살다가 죽어도 분이 풀릴까 말까한데 죽을 거 왜 사냐고 물어보면 그저 그런 집에 태어나서 왕족이나 귀족같은 편안한 삶을 누리지도 못한 채 평생 힘들게 힘들게 고생만 하다가 이제 막 소원을 이루려는 순간에 켁 죽어버리니 더러워서 못 살겠다네.
 
[誰謂夫聟. 先化无終, 助政之謨. 稚女又夭, 未延弄瓦之日. 公主出織室而灑淚, 望空閨而結愁. 六行孔備, 三從是亮. 學恭姜之信, 矢銜杞婦之哀. 悽惠于聖人, 聿懷閫德, 而長途未半, 隙駒疾馳, 逝水成川, 藏舟易動. 粵, 以大興五十六年夏六月九日壬辰, 終於外第, 春秋三十六. 諡曰貞孝公主. 其年冬十一月廿八日, 己卯陪葬於染谷之西原, 禮也.]
누가 일렀던가, 남편이 먼저 돌아갈 것을.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딸마저 일찍 죽어, 미처 실패를 갖고 놀 나이도 되지 못했구나.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공강(共姜)의 신(信)을 배웠고, 기부(杞婦)와 같은 애처로움을 품었다. 성인(聖人)의 은혜를 입어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건만, 절반도 되지 않은 인생길에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꼭꼭 감춰둔 배를 쉽게 움직이나니. 아아, 대흥(大興) 56년(792) 여름 6월 9일 임진일(壬辰日)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시니 나이는 36세라. 이에 시호를 정효공주(貞孝公主)라 하고 그 해 겨울 11월 28일 기묘일(己卯日)에 염곡(染谷)의 서원(西原)에 배장하였으니, 예(禮)로다.
『정효공주묘지명』
 
인생은 절반밖에 안 갔는데 세월은 저만치 달려나가고, 조용히 흐르는 물도 모이면 냇물이 되어 계곡 깊이 숨겨둔 배를 움직이듯ㅡ. 시간이라는 것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는데 정작 내 몸은 젊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제 갈길로 떠나 뿔뿔이 흩어지고 어디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음을 마음껏 보여줄 수도 없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다.
 
[皇上罷朝, 興慟避寢○懸. 喪事之儀, 命官備矣. 挽郎鳴咽遵阡陌, 而盤桓轅馬, 悲鳴顧郊野, 而低昂喻以鄂長, 榮越崇陵, 方之平陽, 恩加立厝. 荒山之曲, 松檟森以成, 行古河之, 隈泉堂邃. 而永翳惜, 千金於一別, 留尺石於萬齡. 乃勒銘曰.]
황상께서는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은 관청에 명하여 완비하도록 하였다. 상여꾼의 명인(鳴咽) 소리 발길따라 맴돌건만 어정거리는[盤桓] 수레 끄는 말[轅馬]의 슬피 우는 소리가 교야에 가득하네. 한의 악읍[鄂長]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넘고, 당의 평양(平陽)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황산(荒山)의 골짜기에 솔과 개오동이 빽빽히 줄지어 섰는데, 고하(古河)가 굽이치는 곳에 무덤은 깊숙히 감추어져 있구나. 천금같은 공주와 이별하기 아쉬워, 비석을 세워 영원히 남기고자 명문(銘文)을 새기나니.
 
不顯烈祖     불현(不顯)하신 열조께서 
功等一匡     천하를 통일하였고,
明賞愼罰     상벌을 밝혀 신중히 하시니
奄有四方     엄정함[奄]이 사방에 미쳤도다.
爰及君父     군부(君父)에 이르러서는
壽考無疆     만수무강하시어
對越三五     삼황오제[三五]와 짝하였고
囊括成康     성왕과 강왕[成康]을 포괄하시니
<其一>       <이것이 첫째이다.>
 
惟主之生     공주께서 태어나실 때를 생각하니
幼而洵美     어려서부터 참으로 아름다웠고
聰慧非常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비상하시어
博聞高視     널리 듣고 높이 보셨다네.
北禁羽儀     궁궐[北禁]의 모범 되시고
東宮之姉     동궁(東宮)의 누나 되시니
如玉之顏     옥같은 그 얼굴
蕣華可比     무궁화만이 비겼다네.
<其二.>      <이것이 둘째이다.>
 
漢上之靈     한강 신녀[漢上]의 영기(靈氣)를 품고
高唐之精     고당 신녀[高唐]의 정기를 이었으며,
婉之熊     고운 자태 지니시고
閫訓玆成     현성(玆成) 속에 자랐다.
嬪于君子     군자에게 시집가
柔順顯名     유순하기로 이름났으며
鴛鴦成對     원앙새가 짝을 이루고
鳳凰和鳴     봉황새가 울음에 화답하듯 하였다.
<其三.>      <이것이 셋째이다.>
 
所天早化     하늘이 일찍 변화한 바 
幽明殊途     유명(幽明)을 달리 하시니
雙鸞忽背     한 쌍의 난조(鸞鳥)가 홀연히 등을 돌리고
兩劍永孤     쌍검이 영원히 떨어져버렸다.
篤於潔信     순결과 정절에 돈독하여
載史應圖     역사책에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길 만하며,
惟德之行     부덕을 행함에
居貞且都     정조가 있고 아름다왔다.
<其四.>      <이것이 넷째이다.>
 
愧桑中詠     음란한[桑中] 노래를 부끄러워 하고
愛栢舟詩     수절의 시를 즐겨하였으며,
玄仁匪悅     크게 어질고 근심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중에
白駒疾辭     빛깔이 흰 망아지가 빠르게 질주하매
奠殯已畢     존빈(奠殯)도 세상을 하직하였다.
卽還靈轜     장례가 이미 끝나 상여가 돌아갈 때,
魂歸人逝     혼도 사람들도 모두 돌아가니
角咽笳悲     뿔피리 소리 구슬프고 호드기 소리 처량하다.
<其五.>      <이것이 다섯째다.>
 
河水之畔     강물의 가장자리
斷山之邊     단산(斷山)의 옆에서
夜臺何曉     묘광[夜臺]은 언제 광명을 볼 것이며
荒隴幾年     봉분[荒隴]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森森古樹     빽빽한 고목들과
蒼蒼野煙     연기 자욱한 들판을 보며
泉扃俄閟     무덤 문을 갑자기 닫으니
空積悽然     처량한 감정 불현듯 쌓이네.
<其六.>      <이것이 여섯째이다.>
『정효공주묘지명』
 
정효공주의 무덤에서는 여러 인골이 수습되었는데, 서른 한 개의 인골 가운데 26개는 남자 것이고 여자 것은 다섯 개,
골격으로 봐서는 남자의 살아생전 키는 161cm였고 여자의 키는 156cm, 치아로 추정한 결과 이들의 나이는 대략 25세에서 45세 사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효공주와 그 부군의 유골임에 틀림없다고 학자들은 결론지었다.
 

<정효공주묘에서는 발해 고분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벽화'가 확인되었다>
 
무덤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명문이 발견된 것 말고도, 이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 때문도 있었다. 모두 열두 명이 정효공주 무덤 안에 그려져 있었는데, 무덤 안길의 동서 벽과 안칸 동서벽, 그리고 남쪽 끝과 북벽에 모두 벽화를 그렸다. 그리고 그들 인물들은 모두 당풍의 옷을 입고 있어 발해의 상류층이 정효공주무덤이 조성된 무렵에는 이미 당의 문화를 널리 수용해 그 복식까지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정혜공주묘나 화룡현 하남둔 고분에도 벽화를 그린 흔적이 남아있긴 한데, 밑바탕으로 바른 회칠이 떨어져나가 완전히 멸실되고 파편만 남았는지라 그나마 온전한 것은 정효공주묘의 벽화다. 벽에 백회를 발라 그 위에 열두 명을 채색으로 묘사했는데, 예리한 긁개같은 것으로 밑그림을 그린 위에 적ㆍ청ㆍ녹ㆍ흑ㆍ백색의 색깔을 칠하고 다시 먹선으로 윤곽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방법(오늘날 한국화 그리듯이)으로 그렸는데, 윤곽을 스케치하는 방법만 다르지 대체로 수산리무덤 등 고려 벽화에서 발휘된 전통적인 화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란 지적이 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은 대부분 무기류, 칼이나 철퇴 같은 것을 들고 화살통도 차고 있는 모습이지만 악기를 들고 있는 사람도 더럿 보이는데, 아마 당악을 수용한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저기 그려진 위사(衛士), 그러니까 팔을 걷어붙인 채 몸에는 옷깃이 둥근 단령을 입고 머리는 '말액'이라고 해서 상투를 틀어올려 두건으로 싸맸으며 오른팔에는 철퇴 비슷한 것을 들고 있는 인물상의 '성별'이 실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 중국 학자가 주장한 건데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데다 얼굴도 뽀샤시하고 갸름하며 입술에도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것이 아무리 봐도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실은 남장을 한 여자로서 정효공주를 수행한 위사의 모습을 벽화에 그려넣었다는 것이다.
 
글쎄, 그게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말 그렇다면 재미있긴 하다. 공주를 수행한 위사들이 모두 남장한 여자들이었다면 이들이 공주의 경호까지도 맡았던 것인지, 그렇다면 발해는 실로 여권이 신장된 국가로서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나라가 아닐 것인가. 여자들이 말을 탈 때 말등 한쪽에서부터 다소곳한 모습으로 걸쳐앉는 것이 보기 흉하다며 '앞으로는 남자들처럼 다리를 벌려서 타라'고 한 측천무후보다도 훨씬 앞서간 나라로서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당당히 공주를 호위할 일익을 맡겼던 나라임에 틀림이 없으리니.
 

 
여자가 호위병의 임무를 맡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얘기를 좀 빗나가서, 사자들도 숫사자 대신 암사자가 사냥을 해서 숫사자를 포함한 사자 무리들을 먹여살린다고 하고, 발해 여자들은 남편이 첩 두는 건 두눈 뜨고 못 봤다는 억척녀들었다고 《송막기문》같은 중국 문헌도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남자 입장에서 여성부 인사라고 TV에 나올 때마다 '발해녀' 하고 무심코 중얼거린다. 반칭찬 반조롱이다.
 
시사(時事)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내 기본적인 입장이지만, 솔직히 개뿔도 모르는 여자들이 군가산점에 대해서 '위법이다', '남녀평등에 어긋난다'면서 기어이 그걸 폐지시키고 다시 부활시킨다 만다에 대해서 '전거성'이 심야토론에서 목에 핏대 올려가며 부활을 적극 지지하실 때조차 관심이 별로 없었다. 군가산점이야 공무원시험 볼 때 혹은 취직할 때 군역을 필한 것만 증명되면 어느 정도 점수를 플러스시켜주는 제도라는 정도만 알고 있는데다, 본인은 어차피 예능ㅡ소설 및 만화 분야로 나가기로 진로를 결정한 터라서 그걸 줘도 그만이고 안 줘도 그만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진짜 극악한 상황이 아닌 이상 내가 직장에 취직할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남녀평등' 외치며 군가산점 반대하던 여성부에서 뜬금없이 '여성징병제'를 논의해보자는 말을 한 순간에 나는 생각했다. 이것들 미쳤구만. 전거성이 그렇게 핏대 올려가며 비판한 것이 나름 이유가 있었구만. 결국 별수 없는 정치꾼 꼴통에 지나지 않았구나 저 여성부니 뭐니 하는 것도.... 라고 말이다.
 
같은 예라도 스위스는 어땠나? 스위스도 한 2년 전까지 징병제를 운영하다가 1년 전에 모병제로 전환하자고 법안이 발의가 됐는데 그 법안을 낸 사람들이 여성 국회의원들이었다. 모병제 법안을 낸 사유마저도 우리나라 여성 국회의원들과 똑같다. "우리는 모든 부문에서 양성 평등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의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군에서 남녀가 평등할 수 있도록 군복무 의무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라는 것. 뭐 저쪽 애들은 우리보다 의식이 좀 깬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는 짓은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지.
 
양성평등을 제시하고 '남자만 군역을 지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하면서, 한쪽에서는 '남자에게만 주어진 군복무 의무를 폐지하자'며 모병제를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남자에게만 주어진 군복무 의무를 여자에게도 지우자'며 여성징병제를 내놓는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정도라서 그래야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에는 우리나라 여성부의 논의가 스위스 여성 국회의원들보다 더 떨어진다(아니, 비교도 안 된다)고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저들이 제시하던 '양성평등'이란 군복무 의무에 대한 것이었을텐데, 군복무 자체를 여자에게 같이 분담시키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여자나 남자나 똑같이 군복무의 의무를 선택할 권리를 주는 것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정효공주묘에서 나온 구리거울.>
  
여담이지만 정효공주를 칭송하면서 묘지명의 찬자가 든 인물 가운데 경무공주는 《한서》에 나오는 한 선제의 딸이자 원제의 여동생이다. 처음에 시집간 남편 장림(張臨)이 죽자 설선(薛宣)에게 다시 시집갔고, 몰래 남자하고 붙어먹은 일도 있단다. 지금이야 '그게 뭐?'라고 하지만 당시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지아비를 두 명 섬긴 것도 모자라서 자기 지아비 놔두고 딴 남자와 놀아난 속된 말로는 화냥년보다 더한 '썅년'인거지. 그런 경력이 있는 경무공주와 정효공주를 비긴 것은 묘지명을 새긴 사람의 오류인듯.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이게 자칫 알려졌다간 죽은 사람 욕보였다고 묘지명 찬자의 목이 무사했을 리는 없다.
 
사후에 태부의 직책까지 받은 납왕이지만, 제의 앞낲이 순탄할 수만은 없었다. 납왕이 죽고 즉위한 어린 아들 이사고 때문이었다.
 
[子師古, 累奏至靑州刺史.]
아들 사고는 누차 아뢰어 청주자사에 이르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납왕이 죽었을 때 이사고는 청주자사라는 제의 요직에 있었는데, 죽기 직전에 자기 입으로 "내 나이 열다섯에 절모를 받았다[吾年十五擁節旄]."(《자치통감》中)고 한 것에서 그의 나이 열다섯에 얻은 자리임을 추정할 수 있다.(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광으로 얻은 자리였지만.)
 
[貞元八年, 納死, 軍中以師古代其位而上請, 朝廷因而授之. 起復右金吾大將軍同正ㆍ平盧及靑淄齊節度營田觀察ㆍ海運陸運押新羅渤海兩蕃使.]
정원 8년(792)에 납이 죽자 군중(軍中)이 사고(師古)를 그 자리에 추대하고 상청(上請)하니 조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起復하여 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 동정(同正)ㆍ평로급청치제절도(平盧及靑淄齊節度) 영전관찰(營田觀察)ㆍ해운육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陸運押新羅渤海兩蕃使)로 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구당서》본기에는 납왕이 죽고 석 달쯤 지난 8월 신묘에 당조는 이사고를 운주대독부장사(鄆州大都督府長史)ㆍ
평로치청등주절도관찰(平盧淄靑等州節度觀察)ㆍ해운육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陸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로
삼았다고 적고 있는데, 아버지 납왕의 관직을 거의 그대로 세습한 것으로서 납왕 때에 비하면 전쟁이나 별다른 무리 없이 미끄러지듯 수월하게 제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즉위할 수 있었다.
 
[貞元八年閏十二月, 渤海押靺鞨使楊吉福等三十五人來朝貢.]
정원 8년(792) 윤12월에 발해의 압말갈사(押靺鞨使) 양길복(楊吉福) 등 35인이 와서 조공하였다.
《당회요》 권제96, 발해전
 
《당회요(唐會要)》. 소면(蘇冕)·최현(崔鉉) 등이 각기 저술한 《회요》에 북송 때의 왕부(王溥) 등이 당말(唐末)까지의 자료를 첨가, 제왕·종실을 비롯해 예악·관제·재제(財制)·외교 등을 514항으로 나눠서 《육전(六典)》의 기본제도며 칙(勅)·격(格)·주의(奏議) 등의 기록을 거의 연대순으로 배열, 961년에 완성한 책이다. 지금 남아있는 현행본은 청(淸) 때 결권(缺卷)을 다른 자료로 보충한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成德軍節度王武俊率師次於德ㆍ棣二州, 將取蛤朵及三汊城.]
성덕군절도(成德軍節度) 왕무준(王武俊)이 군사를 이끌고 덕(德)ㆍ체(棣) 2주에 주둔하면서 합타성과 삼차성을 차지하고자 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문제는 사고왕이 뒤를 이은뒤 곧바로, 성덕군절도사 왕무준과의 충돌로 드러났다. 예전 주도가 당조에 반란을 일으켜 덕종은 봉천으로 도망가고 장안과 낙양이 일시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평로치청의 영지였던 체주를 관할하고 있던 치청의 자사 이장경(李長卿)이 자신의 성을 들어 주도에게 항복했었다. 여러 절도사들이 나서서 주도를 토벌한 뒤, 왕무준은 주도 토벌의 공을 인정받아 덕주와 체주를 자신의 영지로 편입시켰지만, 합타만은 납왕이 그대로 관리했다. 이것이 왕무준에게는 위협이자 불만이었다.
 
산동 지역은 춘추시대부터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다. 당조의 소금 생산지는 회남과 강남, 복건과 영남 연안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도 산동과 하북 연안이 가장 중추지역이었다. 제의 본거지인 산동, 그러니까 평로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양이 70만 관이었다고 하는데, 808년 당시 각염원에서 한 해 동안 거둬들인 양의 절반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당조 하남도의 체주와 합타의 1년 소금생산량은 수십만 곡에 달했는데 이곳을 두고 납왕은 왕무준이나 주도와 삼파전을 벌였다. 그 중 주도가 먼저 망하고, 덕주와 체주는 왕무준에게 넘어갔지만, 체주 땅 합타(蛤朵)만은 납왕이 차지한 채, 덕주의 남쪽 강을 가로지르는  삼차구성(三汊口城, 삼각형 모양의 성)을 쌓고서 그 땅에서 나는 소금의 이익을 모두 독점했다. 더구나 위박절도사 전서와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길을 빌려 끊임없이 덕주를 공격했다.
 
그러던 차에 납왕이 죽고 사고왕이 즉위했다. 왕무준은 사고왕이 아직 어리고, 납왕 때에 활약했던 구장(舊將)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무척 얕보았다[心頗易之]"고 한다. 잘하면 당조 최대의 소금생산지만 얻는게 아니라 평로치청의 영토 전체까지도 아우를수 있다는 계산하에 왕무준은 기어이, 합타와 삼차성을 공격했다. 선봉에 선 것은 왕무준의 아들 왕사청(王士淸). 이때 사고왕은 앞서 아버지에게 항복했던 전(前) 체주자사 조호에게 왕무준을 막게 한다.
 
[師古雖外奉朝命,而嘗畜侵軼之謀,招集亡命,必厚養之,其得罪於朝而逃詣師古者,因即用之. 其有任使於外者,皆留其妻子,或謀歸款於朝,事泄,族其家,眾畏死而不敢異圖.]
사고는 비록 겉으로는 조정의 명을 받드는 것처럼 했지만 그 전부터 침략할 계획을 세우면서 망명자들을 불러모았을 뿐 아니라 항상 그들을 잘 대우하였다. 조정에 죄를 짓고 도망쳐 사고에게 오는 자들은 지체없이 임용했다. 사신의 임무를 띠고 바깥에 나가는 자는 모두 그 처자를 남겨두게 했는데, 어쩌다 조정에 귀순하려 모의하다가 누설되면 그 가족을 죽였다. 다들 죽음이 두려워 감히 다른 생각을 못 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사고왕의 통치방식은 할아버지 정기왕의 그것과 많이 닮았다. 체주자사를 지낸 일이 있는 만큼 그가 체주의 지리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기록에도 나오지만 조호뿐 아니라 당조와 여러 번진의 망명자들에 대해 사고왕은 우대와 등용을 아끼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당조에 거역한 죄인의 몸이라 해도. 이미 천자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져 지방번진들에 대해 제대로 된 통제를 가할 수 없는 당조와는 달리 제는 이미 독립왕국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는 상태였고, 천자의 신하로서가 아닌 제라는 나라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융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
 
그가 제를 다스리던 때 그의 임의에 따라 관리가 처벌된 사례가 하나 있는데, 상주(上奏)의 일로 장안의 조정으로 파견했던 독고조(獨孤造)가 뭔가 왕의 심기를 건드린 것 때문에 대장(大將) 왕제(王濟)를 시켜 그를 목졸라 죽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대체로, 독고조가 사고왕을 버리고 당조에 투항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단다. 그를 내버려두면 다른 누가 또 당조에 투항하려 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일벌백계'를 위해서 그를 처형한 것이라고. 아마 이때도 독고조의 식구는 평로치청의 수도인 운주에 남아있었을 것이고 독고조가 죽은 때와 비슷하게 모두 죽었을 것이다. 자기 가신들의 식구를 인질로 남겨두고 유사시 연좌제를 적용해 죽인다거나, 그렇게 죽을 것이 두려워 감히 다른 생각을 못했다는 것은 법을 엄하게 시행해서 몇 사람이 모여도 감히 수군대거나 그러지 못했다는 정기왕 시대의 모습과 흡사하다. 어느 나라나 통치자가 법을 집행하는 것은 엄격하게 그리고 가혹하게 이루어지고 백성들도 그에 따라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인데도, 그 시대의 다른 번진들 다 제쳐두고 사고왕만 특별나게 그랬던 것처럼 적어놓은 것은 후세 사관들의 악평이라 하겠다. 아마 이것도 사고왕이 좀더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나서의 일일테니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여하튼 그가 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성덕절도의 도전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식의 통치는 미처 구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왕사청의 군사들이 체주 동쪽 끝에 있는 적하(滴河)를 건넜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터진다.
 
[會士淸營中火起,軍驚,惡之,未進. 德宗遣使諭旨,武俊即罷還. 師古毁三汊口城,從詔旨.]
마침 사청의 진영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군사들이 크게 놀라면서 불길하게 여기고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덕종이 사신을 보내어 유지(諭旨)하니, 무준은 곧 거두고 돌아갔다. 사고는 삼차구성을 헐고 조지(詔旨)를 따랐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고
 
병영에서 일어난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군사들은 이 화재를 불길하게 생각하고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좀더 무리를 해서 해석을 하자면, 성덕절도의 군사들은 내심 평로치청의 고려인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대로 된 전쟁은 치러보지도 못했는데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서 '우린 못 가 배째' 이러고 있고, 강제로 이끌고 전쟁해봤자 사기가 떨어진 군사들이 전장에서 제대로 맥도 못 출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왕무준을 구원해준 것은 덕종이었다. 지난번에 괜히 번진 토벌하겠다고 나대다가 개피본 덕종으로서는 지금 이대로, 현상 그대로 유지하기를 바랬고, 번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자칫 승리한 쪽의 세력이 커져서 당조에 도전하게 될 위험도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소금생산지는 얻지도 못하고 물자손실에 군사들 사기저하, 손해만 엄청나게 본 왕무준은 '그냥 니가 참지'하고 나서는 덕종의 권고에 못이기는 척 군사를 돌렸고, 이사고 역시 덕종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삼차성을 허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직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못한 사고왕으로서는 왕무준과 대립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대외적으로 자신을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인정해준 당조에 대한 예우도 저버릴 수 없었다.
 
아무튼 이후로 사고왕이 살아있을 동안에 제의 영토를 노리는 번진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사고왕이 다른 번진을 공격하는 일도 없었다. 이것도 나름 실리획득이라면 실리획득이려나.
 
[十年二月, 以來朝渤海王子大淸允爲右衛將軍同正. 其下拜官三十餘人.]
10년(794) 2월에 내조한 발해 왕자 대청윤(大淸允)을 우위장군(右衛將軍) 동정(同正)으로 삼았다. 그 밑으로 배관(拜官)이 30여 인이었다.
《당회요》 권제96, 발해전
 
왕자 대청윤을 사신으로 당조에 보낸 것은 지금 남아있는 흠무왕의 살아 생전 마지막 사행기록이다.
 
[大興五十七年三月四日, 王薨. 卽貞元十年.]
대흥 57년(794) 3월 4일에 왕이 승하하였다. 곧 정원 10년이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문왕
 
문왕은 발해 역대 국왕들 가운데 가장 오래 즉위한 왕이다. 당 덕종 정원 10년 즉 대흥 57년 태세 갑술(794) 3월 4일이 곧 문왕의 기일인데, 유득공은 아마 《쇼쿠니혼키》를 보고 날짜를 적은 듯 싶다.
 
솔직히 발해 역사를 짚어보기 위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을 두고 말할 때 나는 유혜풍의 《발해고》보다는 김육불의 《발해국지장편》을 더 추천하고 싶다. 문헌인용의 방대함도 그렇고(사실 이 점에 대해서는 유혜풍 본인이 '역사서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고 하면서 스스로 자인하신 것이라 여기서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지만) 나중에 가서 이야기하겠지만 발해의 13대 현석과 15대 말왕 인선의 사이에 '대위해'라는 왕이 한 명 더 있었던 것을 《당회요》를 뒤진 끝에 찾아낸 것도 《발해국지장편》의 공이다. 근대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내용을 충실하게 수집해놨다.
 
지금 남아있는 《당회요》 현행본이 청조의 《사고전서》에 실려있던 것이라고 했으니 이 점에 대해서도 유득공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유득공은 《사고전서》를 보지 못했으니까. (당시 청조에서 《사고전서》의 국외유출을 엄금하고 있었기에 조선의 국왕 정조도 여러 차례 《사고전서》를 수입하려던 계획을 단념하고, 대신 그보다 앞서 나온 《고금도서집성》을 사들이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개정증보판'에 해당하는 《사고전서》대신 조선에 들어온 '이전판'《고금도서집성》에 실려있던 것 중, 서양 사람이 지은 기계관련 서적《기기도설》을 응용해 만든 것이 그 유명한 '거중기'이며, 이것을 만든 사람은 그 유명한 다산 정약용. 《고금도서집성》하나로도 이만큼 이룬 우리가 《사고전서》까지 손에 넣었더라면 과연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었을까 입맛이 쓰리다.
 
대흥이라는 연호에 대해서도 이미 문왕이 보력으로 연호를 바꾼 것을 『정혜공주묘지명』에서 밝혔건만 왜 갑자기 『정효공주묘지명』에서는 또 대흥으로 연호가 환원되어 있는가, 처음에는 이걸 보고 둘 중의 하나는 가짜다 하는 미친 생각도 해봤지만 《속일본기》에도 문왕의 사망을 전하는 강왕의 국서에서 문왕의 사망 당시 연호를 '대흥'이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면 역시나 내가 또 미친 생각을 한 것이었다. 처음 정한 '대흥' 연호를 '보력'이라 바꾸고 수도도 상경으로 옮겼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원래대로 '대흥'연호를 되돌리고 수도도 상경에서 동쪽으로 옮겨버린 것은 문왕의 정사가 뭔가 발해 내부의 반대파를 만들어 그들과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결국 문왕이 꺾여버린 것을 암시해준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이니 민본주의니 하는 얘기는 고대에 나온 단어로서 오늘날의 사회가 추구해야할 방향과 가장 부합하는 단어로 주목받는다지만, 고대사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더구나 세워진지 겨우 백년 가까운 나라에서 그 나라를 이끌어갈 왕의 권한이 약해진다는 것은 곧 나라의 기강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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