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yahoo.com/_G7FJGWX2TT2ZQ2ZVAOP5T52BLQ/articles/9730
* 긴 원문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를 좀 짧게 분리 편집하였습니다.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
   1.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  http://tadream.tistory.com/74
   2.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고구려의 통치기구  http://tadream.tistory.com/75

   3.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고구려의 역사 (해모수계,동명계,졸본,동부여)  http://tadream.tistory.com/73
   4.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고구려의 경제  http://tadream.tistory.com/76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


2. 고구려의 역사


1). 개요


해모수는 B.C 239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여 B.C 238년에 왕검조선을 멸망시키고, B.C 232년에 옛 왕검조선의 잔류세력인 오가(五加) 회유에 성공하여 옛 왕검조선의 진한(辰汗) 지역을 장악한 후 만백성의 추대를 받아 단제(檀帝)가 되었다. 이때부터 해모수계(解慕漱系)가 4대 동안 고구려를 통치하였다.(전기고구려)
 

그 후 B.C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과 요하(遼河) 동쪽 고구려(高九黎) 지역을 점령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을 때, 동명(東明)이 일어나 한나라 군사와 싸우는 과정에서 세력을 얻어 B.C 86년에 해모수계 무리를 백악산아사달(장춘)의 동쪽에 위치한 가섭원(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이때부터 동명계(東明系)가 2대 동안 고구려를 통치하였다.(후기고구려)
 

그 후 6세 고무서단제(高無胥檀帝) 때 수도를 골본(忽本:심양)으로 옮긴 후, B.C 58년에 고무서단제가 죽었을 때, 고주몽(高朱蒙)이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高九黎)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나 고구려를 장악하지 못하여 무리 일부를 이끌고 비류수상류(혼하상류)로 이동하여 고주몽 고구려를 세웠다.
 

동명계 무리가 분열되자 현도군이 다시 고구려의 수도 골본(忽本:심양)을 점령하였고, 골본에 남아 있던 무리들 중 일부는 한나라에 복속하였고, 일부는 장춘 방면으로 이동하여 북옥저(北沃沮)라 불리었다.
 

이때 길림 방면에 있던 해모수계(解慕漱系) 무리의 우두머리 대소(帶素)는 대왕(大王)을 칭하며 동명계 무리에 복속하지 아니하고 독립세력으로 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혼하상류로 이동한 고주몽(高朱蒙) 무리들이 고구려(高句麗)로, 길림 방면의 해모수계(解慕漱系) 무리와 장춘 방면의 동명계(東明系) 무리들이 부여(夫餘)로 각 적혀 있다.
 


2). 해모수계 고구려의 역사 (주: 초기 부여로 보임)


한단고기 북부여기에 적혀 있는 해모수계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본다.
 

1세 단제 해모수(解慕漱)


「임술년(B.C 239년)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神)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天王郞)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는 47세 고열가단제 57년으로 임술년 4월 8일이다. 웅심산(熊心山)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蘭邊)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시며 오룡(五龍)의 수례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政事)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계해년(B.C 238년) 이 해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연호(烟戶)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五加)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년(B.C 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檀君)이 되었다.」

「신사년(B.C 220년) 7월 백악산아사달에 새로운 궁궐 336칸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天安宮)이라 하였다.」
 

2세 단제 모수리(慕漱離)


「무신년(B.C 193년) 평양(平壤)에 성책을 설치하고 위만(衛滿)의 무리에 대비하게 하였더니 이에 위만은 싫증을 느꼈는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기유년(B.C 192년) 해성(海城)을 평양도(平壤都)에 속하게 하고 고진(高辰)을 시켜 수비하였다.」
 

3세 단제 고해사(高奚斯)


「임신년(B.C 169년) 나라왕(樂浪王:평안도 지방 나라) 최숭(崔崇)이 곡식 300섬을 해성(海城)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나라(樂浪:특정한 나라를 지칭한 말이 아니고 대국 또는 종주국을 뜻하는 말로서 바다를 건너 평안도 지방으로 온 것으로 보아, 멸망하기 전 기자조선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馬韓)의 서울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 195년)의 겨울이었다.」
 

「계축년(B.C 128년) 위만조선의 도둑 떼를 남녀성(南閭城)에서 크게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앞에 나온 계축년조 문구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128년에 위만조선으로부터 요하 동쪽 요동반도 지역을 빼앗아 그 곳에 남쪽 담당 제후 남여(南閭)를 두었다.
 

같은 해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포위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남쪽 담당 제후 남여를 재물로 꾀어 한나라에 복속시키고 요동반도 지역에 창해군(蒼海郡)을 두었다.
 

이 창해군과 남여에 대하여 우리나라 사학자들의 학설이 매우 구구하므로 창해군의 설치경위와 남여에 대하여 살펴본다.
 

흉노의 공격으로 B.C 166년에 요동군이 궤멸된 후 흉노의 공격이 계속되자 한(漢) 무제(武帝) 원광(元光) 원년(B.C 134년)에 엄안이 이민족에 대한 대책을 상주(上奏)하였다.
 

「지금 남이(남쪽 방면 이민족)를 불러내고, 야량(서남쪽 방면 이민족)을 조공시키고, 강북(서남 방면 이민족)을 항복시킨 다음 예주(위만조선)를 공략하여 성읍을 쌓은 뒤 흉노에 깊숙히 침입하여 용성을 불지르자. 今欲招南夷朝夜郞降羌북略濊州建城邑深入匈奴燔其용城」
 

한나라는 예주(濊州)를 공략하기 위하여 위만조선 배후 나라들과 통교하여 위만조선을 고립시키려 하였으나 이를 눈치챈 우거왕(右渠王)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고립시키는데 실패하자 방법을 바꾸어 흉노와 위만조선을 각 다른 방법으로 공격하였다. 즉 흉노에 대하여는 B.C 128년부터 대규모 토벌군을 연달아 보내어 인명 소모전으로 한나라에 비하여 인구가 적은 흉노를 토벌하였고, 위만조선에 대하여는 고구려(高九黎)의 남쪽 담당 제후 남녀(南閭:원래 글자는 南黎)를 재물로 꾀어 한나라에 복속시키고 위만조선의 동쪽에 있는 요동반도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여 위만조선을 동쪽과 서쪽에서 포위하였다.
 

한서(漢書)에는 예군 남여 등이 원삭원년(B.C 128년)에 우거왕에게 반기를 들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고 적혀 있다.
 

「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數年乃罷」後漢書

「元朔元年東夷예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爲蒼海郡」前漢書


위 후한서 문구에는 예군 남여가 우거왕을 배반하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당시 남여는 고구려(高九黎)의 남쪽 담당 제후였으므로, 예군 남여는 우거왕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배반한 것이다.
 

4세 단제 고우루(高于婁 일명 解于婁)


「신유 원년(B.C 120년)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고진(高辰)을 발탁하여 서압록(西鴨綠)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高九黎侯)로 삼았다.」
 

B.C 120년은 한나라가 요동반도에 설치한 창해군(蒼海郡)을 폐지한 후이다. 이 시기 위만조선이 요동반도를 다시 점거하고 있는 것은 위만조선이 B.C 126년경에 한나라로부터 창해군(요동반도) 지역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계해년(B.C 118년) 우거(右渠)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계해년조 문구는 위만조선 군대가 해성(海城) 방면에서 북쪽으로 쳐 올라와 해성 이북 50리까지 점령하였다는 내용이다.
 

「갑자년(B.C 117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어 우거의 성을 공격하였으나 3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년(B.C 115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薩水:청천강)에 이르니 구려하(九黎河:고대에는 요하 또는 혼하를 구려라 불렀는데, 요하가 하류에서 혼하와 만나 지금의 영구 방면으로 흐른 물줄기) 동쪽이 모두 항복해 왔다.」
 

위 문구는 고구려가 위만조선으로부터 요하하류 동쪽을 모두 빼앗았다는 내용이다. 이때부터 위만조선의 동변은 멸망할 때까지 요하하류(지금의 요하하류가 아니고 고대에 요하가 혼하와 만나 지금의 영구 방면으로 흐른 물줄기)였다.
 

「정묘년(B.C 114년) 목책을 좌원(坐原)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南閭)에 두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위 문구는 고구려가 위만조선으로부터 요하하류 동쪽 즉 요동반도 지역을 모두 빼앗은 후 점령지에 군대와 남녀(南閭:南黎 고구려의 남쪽담당 제후)를 두었다는 내용이다.

위 남여(南閭)의 원래 글자는 고구려의 남쪽담당 제후를 가리키는 남여(南黎)이다. 고구려의 방위체제는 중앙은 왕이, 동서남북은 4가(四加)가 각 1곳씩 맡아서 담당하였는데, 고구려는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반도 지역을 빼앗기 전까지는 남여를 요동반도 북쪽 어느 지점에 두었는데,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반도지역을 빼앗은 후부터 남여를 요동반도에 두고 그 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계유년(B.C 108년)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평나(平那)를 노략질하더니 병력을 나누어 사방으로 침략하였다.」
 

계유년조 문구는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후 군대를 나누어 요하 동쪽 고구려 지역을 사방으로 침략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때 고구려는 요하 동쪽 지역 중 많은 부분을 한나라에 점령당하였고, 한나라는 다음해 B.C 107년에 그 곳에 현도군과 나라군(樂浪郡)을 설치하였다.
 

B.C 108년부터 한나라 군대와 싸우던 동명이 B.C 87-86년경에 한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세력이 강해지자 B.C 86년에 해모수계 무리를 수도 백악산아사달(장춘)에서 그 동쪽에 위치한 차릉(차陵: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수도에 입성하였다.
 

「갑오년(B.C 86년) 동명이 해우루(解于婁)에게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 가시요"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 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 하였다. 동생인 해부루(解夫婁)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므로 군신이 매우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國相) 아란불이 "통하(通河)의 물가 가섭(迦葉)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 만한 곳입니다" 하고 왕에게 권하여 마침내 도성을 그 곳으로 옮겼다.」
 

환단고기에는 이때 동명계 무리에게 밀리어 길림 방면으로 이동한 해모수계 무리들이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또는 동부여(東夫餘)로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해모수계 무리는 동명계 무리에게 복속하면서 우두머리를 단제(檀帝)라 칭하지 못하고 왕의 명칭에 천제(天帝)를 상징하는 글자를 넣지 못하였다.
 

 

3). 동명계 고구려의 역사 (주: 북부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
 

5세 단제 고두막(高豆莫). 일명 동명(東明)


B.C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요하 동쪽 고구려 일부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동명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한나라 군대와 싸웠다.
 

「계유년(B.C 108년) 이 해는 고우루단제(高于婁檀帝) 13년이다. 제(帝)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골본(忽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高列加)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년(B.C 106년)에 제(帝)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들었다.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니 한나라 도적들은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고대에는 혼하 또는 요하 옆에 구려 또는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고 요하 또는 혼하를 구려하라 불렀다.)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고離國)의 땅이었다.」
 

동명(東明)의 원래 이름은 고두막이고, 동명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부른 칭호이다. 그리고 고리국(고離國)은 고리국(高離國)을 발음대로 다른 한자로 적은 것으로, 고리(古離=高黎)는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이다. 즉 부여와 같은 뜻이다.
 

위 문구에는 동명이 구려하(九黎河)를 건너 요동(遼東)의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는 서안평이 서요하(西遼河) 부근에 있는 임황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위에 나온 구려하는 서요하를 가리키고, 요동은 난하 동쪽 지역을 가리킨다.
 

위 서안평은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과는 별개의 지점이다.
 

「단군 고우루(高于婁) 34년 갑오년(B.C 87년) 제(帝)는 장수를 보내어 배천(裵泉:요원시 부근)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 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하였다.」
 

위 문구는 동명(東明)이 지금의 요원시(遼原市) 부근에 있는 배천에서 현도군 군대를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한나라 군대를 계속 연파하고 한나라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다는 내용이다.
 

이 전쟁 후 현도군 서개마현(요원시 방면)과 상은대현(개원)이 궤멸되고 임둔군(북진 의무려산)과 진번군(난하에서 요하 사이)이 폐지된 것을 보면, 서개마현과 상은대현에 주둔한 현도군 군대 및 북진 부근에 주둔한 임둔군 군대는 동명의 공격 때 궤멸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해 B.C 86년에 동명은 요하상류로 침투해 온 현도군 군대를 여러 차례 물리쳤다.

「을미년(B.C 86년) 가을 8월 서압록하(西鴨綠河)의 상류에서 한구(漢寇:현도군 군대)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현도군은 이 전투에서 동명에게 패배함으로써 구려(句麗) 북쪽을 모두 상실하였다. 반면에 동명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 무리들의 신망을 얻어 패자(覇者)가 되어 해모수계 무리를 백악산아사달(장춘)의 동쪽에 위치한 차릉(차陵: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수도에 입성하였다.
 

「을미년(B.C 86년) 북부여(北夫餘)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解夫婁)를 낮추어 제후(諸侯)로 삼아 차릉(차陵)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都城)에 들어와 북부여(北夫餘)라 칭하였다.」
 

6세 단제 고무서(高無胥)


B.C 59년에 고무서단제는 요하 동쪽을 수복하고 수도를 백악산아사달(장춘)에서 골본(忽本:심양)으로 옮겼다.

「임술년(B.C 59년) 제(帝)는 골본천(忽本川:수도 심양 옆에 있는 혼하 지칭)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과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帝)는 태어나면서 신(神)과 같은 덕이 있어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사람들이 제(帝)를 소해모수(小解慕漱)라고 불렀다. 이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동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나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위 문구는 고무서단제(高無胥檀帝)가 수도를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서 골본(忽本)으로 옮기고 백악산아사달의 장로들을 초대하여 회유하였다는 내용이다.
 

「계해년(B.C 58년) 고무서단제는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 해 나이가 23세였다. 이때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니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덕으로 사귄 친구인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俠父) 등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다.」
 

위 문구는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하여 고구려의 수도인 골본(忽本)으로 와서 고무서단제의 사위가 된 후, 고무서단제가 죽을 때 유언에 의하여 고구려의 대통을 이었으나, 부여인들이 죽이려 하므로 다시 비류수상류로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이때 고주몽을 따라간 오이, 마리의 이(伊.離)는 무리를 뜻하는 여(黎)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글자이고, 마(摩)는 마(馬)를 뒤에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다.
 

왕검조선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비왕(裨王) 2명을 번한(飜汗.番汗), 마한(馬汗)이라 불렀는데, 고구려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하는 최고위 관리를 오이, 마리라 불렀다. 따라서 고주몽이 오이, 마리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고구려의 고위관리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뜻이다.

이후 고구려는 비류수상류로 이동한 고주몽 무리, 골본에 잔류하여 현도군에 복속한 무리, 장춘 방면으로 북상한 북옥저 무리, 길림 방면의 동부여 등으로 갈라져 서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주장하며 싸웠다.


 

4). 장춘 방면으로 이동한 동명계 무리의 역사 (주: 졸본부여 즉 초기 고구려로 보임)


B.C 58년에 고구려(高九黎)가 분열되었을 때, 골본(忽本:심양)이 현도군에게 점령당하자 당시 고구려의 수도이던 골본(忽本)에 남아 있던 동명계 무리 중 일부는 장춘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그 후 이 무리들은 B.C 28년에 고주몽고구려에 정복되었다.
 

「동명성왕(東明聖王) 10년(B.C 28년) 겨을 11월 왕은 부위염(扶尉厭)에게 명하여 북옥저(北沃沮:장춘 방면)를 쳐 없애고 그 땅으로 성읍(城邑)을 만들었다.」
 

고주몽고구려가 북옥저를 점령하자 북옥저(장춘 방면)에 있던 무리들은 장춘 북쪽으로 북상했다가 그 뒤 고주몽고구려가 북옥저에서 국내위나암성(요원시 방면)으로 남하한 유리왕 22년(A.D 3년)경에 다시 장춘으로 남하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때 장춘으로 남하한 무리들이 황룡국(黃龍國)으로 적혀 있다.
 

「유리왕 27년(A.D 8년) 왕태자 해명(解明)이 고도(古都)에 있어 힘이 세고 용맹을 좋아하는지라 황룡국왕이 그 소문을 듣고..후략」

A.D 4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는 한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이는 한나라가 고주몽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하여 고주몽고구려의 북방에 위치한 부여와 통교(通交)하였기 때문이다.

A.D 120년에 부여왕(夫餘王)이 아들 위구태(尉九台)를 후한(後漢)에 보내어 한.부여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 따라 부여는 고주몽고구려가 한군현을 공격하였을 때 부여왕자 위구태와 군대 2만 명을 보내어 한(漢)나라를 도왔다.
 

A.D 136년에 부여왕이 후한(後漢)을 방문하였다.

A.D 167년에 부여는 2만 군대로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A.D 174년에 한.부여 관계 다시 회복되었으나 부여는 현도군을 통하지 않고 요동군을 통하여 한나라와 교류하였다.
 

A.D 205년에 부여왕 위구태(尉九台)가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 일부를 이끌고 공손강(公孫康)이 설치한 황해도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운 후 온조백제(溫祚百濟)와 마한연맹(馬韓聯盟)을 정복하였다.

A.D 205년에 부여왕 위구태(尉九台)가 한반도로 이동한 후 부여 지역에는 부여왕의 보조자이던 간위거(簡位居)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시기 구태백제(九台百濟), 장춘 방면의 부여(夫餘), 요동의 공손씨(公孫氏)는 동맹세력이었다.
 

A.D 238년에 위(魏)나라와 고주몽고구려가 연합하여 사마의(司馬懿)는 공손씨(公孫氏)를, 고주몽고구려는 부여(夫餘)를 각 공격하였다. 이때 구태백제는 공손씨와 부여를 돕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出兵)하였다가 50일 후에 돌아와서 부여를 구태백제의 분국(分國)으로 만들고 간위거(簡位居)를 후왕(侯王)에 임명하였다. 그 뒤 간위거(簡位居)가 죽은 후 적자가 없어 서자 마여(麻餘)가 즉위하였다. 이때 우가(牛加)가 반역을 하여 마여가 죽으니 마여의 아들이 6살 나이로 부여왕이 되었다.
 

마여의 아들이 왕이 된지 41년만에 선비(鮮卑) 모용외(慕容외)가 부여의 서울 아사달(阿斯達)을 침입하니, 부여왕(扶慮王)은 칼을 빼어 자살하고 태자 부라(扶羅)가 왕위를 넘겨받았다.
 

환단고기 대진국본기(大辰國本紀)에 의하면 모용외가 다시 침략하자 부라(扶羅)는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
 

「부여왕(扶慮王)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北沃沮)를 보전하고, 이듬해 아들 부라(扶羅)가 즉위하니 이때부터 모용외(慕容외)가 또다시 국인(國人)을 침략하였다. 이에 부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倭人)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

위 문구에는 부라(扶羅)가 왜을 평정해서 왕이 되었다고 적혀 있으나 부라가 일본열도로 이동한 태강(太康) 6년(A.D 285년)경은 일본열도가 100여 개의 소국으로 갈라져 있을 때이다. 따라서 앞에 나온 문구는 부라가 일본열도로 이동하여 구태백제계가 아닌 어느 소국을 점령하여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5). 길림 방면으로 이동한 해모수계 무리의 역사 (주: 동부여로 보임)
 

1세 왕 해부루(解夫婁)


해모수계인 고구려 4세 해우루단제(解于婁檀帝)가 수도 백악산아사달을 내어놓으라는 동명(東明)의 위협에 못이겨 병을 얻어 죽자 해우루단제의 동생 해부루(解夫婁)는 해모수계 무리를 이끌고 장춘 동쪽에 위치한 길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사서에는 이 나라가 동부여(東夫餘) 또는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로 적혀 있다.

환단고기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紀)에 적혀 있는 동부여의 역사를 살펴본다.
 

「을미년(B.C 86년) 해부루 왕은 북부여(北夫餘)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迦葉原) 혹은 차릉(차陵)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 살았다. 오곡이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년(B.C 84년)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 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가 풍부해 지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년(B.C 79년) 앞서 하백녀 유화 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皇孫) 고모수(高慕漱)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弗離支)이며 혹은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 해 5월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을 고주몽(高朱蒙)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서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년(B.C 77년) 해부루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 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는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두꺼비 모양이었다.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그가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위 문구에는 해부루의 아들이 금와(金蛙)로 적혀 있다. 고구려의 신앙에 두꺼비는 비왕(裨王)을 뜻하는데, 이 시기 동부여는 장춘 방면의 동명계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다. 위 금와(金蛙)는 마한(馬韓)을 높여서 금마(金馬)라 부른 것처럼 동부여왕을 높여서 부른 명칭이다.
 

「임술년(B.C 59년)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렀다. 이듬해 고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고주몽)고구려의 시조이다.」
 

고주몽은 동부여에서 살던 중 나라 사람들이 죽이려 하자 동부여의 수도 길림에서 동남쪽으로 도망갔다가, 그 뒤 고구려의 수도 골본(忽本)으로 가서 고구려 6세 고무서단제의 사위가 되었고, 다음해 고무서단제가 죽었을 때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의 대통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에 있던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혼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는데, 위 문구에는 중간과정이 일부 생략되어 있다.
 

2세 왕 금와(金蛙)


「갑술년(B.C 47년) 왕이 사신을 보내 (고주몽)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정유년(B.C 24년) 유화부인이 돌아가셨다. (고주몽)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卒本)으로 모셔와 장사 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는 곁에 묘사(廟社)를 짓게 하였다.」

「갑인년(B.C 7년) 금와가 죽고 대소(帶素)가 즉위하였다.」
 

3세 왕 대소(帶素)


「을묘년(B.C 6년) 정월 왕은 사신을 (고주몽)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청하고 왕자를 인질로 삼고자 하였다. (고주몽)고구려의 열제(列帝)가 태자 도절(都切)로서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卒本城)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계유년(A.D 13년) 대소왕(帶素王)이 (고주몽)고구려를 침략하였다가 학반령(鶴盤嶺) 밑에서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년(A.D 22년) 2월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부여국으로 출전하였는데, 부여왕이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대장군 괴유(怪由)가 바로 앞에 있다가 부여왕을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 군대는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왕은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났다. 여름 4월 동부여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부에 이르러 해두왕(海頭王)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고 그 길로 갈사수(曷思水)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국(曷思國)이라 한다. 갈사국은 대저 3세 47년만인 고구려 태조대왕 16년(A.D 68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고구려는 도두(都頭)를 우태(于台)라고 부르도록 하고 동부여후(東夫餘侯)에 봉하여 혼춘을 식읍으로 주었다. 7월 동부여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다. 갈사(曷思)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椽那部)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띠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絡氏)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 옮겨가 백랑곡(白狼谷)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 명치 갑술년(A.D 494년)에 이르러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위 문구에 의하면 동부여는 고주몽고구려에 패한 후 1 무리는 두만강 북쪽 혼춘으로 이동하여 갈사국을 세웠다가 3세만에 고주몽고구려에 항복하였고, 길림에 남아 있던 무리들도 고주몽고구려에 항복하였다가 뒤에 차츰 자립하여 서쪽으로 개원 서북을 거쳐 백랑곡(대릉하 방면)까지 이동했다가 다시 고주몽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자치통감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처음에 부여는 녹산에 거처 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져서 연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初夫餘居于鹿山爲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資治通鑑卷 97 晋紀 19 穆帝 永和二年(A.D 346년) 正月條
 

위 녹산(鹿山)은 부여 지역이라는 뜻인 여산(麗山)이 뒤에 글자가 바뀐 것으로 전에 고구려(高九黎)의 수도로 사용된 장춘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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