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20153

호랑이와 우물과 황사
<서울경기 역사기행 16> 호암산성(虎巖山城) 여행
06.03.30 09:10 l 최종 업데이트 06.03.30 09:11 l 노시경(prolsk)

시간은 오후가 되어 서울 시내 도로에는 벌써 차들이 밀리고 있었고, 버스가 호암산 아래 호압사(虎壓寺)까지 가는 데에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망설였다. 버스 정류장 앞에 나의 갈등을 멈추게 해 주려는 듯 버스 한 대가 와서 멈춰 섰다. 관악산의 한 줄기인 호암산을 오르고자 집 앞에서 시내버스에 올랐다.

이제 봄. 밀폐된 버스 안에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나 포근하다. 버스 안에는 하교길의 학생들이 탔다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점점 승객들이 줄어든다. 버스가 사당동을 지나 신림동 서울대학교 가는 고개를 넘어 산복터널을 지나자 호압사 앞이다.

▲ 호암산 ⓒ 노시경


호압사 앞에서 안내도를 보는데, 내 눈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호암산성'이다. 호암산성이라면 신라가 당나라와의 나당전쟁시 사용했다던 산성이다. '아! 호암산성이 여기에 있었구나.' 나의 마음은 호압사를 떠나 호암산성 쪽으로 가고 있었다.

호압사를 보고 호암산 정상의 호랑이 귀바위에 오르니, 서울 남부와 시흥, 광명 일대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눈을 서쪽으로 돌리자 호암산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이어지고, 호암산성 안에 자리잡은 불영사와 한우물이 보인다. 저 한우물을 둘러싸고 호암산성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호암산성이 자리한 입지와 호암산의 지형을 곰곰이 둘러보면 어디서부터 호암산성 성벽이 이어질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호암산 호랑이 머리 부분에서 내려온 능선이 호암산성이 자리한 봉우리에서 높이 솟아오르는데, 그 봉우리 내부는 일정부분 평평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봉우리가 올라서는 근처의 등산로에서 허물어져 내린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성돌의 기초는 안정감을 위해 위의 성돌보다 더 큰돌을 사용하였다. 이 등산로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돌무더기는 바로 호암산성을 쌓던 석재들이다. 이 석재들은 자세히 보면 크기가 일정하고 사람들이 다듬은 흔적이 보인다.


▲ 호암산성 ⓒ 노시경

나는 성벽이라고 생각되는 높은 언덕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걸어갔고, 그 곳의 흙 속에서 옥수수 알 같이 잘 다듬어진 채로 보전된 신라인들의 성벽을 만날 수 있었다. 호암산성의 총길이는 1,250m였으나, 대부분 허물어지고, 외진 곳에 자리한 이 성벽 300m가 호암산성 성벽의 자취를 보여준다. 1300년 동안 방치되었으나 아직까지 살아남은 통일신라시대의 편린들이다.

나는 삼국사기의 천년 전 글자 속으로 들어가 본다. 호암산성의 축성시기는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文武王) 11년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무왕 11년 정월(正月)조에 의하면, '당병(唐兵)이 백제를 내구(來救)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옹포(甕浦)를 지키게 했다.'

문무왕 11년 칠월 조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문무왕에게 전한 편지에, '왕은 기심(機心,邪心)이 움직이어 변성(邊城)에다 무력을 기울인다.'

이 호암산성은 당나라 병사들이 백제 땅을 다시 침입하려고 하자 세워진 산성이다. 신라가 당나라와 한반도 운명을 걸고 싸운 나당전쟁의 현장인 것이다. 당시 당나라 육군은 무너진 고구려 땅과 한강을 지나 수원 방면으로 남하하려 하였고, 당나라 해군은 현재 화성군 앞의 남양만으로 침입하려 하였다. 통일신라는 이 호암산성에서 당나라 군대의 이동로를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변방의 성, 변성(邊城) 중의 하나였다.

산성은 325m 능선을 따라 남서방향으로 길쭉하게 이어지다가 한순간 아스라한 절벽을 만난다. 이 절벽은 당시 천연 성벽이었을 것이다. 이 절벽을 지나면 성벽의 자취는 희미해지고, 산 능선 곳곳에 석재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다. 이 산성은 호암산 지형을 이용하여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을 마름모꼴로 둘러싸듯이 세워져 있으니, 전형적인 퇴뫼식 산성이다.

▲ 호암산성 한우물 ⓒ 노시경

성벽에서 내려오면 성에 식수를 공급하던 한우물이 바로 내려다보인다. 네 모서리를 화강암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석축 우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얼핏 연못으로 보이는 이 한우물은 보통 연못의 혼탁한 물 색깔과는 다르게 물색깔이 투명한 초록색이다. 석재의 바닥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산 정상에 우물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고, 그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점도 신기하다. 호암산성도 결국은 이 우물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산성이다.

이 산성의 1990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커다란 우물 2개와 건물지 4개가 확인되었다. 이 한우물과 제2우물지에서는 무려 12개 기종의 1313개나 되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와 등잔이 출토되었다. 이 정도 수의 유물이면, 호암산성은 경주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을 뱉어낸 곳 중의 하나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한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이다. 조선시대의 한우물은 용의 조화로 불의 기운을 막고 궁궐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염원에서 만들어졌고, 날이 가물 때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당시 선조들은 한우물 속에 구리로 만든 용을 던지면, 이 용이 한우물의 신비한 물과 조화되어 관악산의 불기운을 차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에 대항한 선거이(宣居怡) 장군이 이 호암산성에서 진을 치고, 한우물의 물을 군사들에게 먹였다. 이 호암산성의 군사들은 행주대첩을 지원하던 군사들이었다. 그래서 지표 아래 30cm까지는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이 한우물은 통일신라시대 때 축조된 후 버려졌다가 조선 초기에 서쪽으로 약간 어긋나게 이동하여 축조된 것이다. 조선시대 유물층에서 굵은 모래층을 지나 훼손되지 않은 뻘층을 만나면 7∼8세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출토된다. 모두 13단으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한우물은 동서 17.8m, 남북 13.6m, 깊이 2.5m이다. 석축의 위는 들여쌓고 아래는 안으로 내어 쌓았는데, 이러한 안정적인 석축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한우물에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약 300m를 내려가자 또 다른 우물을 쌓은 석벽이 수풀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제2우물지이다. 이 우물도 깊이 2m, 남북 18.5m, 동서 10m로 대형 석축 우물이다. 한우물이 잘 정돈되어 보기는 좋지만, 이 제 2우물은 잡초 속에 통일신라의 고색창연한 석벽이 퇴락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우물 앞에는 관악산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등산객도 보이지 않으니 한적하기만 하다.

이 곳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이 새겨진 8세기 중엽의 청동숟가락이 나왔다. 천3백년 전 선조들의 입 속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을 숟가락이다. 이 숟가락은 우리나라 청동 숟가락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고구려 시대 이후 통일신라시대까지 이 지역의 이름이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는데, 이 숟가락 명문이 바로 이 우물터의 연대를 말해준다. 이 우물터의 일부분만 시굴해서 이렇듯 귀중한 유물이 나왔는데, 왜 더 이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제 2우물지 바로 옆 평지에는 기와건물의 나무기둥을 받치던 주초석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 이 곳에는 규모가 다른 3기 이상의 건물이 포개진 건물터가 자리하고 있다.

기둥을 받치던 석재와 함께 발견된 것은 건물이 무너지면서 깨지고 남은 기와조각들이다. 이 건물터에서는 가로 세로로 줄을 그은 문양인 선조문(線條文), 물고기 뼈 문양인 어골문(魚骨文), 문살 문양인 격자문(格子文) 등 6556 개의 부서진 기와 조각이 발굴되었다. 이 부서진 기와 중에 '잉대내(仍伐內)'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굴되어 이 건물터도 통일신라 시기에 세워진 건물로 밝혀졌다. 발굴 유물 중에서 가장 흔하다는 기와조각이지만 천3백년 역사를 지나 우리 앞에 모습을 보이는 유물들이 정겨울 뿐이다.

호암산성을 나와 시흥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소나무 군락 위에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황사 때문에 멀리 금천의 모습이 뿌옇게 보이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 중국 당나라 대군을 공격하기 위해 세워진 호암산성을 내려오다가 중국에서 기습한 황사를 만났다. 나는 버스를 타고 산을 내려와 신림동에서 전철을 타고 땅속의 먼지를 맡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6년 3월말의 여행 기록입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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