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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원문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를 좀 짧게 분리 편집하였습니다.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
   1.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  http://tadream.tistory.com/74
   2.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고구려의 통치기구  http://tadream.tistory.com/75

   3.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고구려의 역사 (해모수계,동명계,졸본,동부여)  http://tadream.tistory.com/73
   4.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고구려의 경제  http://tadream.tistory.com/76


한단고기를 바탕으로 본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의 역사

1. 개설


고구려(高九黎)는 B.C 239년에 해모수(解慕漱)에 의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흔히 삼국사기(三國史記)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주몽(高朱蒙)이 세운 고주몽고구려(高朱蒙高句麗)만 고구려로 알고 있으나, 고주몽고구려는 고구려가 분열되었을 때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의 1무리이다.
 

이 고구려(高九黎)라는 명칭은 구려(九黎) 앞에 천제(天帝)를 뜻하는 고(高)자를 붙인 것으로, 구려처럼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이다.
 

고구려의 건국경위를 살펴보면, 해모수(解慕漱)는 임술년(B.C 239년)에 웅심산(熊心山)에서 내려와 웅심산 난변(蘭邊)에 궁실을 쌓고 고구려(高九黎)를 건국하였고, 다음해 계해년(B.C 238년)에 왕검조선의 수도 장당경(藏唐京:개원)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기자조선왕 기비(箕丕)와 몰래 약속한 후 해모수는 장당경(藏唐京)의 북쪽에 있는 백악산아사달(장춘)을 점령하여 천왕랑이라 칭하며 왕검조선의 수도를 북쪽에서 고립시켰고, 기자조선왕 기비(箕丕)는 장당경의 남쪽에 있는 요동반도 방면에서 왕검조선의 수도를 남쪽에서 고립시켰다.

「고열가단제 계해년(B.C 238년) 전략..여러 장수들이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이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종실(宗室)의 해모수(解慕漱)가 천제(天帝)의 아들을 자칭하며 몰래 수유(須臾)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고,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를 권하여 번조선왕(番朝鮮王)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하니 북부여(北夫餘)의 일어남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북부여를 해모수의 고향 이름을 따서 고구려(高九黎)라 불렀다.」桓檀古記檀君世紀

해모수와 기비가 왕검조선의 수도를 남쪽과 북쪽 방면에서 고립시키자 왕검조선의 고열가단제는 더 견딜 수 없어 5가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5가가 함께 다스리기를 6년 동안이나 하였으나, 해모수는 기사년(B.C 232년)에 5가 회유에 성공하여 전에 왕검조선의 진한(辰汗)이 관할하던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이때 해모수가 전에 진한(辰汗)이 관할하던 지역만 장악한 것은, 이 무렵 전에 번한(番汗)이 관할하던 지역에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있었고, 전에 마한(馬汗)이 관할하던 지역에는 마한(馬韓)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년(B.C 232년)에 해모수가 5가 회유에 성공하여 전에 진한이 관할하던 지역을 모두 장악하자 이에 만백성들이 해모수를 단군으로 추대하였다.
 

중국의 사가들은 이 해를 고구려의 건국시기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기에 나오는 당나라 시어사 가언충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나라는 고구려 건국시기를 B.C 232년으로 보고 있다. 이는 이 해에 해모수가 만백성의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략..당의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요동으로부터 돌아와 전황을 묻는 당제(唐帝)의 물음에..중략.."고구려의 비기(秘記)에 '900년이 채 못되어 80살 먹은 대장에게 멸망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고씨(高氏)가 한(漢)의 시대로부터 나라를 지녀 지금 9백년이 되었고 이적 장군의 나이가 마침 80세 입니다."..후략」三國史記高句麗本紀 寶臧王紀 27年條
 
 

2. 고구려의 역사


해모수는 B.C 239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여 B.C 238년에 왕검조선을 멸망시키고, B.C 232년에 옛 왕검조선의 잔류세력인 오가(五加) 회유에 성공하여 옛 왕검조선의 진한(辰汗) 지역을 장악한 후 만백성의 추대를 받아 단제(檀帝)가 되었다. 이때부터 해모수계(解慕漱系)가 4대 동안 고구려를 통치하였다.(전기고구려)
 

그 후 B.C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과 요하(遼河) 동쪽 고구려(高九黎) 지역을 점령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였을 때, 동명(東明)이 일어나 한나라 군사와 싸우는 과정에서 세력을 얻어 B.C 86년에 해모수계 무리를 백악산아사달(장춘)의 동쪽에 위치한 가섭원(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이때부터 동명계(東明系)가 2대 동안 고구려를 통치하였다.(후기고구려)
 

그 후 6세 고무서단제(高無胥檀帝) 때 수도를 골본(忽本:심양)으로 옮긴 후, B.C 58년에 고무서단제가 죽었을 때, 고주몽(高朱蒙)이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高九黎)의 대통(大統)을 이어받았으나 고구려를 장악하지 못하여 무리 일부를 이끌고 비류수상류(혼하상류)로 이동하여 고주몽 고구려를 세웠다.
 

동명계 무리가 분열되자 현도군이 다시 고구려의 수도 골본(忽本:심양)을 점령하였고, 골본에 남아 있던 무리들 중 일부는 한나라에 복속하였고, 일부는 장춘 방면으로 이동하여 북옥저(北沃沮)라 불리었다.
 

이때 길림 방면에 있던 해모수계(解慕漱系) 무리의 우두머리 대소(帶素)는 대왕(大王)을 칭하며 동명계 무리에 복속하지 아니하고 독립세력으로 변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혼하상류로 이동한 고주몽(高朱蒙) 무리들이 고구려(高句麗)로, 길림 방면의 해모수계(解慕漱系) 무리와 장춘 방면의 동명계(東明系) 무리들이 부여(夫餘)로 각 적혀 있다.



3. 고구려의 천신숭배사상


고구려 때도 왕검조선 때와 마찬가지로 해와 달을 숭배하였으며 시조 단제(檀帝)를 해모수라 불렀고, 단제의 성은 해(太陽)를 뜻하는 "解"자나 "高"자를 사용하였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해님의 아들 상징으로 용(龍) 또는 3발 달린 까마귀를 사용하였다.
 

「전략..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龍光)의 칼을 차시며 오룡(五龍)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셨다.」
 

환단고기 가섭원부여기에는 고구려에 복속하는 동부여왕이 금와(金蛙)로 적혀 있다. 이를 보면 고구려는 해님의 아들 즉 천자(天子)의 상징으로 용(龍.辰)을 사용하였고, 달님의 아들 즉 비왕(裨王)의 상징으로 두꺼비(蛙)를 사용하였다.

 

4. 고구려의 건국 전설


위략(魏略)에 적혀 있는 부여의 건국전설은 아래와 같다.

「옛날 북이(北夷)의 탁리국왕(탁離國王)의 시비(侍裨)가 임신하였으므로 왕이 죽이려고 하니 시비가 변명하여 말하기를 크기가 닭 알 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나에게 내려왔기 때문에 임신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시비가 후에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것을 돼지우리에 버렸더니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서 덥게 해주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또 그것을 마구간에 넣었더니 말이 역시 입김으로 불어 주어서 죽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왕은 그것을 하늘의 아들인 줄 알고 그 어머니에게 명령하여 기르게 하였다. 그의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고 소,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므로 왕은 그가 왕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여 버리려 하였다. 동명이 이 기미를 알고 남쪽으로 달아나 엄호수(일명 개사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떠서 다리를 놓았으므로 동명이 건너갈 수 있었다. 동명이 건너간 후 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져서 추격하여 오던 군사들이 건너가지 못하였다. 동명이 이에 수도를 건설하고 부여왕이 되었으므로 북이(北夷)가 부여국을 가지게 되었다.」
 

위에서 부여가 탁리국(탁離國)으로 적혀 있는데, 어떤 사서에는 색리국(索離國) 또는 고리국(藁離國)으로 적혀 있다. 이 고(藁)자는 고(高)자가 다른 음의 한자로 변한 것이고, 탁(탁)자는 고(藁)자를 오기(誤記)한 것이며, 색(索)자 또한 같다. 그리고 이(離)자는 여(黎)자 대신에 사용된 글자이다.
 

환단고기 북부여기를 보면 해모수는 웅심산(熊心山)에서 나라를 세웠으나 고주몽처럼 쫓기지 않았다. 따라서 위략(魏略)에 적혀 있는 부여의 전설은 고구려의 건국전설이 아니고 고주몽고구려의 건국전설이다.


5. 고구려의 영역


B.C 239년에 웅심산을 근거지로 하여 건국된 고구려는 B.C 232년에 옛 왕검조선의 진한(辰汗) 지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의 영역은 북쪽으로는 약수(弱水:흑룡강)까지이고, 동쪽으로는 읍루(邑婁)가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으므로 연해주(沿海州) 동쪽 해안까지이며, 서쪽으로는 서요하(西遼河)까지이고, 남쪽으로는 처음에는 요동반도(遼東半島)가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지 않았으나, 뒤에는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다.
 

고구려의 영역 중 서쪽, 북쪽, 동쪽 방면은 영역변동이 별로 없었으나, 남쪽 방면은 영역변동이 수차 있었다.

원래 고구려는 건국 후 옛 왕검조선의 진한(辰汗) 지역만 장악하였으므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세워진 만주남부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아니었으나, B.C 128년에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반도를 빼앗아 그 곳에 군대와 남쪽 담당 제후 남여(南黎)를 둔 후부터 요동반도도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남여가 한나라의 재물에 꼬여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복속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상실하였고, B.C 115년에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반도를 다시 빼앗았으나, B.C 107년에 한나라에 다시 빼앗겼고, B.C 59년에 한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다시 빼앗았으나, B.C 58년에 대통(大統) 문제로 고구려가 분열되었을 때 한나라에 다시 빼앗겼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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