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50064.html


중국인은 왜 홍산문화에 열광하는가

등록 :2020-06-19 05:59 수정 :2020-06-19 09:32


[책&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24) 홍산문화와 현대국가


5천년 전 찬란한 옥기문화와 연결시킨 중화제일주의의 자부심

홍산문화가 한국만의 것이라는 주장도 중국 논리와 다를 바 없어


홍산유적. ‘홍산’은 붉은 바위산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인욱 제공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만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홍산(훙산)문화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중국인들은 홍산문화를 다원일체의 중화문명이 북방 만주지역으로 확장된 대표적인 증거라며 1990년대 이래 널리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몽골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의 제국주의 고고학자들이 홍산유적을 조사했다. 우리에겐 선사시대를 둘러싼 역사분쟁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홍산문화는 어떤 국가의 성립보다 앞서 옥과 제사로 문명을 연 세계사적 의의가 있다. 현대국가의 틀로 촉발된 의미없는 역사갈등을 잠시 놓아두고 홍산문화의 세계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 제국주의와 홍산문화


홍산문화는 약 5500년 전에 내몽골 츠펑시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신석기시대의 문화다. 붉은 산(紅山)이란 이름은 츠펑시의 동쪽을 아우르는 거대한 붉은색의 산맥에서 유래했다. 허허벌판의 평원 가운데에 불쑥 솟아 있는 산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다. 그러니 이 붉은 산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이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 홍산에서 선사시대의 유적을 본격적으로 조사한 사람은 중국의 대표적 계몽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의 아들 량쓰융(梁思永)이었다. 그는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고고학 전공으로 유학을 하고 중국에 돌아온 직후인 1930년에 홍산과 그 일대 지역의 선사시대를 조사했다.


당시 만주에서 창궐하던 페스트를 무릅쓰고 진행했던 량쓰융의 연구는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중단되었다. 1932년에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자신의 식민지를 몽골과 시베리아로 확대하기 위하여 츠펑시 일대에 ‘열하성’(熱河省)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곳의 유적을 일본 제국주의의 어용 고고학자들의 모임인 ‘동아고고학회’가 조사하도록 했다. 청나라 말기 의화단의 난에 일본이 개입하여 받은 배상금으로 운영되던 이 동아고고학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발흥에 발맞추어 만주와 몽골 일대를 조사해왔다. 하지만 정작 일본의 학자들은 홍산유적을 조사할 때 수천년간 쌓인 층위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고 뒤죽박죽 파헤쳐서 유물을 모은 정도여서 홍산문화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국공내전이 끝난 직후 중국의 연구팀은 1950년대에 다시 이 일대의 유적을 조사했다. 이들은 일본의 잘못된 발굴을 밝히고 이 지역에 발달된 신석기시대가 있었음을 증명하면서 ‘홍산문화’라고 명명했다. 이렇듯 홍산문화는 중국인들에게는 일본 제국주의에 유린되었던 역사를 딛고 일어나는 상징적인 자부심이기도 했다.


량다이춘에서 발견된 홍산문화의 옥룡. 2천년의 시간을 건너 중국의 귀족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강인욱 제공


중국의 역사만들기와 홍산문화


홍산문화가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1980년대는 문화혁명 직후 시작된 중국의 역사만들기가 진행되던 때다. 홍산유적을 중국 최고의 유적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는 베이징대학 교수인 쑤빙치(苏秉琦, 1909~1997)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수많은 문화재를 파괴하고 고고학자들을 괴롭혔던 문화혁명(1968~1974)이 끝난 뒤에 복권이 된 쑤빙치는 국가의 개혁개방 정책에 걸맞게 새로운 중화문명의 이론인 ‘다원일체론’을 내세웠다. 현재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문명은 마치 물길이 하나의 큰 강으로 합쳐지듯 중화문명으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때마침 요하 일대에서 새로운 홍산문화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중원(중국 중심의 평원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채도(색칠한 토기)와 옥기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츠펑시는 전통적으로 만주에 포함되기는 해도 베이징에서 직선거리 340㎞로 중국의 중심과 가까우며, 몽골 초원으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 중국에서 본다면 북방의 다른 지역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인 이 츠펑의 홍산문화야말로 중국 문화가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는 다원일체론을 선전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시작된 홍산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은 개혁개방에 뒤따른 팽창적인 중화문명과 함께 중국 사람들에게 널리 선전되었다.


홍산문화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사로잡았던 이유는 바로 그곳에서 출토된 옥기가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만들던 옥 제품과 흡사한 명품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C자형으로 굽어진 형태의 용 모양 옥기는 홍산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용 모양 옥기는 여러 홍산문화의 신전과 무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태아의 모습과도 유사해서 부활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지난 2월에 중국 네이멍구자치구의 구도인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그런데 이 지하철의 손잡이가 바로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옥룡 모양일 정도로 중국인들의 홍산문화에 대한 사랑은 대단하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구도인 후허하오터 지하철. 손잡이가 홍산문화 옥기 모양이다. 출처 중국 인터넷


5천년 전 홍산문화의 옥기가 어쩌다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중국의 옥기 사랑과 이어졌을까. 그 실마리가 얼마 전 발굴되었다. 중국 산시(섬서)성 한청(韓城)시의 량다이춘(梁带村)이라는 곳에서 2800년 전 춘추시대 귀족의 무덤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중 예국(芮國)을 다스리던 예환공의 부인 무덤도 있었다. 그 부인의 시신 주변에는 수많은 옥으로 만든 장식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홍산문화의 옥으로 만든 용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 부인이 살던 당시보다 2천년도 더 전에 동쪽으로 1천㎞도 넘게 떨어진 곳에서 발흥한 홍산문화의 옥기를 무덤의 주인이 수집했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이 무덤에는 그 이전 시대인 상나라는 물론 양쯔강 유역의 다른 신석기시대의 옥기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주변의 옥기들을 모아서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계 문명 속의 홍산문화


홍산문화는 동아시아 다양한 문명의 교차점에 있다. 홍산문화가 위치한 지역은 몽골 초원과도 이어지는 교차점이다. 최근에 홍산문화의 토기나 골각기(뼈로 만든 도구)를 연구한 결과, 그 문명이 바이칼과 몽골 일대의 영향을 받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사실 이런 관계는 지극히 당연하다. 홍산문화의 바로 위로는 몽골 초원을 따라서 바이칼 지역과 이어진다. 실제로 바이칼 지역은 신장 지역의 호탄(허톈), 랴오닝성의 수암(슈옌) 지역과 함께 대표적인 옥의 산지다. 홍산문화가 발달한 5500년 전은 세계 문명의 역사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당시 온대 지역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에서는 문명이 발달했고 초원 지역도 유목문화가 태동했기 때문이다. 이때에 홍산문화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지역의 사람들은 청동기 대신에 발달된 옥기를 만들고 거대한 제단과 무덤을 만들었다. 그들의 옥기와 비슷한 형태가 남쪽으로는 양쯔강 유역, 북쪽으로는 알래스카에서까지 발견되어서 선사시대의 문명교류에 새로운 시사점을 주고 있다. 비록 홍산문화는 청동기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옥기와 제사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 다른 지역과는 구분되는 동아시아만의 문명 발달을 보여준다. 그러한 세계사의 중심에 있어야 할 홍산문화가 현대 제국주의와 국가의 이해에 희생이 되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깝지 않은가.


대만의 역사가 쑨룽지는 홍산문화를 중국 문명의 기원이라고 한 중국의 주장을 두고 ‘민족주의와 글로벌 역사관 사이에서 길을 잃은 대표적인 중국 문명 연구’라고 비판했다.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다. 중국은 자신의 영토에 대한 합리화를 위하여 중화제일주의를 내세웠다. 수많은 소수민족을 한족 중심으로 재편하는 논리를 내세웠다. 현대의 국가 통치에 홍산문화를 이용함으로써 홍산문화의 문명사적 의의를 훼손했다는 뜻이다.


홍산문화의 제사 터에서 발견된 채색을 한 토기. 중국국가박물관. 강인욱 제공


한국에서 홍산문화를 한국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그러한 중국의 길을 잃은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5천년 전 신석기시대에 21세기의 현대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국적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홍산문화는 비슷한 시기 한반도 일대의 문화와는 차이가 아주 크다. 홍산문화에서 발달한 채도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홍산문화가 사용했던 용 모양이나 나비 모양 같은 발달한 옥기도 없다. 물론 한국에서도 홍산문화와 비슷해 보이는 돌무지무덤이 있지만 지역과 시간의 차이가 너무 크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둘러싼 갈등의 핵심은 바로 모든 동아시아 문명의 기원은 중국에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그 대안이 홍산문화를 한국 역사라고 주장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홍산문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 그리고 그에 따른 중국의 건국과 민족주의 발흥의 와중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역사인식은 홍산문화에 근거한 다원일체론→고구려를 둘러싼 동북공정→유라시아를 향한 일대일로로 팽창되어 왔다. 이러한 역사분쟁의 시작점에 있는 홍산문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현대국가의 틀이라는 거품을 벗고 홍산문화의 세계사적 의의를 밝히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경희대 사학과 교수


쑤빙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의 기원으로 주창했던 학자.


량지차오(가운데)와 그의 셋째 아들인 홍산문화를 조사했던 량스용(오른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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