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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 보자 2] 벽화로 본 고구려…(6)배우자 없는 벽화
기사입력 2004-02-23 17:32:00 기사수정 2009-10-10 03:32:31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안악 2호분 안칸 북벽 벽화 배치도. 특이하게도 남편은 보이지 않고 안주인만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고분들은 통상 부부를 합장한 묘제이다. 4세기 중엽 안악 3호분(황해도 안악군 용순면)처럼 5명이 넘는 사람들의 뼈가 발굴된 순장제도의 사례도 있지만, 그 이후 묘실에 관을 놓는 자리는 거의 나란히 2개씩이다. 벽화 역시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현 각저총과 평안남도 남포시 약수리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부일처의 부부 초상화나 생활상이 등장한다.

● 남편이나 아내가 안보이는 이유는

그런데 한쪽 배우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평안남도 덕흥리 벽화고분이나 지린성 지안현의 무용총에는 부인의 초상화나 부인이 그려져 있지 않다. 또 지안현 장천 1호분의 중심행사에는 귀부인이 보이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안악 2호분처럼 남편이 등장하지 않는 예도 있다. 부부간의 관계를 표현한 것일까. 전생의 철천지원수가 현생에서 부부로 만나게 된다고 하는데 그 애증의 역사는 예나 지금이나, 신분이 높으나 낮으나 크게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5세기 무용총 벽화에는 부인을 그려 넣지 않았다. 무덤 안칸에 관을 놓는 자리도 아예 하나밖에 없다. 부부 사이가 그만큼 나빴을까. 혹은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풍습대로 묘주인의 부인을 친동생이 차지했기 때문인가. 후자일 가능성이 높겠다.

무덤 주인의 생활상은 안칸 북벽의 장방 안에서 벌어진 모습이다. 인접한 각저총과 유사하게 전체 벽면을 무대처럼 꾸민 것이다. 네모꼴 관을 쓰고 점무늬 바지에 붉은 띠의 검정색 저고리 차림인 주인공이 중앙에 앉아 있다. 상류층의 의자생활을 보여준다.

이 벽화는 손님을 맞는 장면이다. 한데 두 손님의 스타일이 색다르다. 한 명은 흰 주름치마 위에 롱코트 형 검은색 겉옷을 걸치고, 머리는 삭발한 듯하다. 피부색도 고구려인보다 진한 적갈색이다. 서역 어딘가에서 방문한 외국인이다. 무용총 천장에 가득한 연꽃무늬를 보아 불승(佛僧)으로 여겨진다. 앞의 승려는 두 팔을 벌리고 열심히 부처의 세계를 강론하는 자세이다. 고구려에는 4품 관료인 태대사자 이상에서 외국 사신의 접견 임무를 맡는 ‘발고추가(拔古鄒加)’라는 관직이 있었는데, 묘 주인이 바로 그 고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인물마다 사족반에 다섯 개씩의 검은색 칠기 반상기가 차려져 있다. 그릇 가운데 인물에서 먼 쪽의 찻잔이 눈에 띈다. 그 위로는 두 개의 병과 과일을 푸짐하게 쌓은 긴 다리의 소반이 놓여 있다. 외국 승려를 만찬에 초대한 뒤 후식과 다례(茶禮) 의식을 겸한 상차림으로 보인다. 과도를 든 시종이 시중을 들고 묘 주인 뒤에는 두 청년이 대기해 있다. 모두 당시 하급관료나 남자들이 썼다는 고깔 형태의 ‘절풍모(折風帽)’를 쓰고 있다.

● 모자는 신분의 상징

5세기 장천 1호분에서 묘 주인의 생활상은 앞칸 왼쪽 벽에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특이하게도 여러 행사가 뒤섞인 대축제를 묘사한 것이다. 전체 벽면에는 연꽃 비가 날린다. 벽면의 아래쪽은 수렵도이고 위쪽 그림은 무악, 씨름, 광대놀이 등 불교축제인 칠보(七寶)행사 장면으로 해석된다.



묘 주인은 큰 나무 아래에 있다. 마치 우리 민속에서 마을 앞의 거목을 당산나무로 신성시한 것과 같은, 어느 특정 지역의 신목(神木)일 법하다. 이 신목과 함께 야외에서 벌어진 축제로 보아 묘 주인은 그 지역의 지방관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벽면의 예불이나 무악장면에는 부부가 등장했는데 여기에는 부인을 대동하지 않았다. 행사 중 남자들만의 공적인 모임인 듯하다.

무덤 주인은 지워졌지만 큰 나무의 왼편 의자에 앉아 그 맞은편의 관리들을 대면하는 장면이다. 그 앞에는 긴 다리소반에 소뿔 모양의 토기잔이 보인다. 검은 술병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은 인물과 반 무릎을 하거나 서서 허리를 굽힌 인물은 물방울무늬의 바지저고리 차림이다. 머리장식은 흰 모자로 상투를 덮고 띠를 두른 절풍모에 새 날개 모양의 깃을 꽂은 모습이다. 관료를 나타내는 조우관(鳥羽冠)이다. 고구려의 관모 제도에 ‘고관은 청라관(靑羅冠), 그 아래는 붉은 비단의 비라관(緋羅冠)에 새 날개깃을 꽂고 금은을 장식했다’는 ‘구당서(舊唐書)’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형태이다.

신목에는 왼편 가운데 원숭이로 보이는 동물이 기어오른다. 그 좌우의 무릎을 꿇은 인물과 긴소매 저고리를 입은 작은 소년은 원숭이 놀이와 관련된 것 같다. 이 장면의 오른쪽 위로는 공 던지기와 수레바퀴 올리기를 하는 두 광대가 뒤섞여 있다. 묘 주인의 왼쪽 뒤로는 일산(日傘)을 든 시종과 흰 천을 든 시녀가 보인다. 남녀가 모두 바지저고리 차림이다.


이태호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

●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 시동생 남편으로 섬겨

연나부 출신 우씨는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 두 왕의 왕비였다. 첫 남편인 고국천왕이 죽자 바로 아래 시동생인 발기를 제치고, 둘째시동생 연우를 왕(산상왕)으로 등극케 하고 두번째 왕후가 된 것이다. 부여나 흉노 등 북방유목민 전통의 ‘형사 취수제’ 풍습을 따른 것이지만 왕후 우씨의 권력을 향한 지략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우씨는 후사를 이을 아이를 갖지 못했고 질투심 또한 강했다.



산상왕이 관나부의 주통천에 사는 후녀(后女)와 관계를 가져 아이를 갖게 하자 후녀는 후궁으로 들어와 아들(11대 동천왕)을 낳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씨 왕후는 후녀를 죽이려 음모를 꾸미는 등 시샘이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동천왕이 등극한 뒤에도 왕의 옷에 국을 쏟는다든지 하며 괴롭혔다. 그러나 동천왕은 넓은 아량으로 우씨를 태후로 모셨다.

태후 우씨는 임종을 앞두고 “내 행실로 인해 지하에서 고국천왕을 뵐 면목이 없으니 산상왕릉 곁에 무덤을 써 주시오”라고 유언했고, 대신들은 그에 따랐다. 그러자 고국천왕이 어느 무당의 꿈에 나타나 “우씨가 산상왕 곁으로 간 것을 보고, 하늘에서 만난 우씨와 심하게 다투었는데, 분하고 부끄러우니 나를 가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무당의 전언에 따라 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 일곱 그루를 심었다는 것이다. 이상은 ‘삼국사기’가 전하는 이야기다. 죽은 뒤까지 벌이는 남자의 질투도 만만치 않다. 이런 정치적 또는 인간적 갈등으로 고분 벽화에서 부인이 제외되거나 남편 없는 고분이 조성됐을 수도 있겠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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